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원치 않은 것을 강요받았던 기억
11시를 가리키는 시계. 불이 꺼진 어두운 집 안에는 두 곳에서 빛이 나고 있다. 엄마와 나 그리고 두 동생이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빛 하나’. 그리고 서재에서 새어 나오는 ‘빛 둘’.
빛 하나
개그 프로그램에서 나오는 뜻 모를 농에 넘치는 웃음소리.
빛 둘
사각사각 연필 소리, 타닥타닥 키보드 소리.
멀리서 나를 부르는 아빠의 목소리. 소파에서 무거운 엉덩이를 억지로 들어 서재로 걸어가는 나.
뜨거운 여름 볕. 그 아래를 걷는 다섯 식구. 지면 아래 공연장의 사회자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들어와 귓속을 강타한다. “자! 어린이 여러분! 다 모이세요! 댄스 경연대회!”. 이목을 끌 수밖에 없는 이 환경에, 우리는 걸음을 멈추고 공연장을 내려다본다. 사회자 말이 끝나자마자 공연장 위로 부리나케 달려가는 아이들. 사회자의 호루라기 소리를 시작으로, 온갖 우스꽝스러운 몸짓을 발산하는 아이들. 함박웃음을 지으며 즐기는 엄마와 동생들 그리고 뒷짐을 진 채 바라보는 아빠, 질겁한 나. ‘난 절대 못 해’
“너도 저기 나가보지 그래?”. 아빠가 말한다. 내 속마음이 들렸던 걸까?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빨리 자리를 뜨자고 재촉하는 나. 그런 나에게 던져진 아빠의 한 마디. “그렇게 자신감이 없어서 어떡하려고 그래?”
“우리 큰 공주 잘하잖아? 알겠지?” 아빠는 연필로 빼곡히 적은 A4용지 한 장을 나에게 건넨다. 훑어보니 아빠가 발표해야 할, 어느 곳의 취임사 인사말이다. ‘이걸 뭐? 대체 뭘?’. 아빠를 바라보는 나. 검토 후, 전체적인 내용 확인을 부탁하는 아빠의 인자한 미소. 가벼운 발걸음. 종이를 들고, 거실로 나온 나.
어렸을 적, 나는 아빠와 얽힌 제2, 제3의 놀이동산 사건이 많았다. 나의 자신감 없음을 꾸짖는 아빠에게 노이로제가 걸려, 청소년기에는 아빠 앞에서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 부자연스러웠고 또, 괜스레 겁이 나기도 했다. 잘하려고 노력할수록 망치게 되는 이상한 ‘덫’에 걸린 것 같았달까. 그래서 더욱 모르는 사람 앞에 나서서 큰 목소리로 발표를 한다든지, 춤을 춘다든지, 노래를 부르는 행동은 정말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자신감이라는 것은 나에게 있어, 아빠를 향한 ‘도장 깨기’ 같은 미션이었다. 한 놈, 두 놈 물리치다 보니, 자연스레 덫에서 벗어나 여러 기회가 주어졌다. 후배들 앞에서 강의할 일도, 팀원들을 이끌고 영화를 찍어 볼일도, 큰 목소리를 내며 일을 할 일도 생겼다. 지금은 그저 때가 되면 해내야만 하는 일들이 되었을 뿐.
이제야 자신감으로 나를 꾸짖던 아빠를 차분히 살펴보게 된다. 아빠는 왜 그때 날 꾸짖었을까. 그 이후에도 왜 소극적인 모습이 보이면 작게라도 냉소적인 태도를 흘렸을까... 아!
“큰 공주, 아빠 내일도 취임식 인사말 잘할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