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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 Aug 03. 2021

검은 연기를 목도하는 훼방꾼

영화 <미안해요, 리키>


*본문은 주관적인 견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극의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이가 벌써 여든을 넘긴 감독이 여전히 영화를 찍어야만 하는 세상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외면당하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사람이 있다. 켄 로치 감독은 주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지 않은 사회문제'를 다룬다. 사회적 문제임에도 대두되지 않는 이유는 단순히 영향력 없는 소시민들이 주요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전작에서도 나왔지만 켄 로치는 무작정 그들의 편에 서지 않는다. 위로나 도움, 해결방법을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냉정하게 카메라로 상황을 주시한다. 결말을 제공하지 않는 그의 방식이 나는 좋다. 그럴싸한 이야기를 얻고 가는 시간이 아니라 질문을 잉태하는 시간. '영화가 사회적 공헌을 할 수 있다면 그 최대한을 끌어낸다.' 이런 연출에 매료되어 질문이 는다.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의 영화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의 관객이자 때로는 비슷한 등장인물로서, 불쾌한 치부가 보이는 듯한 느낌이라 싫어하는 사람은 있다. 그러나 삶은 가끔 징그럽게 여겨지더라도 사랑하지 않고서는 못 버틸 수밖에.



 영화가 중반에 이르기까지 감독의 전작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내용보다 절망적인 상황은 아니다.라고 생각했다. 절망에는 깊이가 없으며 더욱이 잴 수는 없다. 이건 형태가 다른 절망에 대한 이야기다. 리키는 하던 일을 관두고 택배 배달부라는 새로운 일에 도전한다. 회사는 자신들이 짊어지지 않는 리스크를 개인에게 오롯이 전가시켜 삶을 수렁으로 이끈다. 일을 하는 동안 영화 내내 리키에겐 이런저런 일이 생긴다. 리키는 점점 화가 많아지고, 마음대로 되지 않는 삶이 벅차고, 결국 가정이 흔들릴 지경까지 간다. 사실 영화를 이루는 '이런저런 일'들이 없었다면 이렇게까진 되지 않았을 거다. 영화에서 부여하는 심리, '그러지 않았더라면'은 우리 삶에서 흔히 작용한다. 그래서 중요하다. 과연 아들의 비행이 없고, 아이들을 돌보지 못할 맞벌이 부부가 아니었다면 리키의 가정이 무너지지 않았을까.



 본질은 다른 곳에 있다. 사회가 개인을 보호하지 않을 때 희생되는 개인에 대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거다. 우리는 희생자가 되기 전까지 희생자를 신경 쓰지 않는다. 가진 것 없는 개인이 계층 이동을 하기 위해 짊어지는 리스크는 과거보다 훨씬 커졌다. 아들은 리키에게 본인의 선택 아니냐며 조롱하는데 개인의 선택이라 일컫기엔 사회가 너무나 폭력적이다. 영업용 차를 빌리는데 드는 비용과 무리해서 자신의 차를 사는 일. 리키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가. 그걸 선택이라 말할 수 있을까. 어떤 부담이 덜 위험하냐를 따지기보다 삶을 지탱하는데 큰 부담을 감수해내야만 하는 사회를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아들과 싸운 리키에게 아내 애비가 하는 말은 비단 가정 내부의 문제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젠 잘잘못을 따질 단계가 지났어."


 방문 요양사 일을 하는 리키의 아내 애비 역시 불합리한 제로아워 계약으로 스트레스를 받는다. 버스정류장에서 눈물을 흘리는 애비에게 한 여인이 위로를 건넨다. 위로는 굳이 필요했을까? 아이들을 돌볼 시간이 없어 매일같이 냉장고 속 파스타를 먹으라 하고 컴퓨터는 조금만 하라는 연락밖에 못 하는 애비에게 정말 필요한 게 그저 위로였을까. 비관적인 견해지만, 인간은 아무에게나 받을 수 있는 위로가 사회에 만연할 때 잠깐이나마 부당한 사회를 긍정하게 된다. 막연한 위로나 긍정이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처럼 여인은 먼저 버스를 타고 떠나버리지만 말이다.



 아들이 절도로 불려 간 경찰서에서 경찰은 아들에게 "널 아끼고 사랑으로 보듬는 가족이 있다는 걸 감사히 여겨"라 말한다. 그런 가정이 없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으로부터 위로를 챙겨야 하나? 이 대사로 인해 리키가 사회에서 강요받는 의무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괴한들에게 폭행을 당하고도 일을 나서야 하는 건 가정의 해체를 막기 위해서다. 사회적 보장 없이 사회의 가장 기초가 되는 가정을 지키는 의무가 무슨 의미를 갖는지. 리키가 성치 않은 몸으로 일을 나서자 온 가족이 막으며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와 달라는 걸 리키는 애써 외면한다.




 켄 로치는 이 영화로 말하고 있다. 현대 사회의 가정이 균열 후 회복으로 가는 과정은 더 이상 쉽지 않을 것이다. 회복은커녕 간신히 버티기나 할 뿐, 적자생존이나 도태에 관한 잔인한 말들이 서로를 겨냥해 조롱할 것이며 그런 말을 지껄일 수 있는 생존자는 점점 더 희생자보다 적어질 것이다. 세계가 굴러가기 위해 쓸만한 질 좋은 재료는 이미 다 태워졌다. 그러므로 질 나쁜 재료마저 태워야 굴러갈 세계가 도래할 것이다. 지금 이 문제를 외면한다면. 그래서 그는 여든다섯의 나이에도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사회를 갈망한다. 보장받지 못한 권리를 위해 대치된 손해를 복구하려, 더 큰 위험부담을 짊어지게끔 개인을 몰아넣는 사회가 아니라.



 어렸을 적, 해가 질 때마다 뒷마당에서 쓰레기를 태웠다. 주위에 이웃이라고 할 집도 없는 산골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가을에는 추수하고 남은 나뭇가지들을 모아 태웠고 종종 가정에서 나온 쓰레기도 태웠다. 불을 붙이면 연기의 색이 달랐다. 플라스틱을 비롯한 비닐 쓰레기들은 한눈에 보기에도 질 나쁜 매연을 뿜었다. 이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세계를 지탱하기 위한 재료가 나날이 질 나빠져 사회 전체가 검어진다는 사실을. 그래서 여전히 이 세상의 검은 연기를 목도하는 훼방꾼이 필요하다는 진실을.





켄 로치 감독의 전작 <나, 다니엘 블레이크>

https://brunch.co.kr/@baka/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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