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게 여행인 거죠?
시칠리아에 간 것에 다른 이유가 있긴 했다. 산티아고를 함께 걸었던 재성과 주원이 마침 시칠리아로 넘어와 좌충우돌 여정을 이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난 그 엉망진창에 잠깐이나마 합류하고 싶었다. 카타니아의 짙은 노랑과 고동빛깔은 영화에서 본 바로 그 색이었다. 주먹구구로 요동치는 공간이 주는 힘은 마음에 동요를 일으키기 충분했다.
위험하다. 골목이 풍기는 적당한 긴장감. 야성이 느껴지는 거리. 편협한 이미지에 국한되었을지 몰라도 거기서 나는 사람내음에 취해 날 온전히 드러내놓고 거닐 수 있었다. 재성과 주원은 거지꼴이 되어 나를 반겼다. 몰골을 보면 나 역시 다를 바 없으나 녀석들은 고생을 많이 한 듯 보였다. 그나마 모든 것이 순례자를 위해 마련되어 있던 순례길과는 달리, 배낭여행이란 여기저기 부딪치며 시행착오를 거치는 게 기본이니까. 그간 궁금했던 것, 방식을 묻느라 그들은 안부인사마저 제치고 달려들었다.
녀석들은 이행하는 모든 것이 완벽하게 실행되지 않는데 어떻게 하느냐고 했다. 오차범위를 고려해야지. 그걸 다른 곳보다 확대시킬 곳도 있는 법이고, 순탄하게 흘러가는 법도 있으니까. 운이 좋지 않을 땐 차선책을 네 개쯤 만들어 두기도 한다고 대꾸했다. 경험 말고는 답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는지, 그게 답인지 아닌지도 모르게 된 건지. 말없는 두 사람에게 말을 더했다. “어디선가 다시 만나자고 했는데 그래도 이렇게 다시 만났잖아.”
녀석들은 화산에 가고 싶어 했다. 관광지라고는 별 것 없는 동네에서 기껏 갈만한 곳을 찾아 발견한 게 에트나 화산이었다. 그래 가자. 여느 관광지가 으레 그렇듯, 여행사에서 짜인 프로그램을 참여하여 가는 방법 외에 검색이 되지 않았고 가격이 싼 곳을 알아보던 녀석들은 배가 고팠는지 우린 함께 밥을 먹으러 나섰다. 뭔가 맛집을 검색하려고 잠시 멈춘 사이, 나는 담배를 물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르르 나오는 식당을 봤다. 조그마하고 오래된 간판 아래, 이게 식당인지 아닌지도 분간이 되지 않는 장소에서 나온 사람들도 담배를 물었다.
여기는 식당인가요? 모두가 나에게 집중해 잠시 멈칫하더니, 그럼! 대단한 식당이지. 먹어 봐. 후회는 하지 않을 걸! 이태리 사람 특유의 제스처, 손가락을 입에 붙였다가 펼치며 쫙 뻗어내는. 맛있다는 그 손짓. 얘들아 이리 와. 여기다. 여기로 가자.
그렇게 들어선 식당은 허름하고 어떻게 보면 식당이라 말하기에도 뭣한, 호호할머니가 손을 부들부들 떨며 메뉴를 갖다 주는 작은 레스토랑이었다. 가격이 원체 저렴하여 못 미더운 표정인 동생들 앞에 나는 무엇이 제일 잘 나가느냐는 물음을 잊지 않았다. 그 말을 듣곤 건넛자리에서 혼자 먹던 아저씨 하나가 와 걸걸하게 메뉴판 위로 세 종류의 파스타를 콕콕콕 집고 다시 자신의 자리로 가는 게 아닌가!
형, 여기 괜찮겠어요?
재성이가 말했다. 그 말은 못 미덥다는 자신의 속마음과 다르지 않았다. 믿어봐야지. 가장 맛에 까다로울 중년 연배의 무리가 후회하지 않는다며 추천했는데. 한국도 똑같잖아. 모르는 지역에 가서 식당을 둘러보는데 사진만 찍으려고 덤비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랑,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이 쑤시며 나오는 식당. 어딜 갈래? 우리는 아저씨가 점찍은 파스타 셋과 주인 할머니가 추천한 라자냐 하나까지 시켰다. 그릇은 삽시간에 비워졌다.
메뉴를 추천해 주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 아저씨에게 에트나 화산에 대해 물었다. 카운터에 있던 주인 할머니도 거들며, 둘이 이야기를 나누더니 중심가 버스 터미널에 가 몇 번 버스를 타는지 물어보면 될 거라고 한다. 아마 아침 일찍 있을 거야. 저녁을 먹으러 갔다가 최고의 식사를 터무니없이 싼 가격에 먹고, 여행사를 끼지 않고 갈 수 있는 방법도 알아냈으니 일거양득이었다. 배를 두드리며 숙소로 돌아오는데 재성과 주원은 조금 어안이 벙벙해져 이렇게 쉽게 해결되는 게 맞냐 묻고 있었다.
7시 반쯤 나가보자. 여행사의 출발이 보통 그 시각이니까 분명 일반 버스의 출발도 그쯤일 거야. 관광상품을 운영하는 곳은 대개 프로그램이 짜여있기 때문에 조금 이른 출발을 하거든. 우린 세수만 하고 나섰다. 줄지어 있는 버스 중에 에트나 화산으로 가는 버스를 묻고, 다른 노선을 운행하는 버스기사가 누구의 이름을 부르더니 바로 저기라고 말해준다. 쉽네. 출발시간이 남은 사이 번뜩 스치는 무언가가 있었다. 나 잠시 나갔다 올게.
명랑하게 나가 버스기사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몰린 곳으로 달렸다. 에스프레소와 담배를 문 기사들을 헤쳐 들어서니 그래, 이럴 줄 알았지. 주전부리를 가득 팔고 있는 간이매점이다. 아란치니 여섯 개 주세요! 치즈와 시금치가 맛있어. 뒤에서 퉁명스레 말하는 기사님 하나의 말을 듣고 다시 말한다. 치즈랑 시금치 반반! 방금 튀긴 밥튀김 안에 그득 든 치즈와 으깬 시금치. 재성이와 주원이는 허기를 견디고 있었는지 금세 먹어치웠다. 나머지는 산에 가서 먹자. 거기서 파는 건 분명 비쌀 테니까.
여전히 터지고 있는 활화산이었다. 온통 화산재로 뒤덮인 산 위를 걸으며 사진을 찍고, 절벽에 걸터앉으니 “아니, 박하형 위험해요! 미쳤어요?” 인생 뭐 있냐. 뒤돌아본 내 표정은 아마 그렇지 않았을까. 느리고 느긋하게 살면 되지 않을까. 다리를 빙빙 돌리며 공중을 만끽한다. 어쩐지 다 잘 흘러갈 거 같아. 아니면 이렇게 모든 게 덮여버린 것처럼 흐릿하게 사라질 수도 있고.
가는 버스도 있었으니까 분명 시내로 돌아가는 버스도 있겠지. 카페의 직원들은 오후 다섯 시에 카타니아행 버스가 온다고 했다. 들고 온 아란치니를 마저 먹으며, 주원이는 자기가 커피를 사겠다고 한다. 형 덕분에 얼마를 아꼈는지 알아요? 여행사 안 간 것도 다행인데 먹을 거 안 가져왔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아란치니도 가격이 세 배야. 그냥 배고플까 봐 산 건데, 운이 좋았다. 응당 그럴 것이라고 생각은 했으나 실천하기란 어렵다. 별 거 아니야. 나도 그런 시행착오를 겪어왔었고, 어디선가 느닷없이 지출이 커지거나 쫄쫄 굶으면서 버티곤 했었으니까. 그저 지금은 알게 된 것뿐이지 않을까.
알차게 구경을 마치고 돌아내려 와 숙소에서 편히 쉬던 밤, 다른 사건이 터졌다. 다시 이동을 준비하며 짐을 꾸리고 정리를 하는 와중에 재성이가 숙소의 열쇠를 잃어버렸다는 거다. 아니 분명 집 안에 있을 텐데 어디로 사라진 걸까. 우리는 밤새 짐을 뒤지고 소파 구석을 들추며 열쇠를 찾아 헤맸다. 이쯤하고 자자. 어쩔 수 없어. 이런 경우 어떻게 되는지 검색을 하던 재성이가 울상이 된다. 모든 건물을 바꿔야 하는 경우엔 1000유로, 백만 원가량의 공임을 지불해야 할 수도 있다고. 괜찮아. 공동건물 숙소도 아니고 공임비가 비싸더라도 해결할 방법이 생길 거야.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새웠는지 녀석은 다크서클이 가득했다. 젊은 주인이 아침 일찍부터 숙소로 와서는, 이런 경우가 왕왕 있다며 자신에게 여분의 열쇠가 있으니 자기와 함께 열쇠 복사집에 가자고 한다. ‘어떻게 해요?’라는 재성이의 표정을 무시하고 난 흐뭇하게 웃었다. 다녀와. 잘 이야기해 봐.
꽤 시간이 지났을 무렵, 재성이는 아주 활짝 웃으며 주인 남자와 함께 걸어왔다. 열쇠 복사비용 50유로를 반반 나눠 내기로 했고, 그새 커피와 샌드위치까지 얻어먹은 뒤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 왔다. 그가 입고 온 유니폼을 보고 축구에 관심이 있나 화두를 던졌는데 공교롭게 같은 클럽을 좋아하여 신나게 수다를 떨다가 왔다는 것이다. 떠나기 전에 자신의 유니폼 재킷을 벗어주며 다음에 또 꼭 시칠리아에 오면 연락하라고. 걱정에 휩싸였던 지난밤은 얼마나 무의미했나 느꼈겠지.
버스는 기차를 타고 올 때처럼 다시 배에 실렸다. 갑판 위에 올라 담배를 피울 때까지 어떻게 이런 일이 있느냐며 흥분한 재성이와 주원이는 즐거워 보였다. 이런 게 여행인 거죠? 그렇게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고. 재성이는 내게 화산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줬다. 절벽에서의 내 모습은 무척 행복해 보였다.
@b__ak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