흰 쪽문으로 다니는 사람
편의점 맞은편 언덕길 정면으로 보이는 집 오른쪽 흰 쪽문을 열고 전화 부탁드려요. 섬세한 요청사항이었다. 배달 품목은 설렁탕 두 그릇. 지역에서 나름 고급 식당이라 불리는 곳의 설렁탕이다. 깔끔하게 진공 된 포장용기부터 음식을 담은 가방까지 고급스럽다. 괜히 사이드 미러로 내 모습을 훑어본다. 입고 있는 조끼며 배지가 배달원의 상징이라 벗을 수 없지만 어딜 가나 예쁨 받는 내 클래식 오토바이가 꽤 품격 있으니 됐다. 주소지는 예상대로 부촌이었다. 도심 사이 끼리끼리 일구어놓은 단독주택들 중 하나였다.
과연 요청사항이 자세하여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종이가방 속 음식을 감싼 보자기가 흐트러지지 않았는지 확인하고 흰색 쪽문을 열었다. 작은 울타리가 이중으로 있어 현관 역할을 하는 모양이다. 전화를 걸자마자 젊은 여자가 나왔다. 그녀는 여자아이라고 불러야 할지, 여성으로 불러야 할지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 집의 살림을 감당하고 있다는 건 차림으로 알 수 있었다. 음식을 건네주고 돌아서려는데 그녀는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꼭 기다려 주시라고 말하고는 현관 계단을 올라 마당 잔디밭을 가로질러 사라졌다. 마당엔 꽃과 늘어진 개가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보통의 가정부 혹은 집사라기엔 그녀의 나이가 너무 어린 듯했고 집안의 여식이라기엔 차림새가 마냥 인부의 몫이었다. 사정이야 알 수 없어도 세상엔 다양한 삶의 형태가 있으니 그러려니 했다. 문제는 내가 그 현관에서 기약 없이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딱히 바쁜 시간은 아니었으나 고장 난 사람처럼 가만히 서 있기 뭣해서 시선 닿는 대로 두리번거렸다.
집은 정말이지 좋아 보였다. 마당을 보면 정원사를 쓰고 있는 게 분명했고 개 역시 털이 반질한 걸 보니 적어도 내가 스스로를 키우는 금액보다 돈이 더 많이 들었을 것 같다. 이런 집은 과연 어떤 사람이 살까. 그런 사람들도 결국 배달음식을 시켜먹는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세상은 이런 면에서 참 공평하지 않나.
오 분은 넘었고 십 분은 되지 않았을 시간이 지나 앞치마 차림의 여자가 도로 나왔다. 그녀는 고생하셨다면서 현금 만 원 한 장과 귤을 몇 알 건넸다. 처음엔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몰라 해당 건은 이미 선결제가 되었으니 괜찮다고 말했다. 들고 있는 돈이 만 원이니 배달비용을 생각하는가 싶어 배달비 역시 포함된 것이라 덧붙였다. 그녀는 그게 아니라고, 고생하신 비용에 대해 드리는 것이니 부담 갖지 말고 받으라 했다. 이건 이상한 감정이었다. 단순히 온라인상으로만 체크되던 나의 수고가 현실로 보이는 건 두려울 만큼 이상했다.
몰래카메라라던가 촬영이 아닌가 의심이 들었지만 그런 경우는 아니었다. 나중에야 듣고 보니 일대 배달원들에게는 유명한 집이었다. 흰색 쪽문집이라 불리는 그 웅장한 대궐은 회장이 산다더라, 거물 연예인이라더라, 외국인 교수라더라 하는 무수한 소문과 더불어 별도의 팁을 주는 이른바 황금 고블린이라고 했다. 괜찮은 코스라면 상세주소를 확인하기 전에 사라지는 선착순 전투콜의 특성상 아주 가끔 운이 좋은 날 가게 되는 집이라고.
난 귤을 받아 돌아 나오며 언덕 아래 편의점 파라솔에 앉아서는 냉기가 가시지 않은 귤을 까서 입에 넣었다. 정면으로 있는 대문은 값비싼 목재와 철근으로 돌담과 어우러졌고 그 옆엔 아마도 차가 드나드는 개인 차고지로 보이는 문이 똑같은 재질로 있었다. 그렇다면 흰색 쪽문은 가정부와 집을 관리하는 사람들만 드나드는 뒷문이겠지.
다른 배달원들의 말을 들어보니 팁을 받았다는 말은 있어도 귤을 받았다는 말은 없었다. 모두가 받은 보통의 만 원은 그 집의 주인이 내주는 돈일 것이다. 좋은 집의 가정부라 한들 배달음식이 올 때마다 자기 지갑에서 돈을 꺼내 줄리는 없으니까. 그러나 귤은 그녀가 건넨 호의였다. 더운 날 바깥에 서서 기다리게 한 미안함일 수도 있다. 좋은 사람에게 받은 귤의 맛이 아직 선명하다.
나는 만 원을 받아 작게 접어 대신 쓰시라 그녀 손아귀에 도로 놓아주고 귤만 받아 잘 먹겠다며 나왔다. 한심한 일이었다. 난 볼품없이 비뚤어진 사람이라서 만 원짜리 지폐가 집주인이 건네는 적선의 방식으로만 보였다. 마음을 돌아보면 내가 그녀에게 대신 쓰라면서 지폐를 건네 준 마음 역시 별 다를 게 없어 부끄러웠다. 어떤 연유로 어린 나이에 가정부 일을 하며 지내는 것인지 궁금증에 쓰인 마음까지도 죄다 미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