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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 Dec 18. 2016

코코넛에 맞아 죽는 사람들을 위하여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극의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본문은 주관적인 견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상을 타는 영화는 치사하게도 늘 내 입맛에 맞았다. 특별한 시각을 갖고 있다고 나름대로 자부해왔으나 결국 보편적인 감성을 지니고 있는 사람일 뿐. 뭐 특별한 시각이 아니면 어떤가.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는 이젠 익숙한 마크와 함께 어떤 자전적 이야기 정도가 아닐까 싶은 포스터. 첫 이미지는 그랬다. 이름을 떡하니 제목으로 붙여 놓은 패기란 <레옹>만큼 무겁지 않았어도.



이런 괴짜기질의 늙은이는 사랑스럽다.

옆집에서 나온 쓰레기 봉투가 제자리에 놓여있지 않을 때 느끼는 불편함을 지체없이 따지고, 개와 함께 산책나온 사람이 개똥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소리지르며 설명하기도 하고 컴퓨터의 사용법을 일체 모르는 아날로그의 향기는 사랑스럽다. 이런 외골수라니. 그래서 그, 다니엘 블레이크가 외치는 정의는 소박하기 그지없어보인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이렇게 지독하게 건조한 색으로, 꾸민다고 꾸민 영화의 스토리는 아주 단순하고 명확하다. 담당의사에게 심장질환을 판정받고 일을 관두게 된 다니엘. 복지수당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다르게, 날아온 우편에는 부적격 판정이 적혔다. 어떤 일인지 알아보려 그는 전화를 건다. 몇 시간에 걸쳐 울린 대기음 끝에 가까스로 받은 담당자의 까다롭고 답답하게 읊조리는 '절차'. 인터넷인지 뭔지, 그깟 것이 알게 뭔가. 신청서가 컴퓨터로만 작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납득하기 힘든 다니엘은 도서관에도 가 보고, 컴퓨터를 알려주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몇 시간 쯤 사투를 벌인다.


한편, 신청시간에 늦어 제재대상이 되어 복지기관에서 쫓겨나는 한부모 케이티. 그녀를 돕다 다니엘은 함께 쫓겨나고 전기료조차 낼 돈이 없는 케이티를 도와 할 수 있는 것을 한다. 집을 수리해주고 트라우마가 생긴 그녀의 아이를 돌봐주기도 하는 다니엘. 그를 조롱하듯 복지기관은 앞뒤 꽉 막힌 정책을 내밀며 다니엘을 괴롭힌다.



상어와 코코넛 중에 사람을 더 많이 죽이는 게 뭔지 아니?

다니엘은 주의력 결핍장애가 의심되는 케이티의 아들 딜런에게 묻는다. 상태가 심각했던 초반엔 어느 말을 들어도 돌아보지도 않더니, 다니엘과 시간을 보내며 마음의 문을 열고 나중에서야 질문에 답을 한다. 코코넛이요. 그래 정답이다. 사람들은 비일상적인 상어에 물려 죽는다고 생각하지만, 일상적인 것에 맞아죽는 경우가 더 많다고. 다니엘은 말한다.



사람이란 기본적으로 답답하면, 직접 찾아가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일 것이라 여긴다.


길고 긴 통화음과 다를 바 없이 다니엘이 찾아간 복지기관의 기다림은 터무니없이 길다. 해결할 방법따윈 알려주지 않고 로봇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는 상담사. 여기서 무서운 것은 전화를 걸었을 때 그 누구도 끊지 않고 기다리는 시간들과, 함께 부당함을 외칠 용기가 없는 사람들로 하여금 보여주는 지금 당장의 절실함이다.

그런 다급함과 절실함들을 복지기관은 외면한다. 인터넷에서 신청할 수 있다는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기관 사람들은 신청서를 복사하거나, 컴퓨터를 사용할 줄 모르는 사람에 대한 설명은 일체 없다. 대부분의 복지 수당이 노인에게 필요한 점을 감안하면 이건 정말 해괴한 짓이라고 느낄 수 밖에. 그리고 이건 어느 나라든 별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소름이 끼친다.



그렇게 코코넛에 맞아죽는 사이에


다니엘은 케이티와 아이들을 데리고 식량배급소에 함께 가 준다. 도움을 받아 이런저런 생활용품들을 챙기는데 케이티가 허기를 못 참고 토마토 수프를 허겁지겁 들이킨다. 진정시키는 다니엘과 직원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말을 하며 그녀를 다독인다. 절망을 표현하는 것에 능숙한 감독이란 관객에게 이토록 잔인하다.

가장 쉽게 빠질 수 있는 건 소위 말하는 나쁜 일이다. 케이티는 아이들을 생각해 런던을 떠나 뉴캐슬까지 왔으나, 집은 청소를 하는 동안 타일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낡았고, 연고 하나 없는 외지에서 자리를 잡을 동안 지원되는 수당은 없다. 생리대를 살 돈이 없어 마트에서 도둑질을 하다 걸린 케이티가 제안받은 건 몸을 파는 일이다. 비록 다니엘이 알고 찾아갔지만, 케이티는 돈을 벌었다고 이야기한다. 더 이상 아이들이 굶지 않아도 되고 신발 밑창이 떨어졌다고 학교 아이들에게 놀림받고 오지 않아도 되는 돈.


인간적인 삶을 위하여 본인이 비인간적이라고 여기는 삶을 택하는 것은 그들의 문제가 아니다. 사람을 벼랑 끝으로 모는 사회의 이면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봐야 하는 일일 뿐이다. 최소한의 생계를 놓치고 바닥까지 가는 것이 몇 단계 쯤 거치는, 가난에게 무력해지는 시간이 어느 정도는 걸릴 것이라고 착각하는 보통의 사람들은 딱 복지기관의 생각과도 같다. 그리고 누군가를 돕는 일에 대하여 불편함을 감수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코코넛에 맞아 죽는 것은 순식간이다.



할 수 없는 사람에게 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는 일


충분히 일을 할 수 있다고 판단내린 복지기관은 다니엘에게 이력서를 돌리고 증명을 하라고 한다. 손으로 직접 쓴 이력서를 들고, 가쁜 숨을 쉬며 여기저기 이력서를 돌리고 기관에 돌아가는데 그는 제재대상이 된다. 일평생 컴퓨터 마우스조차 잡아보지 않은 사람에게 구직사이트에서 남을만한 활동을 요구하는 것. 아날로그 인간에게 디지털 자료를 내라고 요구하는 것만큼 얼토당토 않은 일들이 실제로 벌어진다.


그리고, 다니엘 블레이크.


엿이나 먹으라며 적을 줄 알았지만, 패기있게 페인트 라카를 들고 복지기관의 담벼락에 써 놓은 글은 명확했다. 이 복잡하고 자기들 편할대로 만들어 놓은 복지제도를 뜯어고쳐라. 거지같은 통화대기음도 좀 바꾸고. 영화에서 그렇게 거론되지만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 '심사관'은 영화의 끝까지 나오지 않는다. 몇백파운드나 나온 통화료도 오롯이 전화를 건 사람의 몫이고, 수입이 없는 상태에서 모든 가구마저 팔아넘기고 난 뒤에야 주변 이웃들의 도움을 받아 항소 재판에 가지만 결국 쓰러져 생을 마감한다.



영화에서 흔히 깔리는 변변한 음악 하나 제대로 없는 이 영상은 더없이 깔끔하게 복지제도를 규탄한다. 등장하는 장소도 열 군데가 채 되지 않는 느낌의 영화가 수상하기에 충분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면, 황금종려상을 쉽게 받기야 하겠지만. 여기서 필요한 진심이란 요소는 생각외로 묵직하다.


이웃에 대한 관심이 진작 소멸되었다 생각하는 시대의 한복판에서, 영화관은 가득 차 있었다.

당신과 나의 숨막히도록 연약한 순간, 우린 서로에게 다니엘 블레이크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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