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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제의 딸 Jun 12. 2020

기계 추첨

02. 인생은 디딤돌

되돌아보면 나는 참 한결같이 '기계 추첨'과는 운이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몇 달 전, 도로 주행 시험 때 일이다. 코스는 면허용 차 안에 부착된 기계에서 자동으로 추첨이 되어 나오는 방식이었는데, 나는 그나마 눈에 익은 A나 B 코스가 나오길 바랐다.

역시나 이변은 없었다. 기계 위에 뜬 알파벳은, 매끄럽고 단순한 굴곡의 ‘C’.


처음 기계와 평행을 이루기 시작한 때는 13살, 중학교 추첨 때였다. 친한 친구들이 모두 집에서 가까운 남녀공학으로 배정을 받았고, 나도 자연스레 그 학교에 배정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컴퓨터 펜에 열이 가득 찼던 것일까, 아니면 좀 쉬어가고 싶었던 의지였던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의 계략이 있었던 것일까, 또 아니면 어떤 알고리즘의 오류가 있었던 것일까.

멀리서 깻잎 머리를 열심히 흩날리며, 가다듬으며, 다시 흩날리며 나에게 달려온 친구. 조절되지 않는 호흡으로 나에게 말한다. “야! 너! 여고괴담!” 시선이 집중되는 복도의 아이들.

그렇게 나는 복도에 주저앉아 13년 인생 최대의 대성통곡을 했다.


<여고괴담>을 기억하시나요?

나의 모교는 마치 여학교를 소재로 한 공포물 <여고괴담>을 떠올리게 하는 곳이었다. 나의 옆 반으로 배정받은 초등학교 동창생이, 자신을 포함해 언니와 어머니 모두 이곳 출신이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학교 건물은 빛바랜 회색에 가까운 핑크색을 띠고 있었다. 언뜻 스치듯 봐도 운영되긴 하는 건지 의문이 들었고, 어딘가 음산한 분위기까지 풍기는 바람에 밤에는 절대 찾지 않으리라, 다짐하게 만드는 외관이었다.


그래도 이 공포물을 학원물로 변형시키는 장치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산책로였다. 소나무가 우거져 있는 산책로는 어느 여학교처럼 다이어트를 외치는 소수만이 전세 낸, 한눈에 봐도 뻑뻑하고, 건조하기 그지없는 모래 운동장을 감싸고 있었다. 학교는 고장의 자랑인 산자락에 위치해 공기가 좋았지만, 그때는 그 좋은 공기가 그렇게 좋은 것인 줄 전혀 몰랐다. 위치 덕에 봄에는 학교 앞에서 벚꽃축제장이 열려 야외 수업을 했고, 다른 계절도 갖가지 핑계를 대며, 자연과 함께하는 수업을 즐겼다.


이 뜻하지 않은 중학교에 입학한 덕에 나는 다양한 영향을 받을 수 있었다. 자연과 함께한 중학교 생활은 나에게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주었던 걸까. 성인이 된 지금 가장 애틋한 학창 시절을 꼽으라 단연, 이 중학교 시절이지 싶다.


생각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되었다고 해서, 시간이 멈추는 일은 없으니까.

시간은 계속되고, 내 인생도 계속되니까. 다른 방향에서 즐거움을 찾아야만 한다.

즐거움을 발견하자.


단순한 굴곡의 C 코스는 과속을 해야 하는 오르막 코스가 있었다. 이 코스로 추첨이 되기 전까지는 마냥 무서웠다. 하지만 시작되고 나서, ‘에라 모르겠다, 즐기자’며, 과속을 두려워하지 않는 나를 발견했다. 막상 마주하면 잘 헤쳐 나가는 ‘실천파’ 임을 알게 된 나.


자, 이제 뭐가 됐든 밟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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