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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 Sep 21. 2019

살아남은 은희의 세계

영화 <벌새>

*본문은 주관적인 견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극의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픔과 상처를 서사로 기록하는 작업은 회복의 시초로 작동될 수 있다. 벌새는 그런 영화다. 일반적인 가족 멜로의 구조를 갖추고 있기보다 해체에 가까운 복합적 이유를 들어 '화목한 가족상'에 비수를 꽂는 작품이다. 9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이르러 가부장적 가족의 형태가 얼마나 권력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여실히 드러난다. 힘으로 따지자면 서열의 가장 아래에 있는 주인공 '은희'의 시선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야기는, 시대를 변명으로 쓴다 하더라도 용서할 수 없는 지점이 곳곳에 도사린다.



은희의 대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유의미한 부분이 있는데 남자 친구에게 메시지를 남길 때나 아빠에게 무언가 물을 때 허락을 받는 형태의 문장을 사용하는 것이다. 여기서 관객은 은희의 위치를 재확인할 수 있고 자신의 귀에 난 혹이 큰 문제가 될까 봐 겁을 내는 것, 오빠 대훈의 방에만 침대가 놓여있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은희는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서글픈 일이지만 감독은 현재에 이르러서도 어느 곳에서나 벌어질 수 있는 시대의 잔재를 영화 중심부에 드러낸다. 부모의 싸움, 무시, 강압적인 교육. 그중에서도 은희가 오빠에게 직접적으로 당하는 폭력에서 카메라는 장면을 회피한다. 위계가 단단한 집안에서 오빠 대훈은 시답잖은 이유로 은희를 폭행한다. 은희의 연애가 개인의 사생활에 간섭하는 것으로 치자면 대훈도 그렇고, 은희를 날라리로 지목한 학급 아이들, 담임교사까지 다양하다. 은희는 어딜 가더라도 불특정 다수의 인간에게 통제되는 사람으로 취급받는다.



한문 학원에 새로 들어온 선생 영지는 이런 환경을 겪으면서 괜찮을 것이라 다짐하거나 달래야 했던, 정말이지 근사한 미래의 은희 자신을 투영하고 있다. 같은 왼손잡이인 점이나 타인의 삶에 간섭하지 않으려는 자세에서 닮았다. 그러나 서로 마음을 쓰는 관계. 영지가 첫 만남에서 은희에게 좋아하는 것을 묻자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몰라 한참을 고민하는 데에서 은희는 스스로의 감정이나 의지를 숨기고 있는 걸 깨닫는다. 영지와의 시간은 교육을 차치하고라도 유익하고, 세상과 유리되어 자신만의 감각을 일깨우는데 도움이 된다.


은희는 귀 밑에 혹이 생기고 수술을 하게 되는데, 곁을 지키지 않는 부모보다 자신을 사소하게 챙겨주는 병원 사람들에게 더 큰 유대를 느낀다. 병원이 집보다 편한 것 같다는 은희의 진심이 영지에게 가고, 영지는 한참 말을 고르고 골라 "은희야 너 이제 맞지 마. 누가 널 때리면 어떻게든 맞서 싸워."라고 대답한다. 그 이후 은희는 물리적 폭력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져 자신에게 내려지는 부당함에 저항하는 상으로 변모하게 되는 것이다.




언니 수희의 이야기는 상황과 대사로 미루어보건대 고작 넘겨짚을 수 있을 뿐 드러난 것이 없다. 그건 이미 그림자가 되어버린 장녀의 삶을 응축하고 있다. 그러나 수희가 강북에 진학하여 받는 취급과 대훈의 대원외고(강북에 있다.) 진학 목표에서 아빠가 보이는 태도는 극명히 대조된다는 것, 주어진 틀을 벗어나 매번 자유를 감행하는 데에서 수희가 치러냈을 과거가 어렴풋이 짐작이 간다.


그중 분명한 건 가족에서 겉도는 듯 보이는 수희가 부모의 싸움에서 주저앉아 울 때다. 방으로 도망치는 대훈과 달리, 마냥 방관자가 될 수 없는 탓이다. 가족이란 공동체에서 그 무게를 지탱하는 데 있어, 도리어 부모가 그 몫을 맡기는 대훈보다도 큰 역할을 수희가 짊어지고 있다. 성수대교 붕괴라는 큰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 한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으로부터 크게 조명되지 않는 수희의 삶은 또 다른 방식으로 차별을 겪는 가족 구성원의 일상이다. 그렇기에 수희가 은희를 데리고 영지가 사라진 성수대교로 잠시나마 향하는 이유는 수희 자신이 가족으로서, 관계의 틈에 응당 자리 잡아야 할 애틋함을 해방하는 방식이라는 것 역시 짚어낼 수밖에.



반면 아빠와 오빠의 울음은 무척 어색하다. 은희에게나 수희에게나. 그 울음을 지켜보며 드러나는 표정은 명백히 '네가 왜 울어?'라는 느낌을 갖는다. 이 가정의 모양에서 권력을 쥔 게 뚜렷한 두 사람의 울음은 고작 스스로의 죄책감을 덜어낼 용도일 뿐 당사자들에게 와 닿지 않는 위선이 아닐까. 눈물마저 빼앗겼을 때 지을 수 있는 표정이 그러하듯.


영지가 사라진 후, 편지로 말미암아 은희의 삶에 더 이상 조력자가 없음을 드러내며 극은 끝이 난다. 가족이란 굴레, 겉만 번지르르한 세상의 허울과 편견,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지되는 세계. 거기서 버텨내야 하는 수많은 은희들.




마지막으로 극에서 비중 있게 다뤄지던 은희의 절친 지숙의 이야기를 해야겠다. 그녀는 영화의 후반부 어느 순간부터 사라진다. 가정폭력을 겪은 정황, 그리하여 은희와 문방구에서 도둑질을 하고 붙잡힌 뒤 두려움에 떨었던 정서적 학대의 흔적을 보고도 흐름에 집중하다 까맣게 잊었을지 모른다. 부모의 이혼 이야기 이후 어떤 사람과 살아야 할지 아직 정하지 못했다는 지숙의 피로감 섞인 대사에서 우린 누구와 이 세계를 공유하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타인의 고통은 그런 식으로 자신의 세계에서 사라지곤 하니까.



영지의 말대로 함부로 동정할 수는 없다. 알 수 없으니까. 그러나 기억할 수 있진 않은가. 그 시절의 은희들이 감당해내야 했던 시간을 생각하면 이 영화는 일종의 헌사, 혹은 다정함과 애틋한 안쓰러움으로 가득한 편지와 같다. 벌새는 그 의미로 적합하지만 난 더 이상의 벌새가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자기 자신으로 산다는 것에 부디 험난한 사투가 필요치 않은 세상이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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