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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 Apr 02. 2023

광기라는 역병

영화 <이니셰린의 밴시>

*본문은 주관적인 견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극의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쪽이 버티고 있는 관계란 관계라고 부를 수 있을까.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관계란 불가능에 가깝다. 실수와 상처를 반복하더라도 실수를 하지 않으려는 노력과 사과가 함께 하기에 관계가 이어지는 게 아닐까. 영화는 친구였던 두 사람을 내세워 그 질문을 깊게 파헤친다. 시작은 제각기 다르지만 끝은 이래선 안 된다는 마음이 들게 하는 극단적 결과를 보여주며. 어느 날, 갑자기 콜름은 파우릭에게 절교를 선언한다. “더 이상 내게 말 걸지 말게. 파우릭.”


아찔한 선언 앞에서 영화는 시작된다. 결과를 먼저 보여주고 과거로 시간을 돌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여주는 기법 대신, 그저 결과 이후의 시간을 보여준다. 가장 친하다 생각한 친구가 내게 이런 말을 하면 어떨지 상상만으로 마음이 아리다. 납득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파우릭의 마음도 그와 일치하여 콜름에게 꾸준히 말을 건다. 자신이 잘못한 게 있는지, 어떤 실수를 했는지. 고치겠다는 다짐, 사과하겠다는 제안까지 모든 방법을 강구하는데 콜름은 짧게 말한다. 아무 잘못도 실수도 없었으며 그냥 이제 더 이상 네가 싫다고.



이 영화의 감독은 <쓰리 빌보드>로 스토리텔링의 힘을 보여준 마틴 맥도나다. 이번 영화에도 역시 비슷한 어조로 극이 진행된다. 다음 장면을 상상하지 않을 수 없고 몰입의 최소비용이 어떤 건지 증명한다. 관계의 맥락은 불거진 오해를 연상케 하지만 모든 이유가 모두에게 동일하지 않듯, 흩어져 멀어진 사람들을 떠오르게 만든다. 우리에게도 비슷한 감정이 있었다는 건 희미한 공감 속에 끈질기게 붙어 떨어지지 않는 응어리와 같지 않을까.


<이니셰린의 밴시>에서 이니셰린은 아일랜드의 작은 섬이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시골이나 작은 소도시의 삶이 그러하듯 비밀이 없고 대단한 뉴스가 없고 매일이 반복이다. 이 지점이 콜름에겐 지난한 환멸이다. 매일 멍청한 소리나 일삼는 파우릭과 있으며 더 이상 이렇게 살지 않겠다는 다짐을 절교로 표현한 거다. 그렇다면 파우릭은? 그는 지금의 일상에 만족한다. 매일 변하지 않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하루가 되더라도 친구와 마시는 맥주 한 잔으로 고단을 털어버리는 생활이 좋다. 변화는 없으나 안정적이니까.



이런 변화가 극단적으로 몰아치는 단초는 아일랜드의 내전을 배경으로 한 탓에 있다. 기네스 맥주는 냉장고에도 들어있지 않으며 생맥주조차 아니고, 그게 또 맛있어 보인다. 감독이 전쟁을 대놓고 드러내지 않아도 멀리 본토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폭격 소리에 등장인물들은 불안이 전염된다. 여기까지 전쟁이 미치면 어쩌나. 절교를 했더라도 모두가 성당에 가는 모습은 귀엽기까지 하다. 고해성사는 무척 감정적이며 그걸 응대하는 신부도 마찬가지로 감정을 고요히 다스리지는 못 하는 편이다. 어차피 동네 사람 모두에게 비밀도 없는데 이야기하는 장소만 고해소일 뿐, 작은 섬에서의 생활을 고립이라 생각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가 바라보는 세계란 결코 같을 수 없으니.


정말 무슨 이유일까? 한국인의 정서 상, 전쟁이 코 앞에 있는데도 전쟁의 위기를 심각히 받아들이지 않는 것 자체로 위화감이 들고 만다. 전쟁의 광기나 공포에 무감각해진 상태에서 콜름의 불안을 이해하기란 능동적이지 않은 이상 어렵다. 감히 넘겨짚어보건대, 콜름은 꽤 높은 지식을 지닌 사람일 것이다. 그게 학력과 같은 징표로 드러나진 않지만, 남은 여생을 작곡하는 것으로 보내고 싶다는 걸 보면 애초 영리한 머리를 가진 사람이다.



전쟁은 무서운 것이다. 폭격은 섬으로 넘어오지 않지만 광기는 바다를 건너 이니셰린까지 넘어오고 만다. 광기가 끼치는 불안은 콜름에게 직격타가 되어 남은 여생이 ‘불현듯 닥치는 죽음’이라는 인식이 되게 만든다. 음악을 만든다고 해서 그게 절친한 친구와 절교를 선언할 이유가 되는가? 하는 의뭉스러움은 이로써 해설된다. 잔혹성과 직접적 영향에 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으면서 전쟁의 광기에 극도로 집중케 만드는 힘.


콜름의 지식은 파우릭의 여동생 시오반이 드러낸 진짜 지식으로 인하여 무너지기도 한다. 동경하는 모차르트에 대한 지식을 짚어 얼굴이 붉어지고, 결국 자신의 지성이 우월하다는 콜름의 합리화가 아들을 추행하고 알코올 중독에 빠진 경찰과 노닥거리는 꼴이냐는 지탄에 무너져버린다. 시오반의 역할이 힘을 쓰지 못하는 시대상이 나는 좋다. 여성의 지위 상승도 진행되는 시기지만, 아직 큰 힘을 지니지 못한다는 것. 적어도 외딴섬 이니셰린에서는 말이다.


파우릭은 애잔하게 콜름을 향한 애착을 부린다. 콜름의 절교 선언은 폭력적이다. 내가 슬픔이란 심연에 잠겼으니 함께 들어가자는 꼴이다. 우리가 비슷한 감정에 고립된다면, 이런 류의 스트레스 장애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까. 본인이 스스로 몰아넣은 궁지에서 고통을 감내하며 슬픔으로 비롯된 예술을 할 거라는 선언 앞에 오롯이 존중을 표할 수 있을지. 자신은 없다. 눈엣가시처럼 알짱거리는 파우릭에게 강경한 태도를 보이는 콜름. “계속 내게 말을 걸면 손가락을 하나씩 잘라 네 놈에게 던질 테다.”



시오반은 시름에 빠진 파우릭을 두고 본토의 도서관 직원으로 취직하여 떠난다. 이니셰린에서 고여있는 삶이 지긋지긋하여 사사로운 것에 미쳐버리기 전에. 극에서 시오반의 시선이 제대로 그려지진 않지만 책을 잔뜩 읽고 많은 것을 습득한 사람에게 보이는 세상은 사뭇 다를 것이다. 모두가 전쟁에 대한 막연한 공포 앞에 휘둘리는 사이에도 일상을 지켜내는 힘이란, 시오반에게서만 나온다. 자신에게 온 편지도 뜯어 읽어보는 이웃들의 간섭은 괴롭다. 지리멸렬한 삶을 내칠 수 있다면 그러는 게 어떠하냐고 파우릭에게 제안하지만, 파우릭은 그럴 수 없다.


그리하여 영화는 익숙한 안정 속에서 안주하는 사람과 안정 속에서 변화를 꾀하는 사람, 안정을 버리고 변화를 향해 탈출한 사람으로 나뉜다. 주된 내용은 전자의 입장 둘을 그려내지만 명확히 말하면 여동생 시오반까지 셋의 삶을 그려낸다. 그리고 떠난 시오반을 조명하지는 않는다. 이니셰린을 벗어나지 않는 한 변화를 마주한 사람의 세상은 결코 알 수 없을 테니까.



결국 콜름의 손가락은 다 잘려버리고 파우릭은 참다못한 분노가 터진다. 동생도 떠났는데, 아끼던 당나귀 제니가 콜름의 손가락을 삼켜 죽고 만다. 파우릭의 마지막 다정함을 드러내는 상징과 같은 당나귀가 죽은 소식에 콜름은 깐죽대는 경찰을 패버리고, 진심으로 애도를 표한다. 자신의 광기가 엄한 다정을 죽여버린 것에 대하여. 파우릭은 콜름의 집에 불을 놓겠다는 예고를 전하며 극은 파국으로 향하는 듯하다.


영화에는 마녀가 등장한다. 미신이라 치부될 마녀의 예언은 시큰둥하게 흘려듣는 것에 불과하지만, 곧 이니셰린에 두 죽음이 온다는 말은 관객으로 하여금 누구의 죽음이 될지 깊숙한 불안을 안기게 만든다. 콜름의 집에 불을 지르러 향하는 파우릭에게 그 강아지를 죽이면 안 된다는 말을 하는 마녀. 그렇기에 반려견을 데리고 있는 콜름도 파우릭의 당나귀 제니가 죽은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았을 거다. 파우릭은 결국 콜름의 강아지를 죽이지 않는다. 되려 콜름의 집에 불을 놓고도, 그 안에 콜름이 앉아있음을 알고도 그의 강아지만큼은 죄가 없다는 듯 개를 데리고 돌아온다. 그가 파우릭을 멍청하다 모욕했더라도 여태껏 이야기를 들어주며 맺어온 관계가 남긴 다정함은 죄가 없다고.



콜름은 살아있다. 전쟁의 포격은 멎었고 그는 없는 손가락으로 ‘이니셰린의 밴시’라는 곡을 완성했다. 모든 게 끝난 듯하다. 불타버린 집과 그을린 옷. 개를 데리고 돌아온 파우릭에게 후련한 듯 말을 건네는 콜름. “이제 다 끝난 거 같군. 포격도, 전쟁도” 타우릭은 동의하지 않는다. 이제 시작일지도 모른다고. 전쟁이 끝나도 상처와 광기는 끝나지 않는다. 진짜 전쟁은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이 아니라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움에서 기인한 관계의 오해일지도 모른다. 홀로 모든 것을 겪고 마음대로 끝낼 수 있는 게 아니라. 가슴 한편의 다정을 잃지 않은 파우릭의 모습에서 연약한 마지막 불씨가 되어버린 희망을 본다.


방파제가 될 여력이 없는 사람에게 불안을 전파하지 말라는 명령은 외침에 불과하다. 무식했지만 다정함으로 세상을 이끌던 파우릭을 진심으로 알아봐 준 건 모자란 동네 탕아 도미닉이다. 자신도 무시하던 사람에게마저 변했다는 말을 듣자 씁쓸해하는 파우릭이 진정 절망했던 건, 자신이 건넨 만큼 돌아오지 않는 얕은 다정이었다. 서로의 오해가 굳어지기 전에 돌이키려는 분투는 그래서 신성해진다. 파우릭의 다정이 독기로 변한 건 어떤 영향 탓일까. 관계를 우화처럼 그려내는 영화 앞에 어떤 진심도 진실이라고 말하기 거북하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이리셰린의 멋진 풍광 앞에 죽음의 망령을 노래하는 음악을 만드는 콜름과 같이. 누구의 잘못이라고 말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더라도 다정을 놓지 않을 사람이 되길 기도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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