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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 Feb 03. 2023

멋과 맛, 그리고 말

In bocca al lupo!


영화 <대부>를 보았다. 이탈리아식 누아르의 정점이라고 부를 수 있는 영화다. 이탈리아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았지만 시칠리아에는 가 보고 싶은 꿈이 있었다. 산티아고를 함께 걸었던 동생들이 있다기에 나는 기차를 끊었다. 비행으로 손쉽게 갈 수 있었지만 손쉽게 가고 싶진 않았다. 시칠리아를 모조리 누빌 수야 없겠지만 기차는 많은 걸 내게 보여주겠지. 그런 마음이었다.


로마에서 매일 아침 다니던 카페의 주인에게 그런 말을 했더니 그는 커피를 내리다 말고 아련한 눈빛에 잠기며 시칠리아를 생각하는 듯했다. 시칠리아는 맛과 멋의 도시야. 혹자는 시칠리아를 무법자의 도시라고 평하기도 했는데 남자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의 말이 더 설득력 있다. 카타니아행 기차는 아침에 출발했다.



기차를 참 좋아한다. 어디서 내릴지 모르는 사람들이 어딘지 모를 정차역에 저마다 내리고 타길 반복했다. 그러나 잠시 멈출 뿐, 언제나 기차는 뚜렷한 목적지를 향해 달린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자유롭게 움직인다.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있으며 눈을 감은 채 실려갈 자유도 있다. 기차가 각 역에 멈출 때마다 사람들은 열차의 단단한 철제 손잡이에 매달려 담배 연기를 뿜었다. 증기 기관차였다면 연기도 함께 휩쓸렸을 것만 같은 느낌. 나는 함께 매달려 담뱃불을 빌렸다.


이윽고 어느 간이역에서 한참이나 시간을 보낼 때, 나는 열차가 무슨 이상이 생긴 줄로만 알고 우물쭈물 다른 승객들에게 물었던 것만 같다. 어쩌지, 기다릴 동생들이 떠올랐지만 별 수 없다는 걸 알고 담배나 태워야 했다. 불 좀 빌려주세요. 불은 내 가슴에 있어. 사내가 이태리 억양의 영어로 말했다.



그는 남부 사람이었다.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그가 말하기로 열차는 배에 실린다고 했다. 떨어진 섬을 어떻게 지날까 궁금했는데 배에 싣는다니 농담도 잘하지. 해상대교나 해저철도를 생각한 나의 선입견과 다르게 열차는 잘게 조각나 배에 실렸다. 사람들은 큰 짐을 던져둔 채 자연스럽게 열차에서 내렸다. 갑판에 오르니 지중해가 펼쳐진다.


마음이 벅찬 건 어쩔 수 없다. 바다는 벅찬 가슴을 담아두었기 때문에 땅보다 넓은 것이라고 한다. 벅찬 마음은 사람의 부피보다 크다. 돌아다니며 사진을 잔뜩 찍으려다가 그냥 관둬버리고 맥주를 한 병 샀다. 두 팔과 두 다리를 쭉 뻗고 갑판 벤치에 앉아 맥주병을 드니 낙원이 따로 없다. 아, 이대로 세계는 멸망하라지. 나는 저기 잠겨 죽어도 좋다. 사내가 곁에 다가와 앉아 외친다. “친친-!”


가슴에 불을 품은 사내가 맥주를 들이켜며 걸걸한 탄성을 뱉는다. 딸의 결혼식에 간다네. 고향에 가는 이유는 그랬다. 이혼한 아내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 결혼을 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나는 이탈리아의 결혼 문화란 고작 대부에서 밖에 보지 못했기 때문에, 친부라고 해도 재혼된 가정에서 자란 친딸의 결혼식에 갈 수 있는지를 잠시 고민해야 했다. 고개를 잠시 털고 사내의 탄성에 맞추어 생각을 바꾼다. 가슴의 불이 식는 소리인가. 하고 싶은 일이 있어 고향을 떠났다네. 어부의 아내로 살게 둘 수는 없지 않은가. 사내의 능숙한 영어는 선원 생활로 배웠다고 했다. 삶의 우연이란 기묘해서 어부로 살기 싫어 떠난 사내가 결국 뱃일을 하고 있는 것이 그러하고, 그런 아내는 결국 다시 어부랑 재혼을 했다고 한다. 자넨 아는가, 어부라는 건 그늘에 불과해!



갑판을 슬쩍 가리고 있는 차양을 가리키며 그는 외쳤다. 나는 위를 바라보았다. 차양이 얼굴을 반쯤 그늘져 가리고 있었다. 시간에 의해 해가 기울면 그늘은 짙어지거나 옅어질 것이다. 어부가 그늘이라는 그의 말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하든 상관없었을 것이었다는 회한에 가까운 뜻이겠지. 친친! 나는 ‘딸의 결혼을 축복하며!’ 그는 눈웃음으로 병을 부딪혀왔다. 초대를 받았기에 고향에 가는 마음 중, 씁쓸함이 묻어나는 건 딱 그곳뿐이었다. 


열차가 다시 조립되어 출발했다. 사내와 같은 칸은 아니었지만 나는 낮술에 조금 취하여 얼굴이 벌게진 상태였다. 그와의 대화는 한낮, 잠깐의 유희였다. 카타니아에 가기 전 해안절벽을 달리는 창 밖 풍경이 환상처럼 일렁이고 잠깐 잠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창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In bocca al lupo!


나는 부리나케 내려서 그에게 다가갔다. 그게 무슨 말이야? 행운을 빈다고. 그는 말했다. 인 보까 알 루뽀. 사내의 억양과 발음을 한 번 더 따라 했다. 그리고 그에게 똑같이 말해주었다. 늑대의 입으로 들어가라는 뜻이란 걸 나중에야 알았지만 나는 그 발음에 매료되어 그와 꽉 끌어안은 뒤 헤어졌다. 열차는 더 이상 증기를 뿜지 않았지만 경적은 울리고 있었다. 시칠리아를 맛과 멋의 땅이라 들었지만 나는 말의 땅이라 생각하고만 싶었다. 







@b__a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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