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OncoAzim Mar 31. 2024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

의료비상사태가 벌어진 지 6주째. 이젠 당직과 병동진료에도 적응이 되어 그냥 그러려니 하곤 합니다. 갑자기 전공의들이 들어오고 환자 수가 예전 수준으로 늘어나면 그 상황에 또 어떻게 적응하나 싶은 생각도 듭니다. 물론 당직은 힘듭니다. 의사의 당직은 보통 36시간입니다. 야간근무가 끝나도 퇴근이 안되고 그 다음날 주간근무까지 모두 마치고 퇴근을 해야 하니까요. 

사직서는 내지 않았습니다. 병원을 떠날 마음이 아직 없는데 사직서를 내는 것은 쇼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른 생각을 가진 선생님들이 있습니다. 사직서를 내는 마음은 여러가지입니다. 그것이 정부를 압박하는 무기가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고 정말 그만둔다는 생각으로 내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어떻든 병원과 교수사회에서는 사직서를 내자는 결의만 하였지 개개인이 내는지 안내는지 감시를 하거나 압박을 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정부가 '교수들이 사직 압박을 받고 있다'면서 보호신고센터를 운영한다는 뉴스를 보며 이것도 하나의 쇼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물론 분위기가 다른 병원도 있겠지요.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개인의 결정을 존중하는 분위기입니다. 


교수비대위 명의로 환자들에게 배포할 리플렛이 의국에 쌓여있습니다. 그것을 환자들에게 나눠주는 것도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교수 각자가 결정할 일인 것이지요. 저는 리플렛 내용을 살펴보고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그 리플렛을 보고 드는 의문에 저 스스로가 답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리플렛은 돌리지 않기로 합니다. 

리플렛의 내용 대부분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다만  가장 먼저 나오는 항목인 '우리나라의 의료 수준은 전 세계 최고 수준이다'는 말은, 이런 말을 해도 될까 싶습니다. '이런 좋은 의료시스템을 정부가 망가뜨리고 있다'는 일갈은 틀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국민들에게 울림이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우리나라 의료 수준은 높지만 그 혜택을 충분히 볼 수 있는 이들은 수도권의 중산층에 국한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닌가요. 또한 우리의 높은 의료수준은 수도권 대형병원들의 경쟁에 힘입은 바 크고, 그것은 의료전달체계를 붕괴시키고 전공의의 값싼 노동력을 기반으로 얻은 댓가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정부만의 잘못일까요. 물론 정부의 잘못이 가장 큽니다. 그러나 의사들 역시 환자의 수도권 집중현상과 박리다매식 진료에서 고생도 했지만 이득을 보아오기도 했었습니다. 환자 수를 늘릴 수록, 수술 건수를 늘릴 수록 인센티브를 받아온 의사들이 그것을 포기하더라도 우리 의료는 정상화되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리플렛에 나오는 내용은 아니지만, 여러 매체에서 의사선생님들이 말씀하시는 내용들 중 하나는 '기술의 발전으로 의사의 생산성이 늘어서 앞으로 더 많은 의사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저에겐 이 말이 궤변과도 같이 들립니다. 지금 하루에 100명씩 외래 환자를 보는 것은 아무리 기술적 진보가 일어난다고 해도 정상적인 진료가 아닙니다. 의료는 아무리 정보와 기술이 발달한다고 해도 환자의 언어를 통해 문제를 파악하고  의사소통을 하며 그를 이해시키고 행동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과정입니다. 물론 스마트폰 앱으로 환자가 증상을 입력하고 이것이 과거 정보와 융합되어   인공지능으로 해석되어 문제 목록이 정리되면 좀더 효율적으로 진료할 수 있겠죠. 하지만 의사와 환자간의 상호작용에 있어서는  절대적인 시간이 중요합니다. 지금은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환자를 보기에 종합병원의 전문의 수는 너무 적은 것이 맞습니다. 

물론 대다수 국민들이 만약 더 많은 의사를 원하지만 그것에는 더 많은 비용이 든다는 것에 아직 합의가 안된 것 같습니다. 의사의 시간을 더 쓰기 위해서는 더 많은 돈을 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인데도 공적인 서비스라는 인식때문에 쉽게 동의가 안되는 것 같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의사들은 이 지점에서 사람들을 설득할 수 없으리라 여깁니다. 그래서 낮은 의료수가에 알맞는 3분진료를 제공하는 것이 우리 현실에서의 최선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이대로 두는 것이 답이 될까요? 

물론 하루 100건의 외래를 볼 필요까진 없을 수도 있습니다. 좀더 자세히 보는 대신 원격모니터링 기술과 간호인력의 활용으로 환자 한명 당 외래 방문 횟수를 줄이면 되니까요. 어쨌든 이 '자세히 보기'에는 지금보다는 좀더 높은 비용이 필요할 것이고, 의료서비스의 질 향상을 위해 국민들이 더 지출을 할 의지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의사들도 비용을 더 투입하면 더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고 설득할 수 있어야 할 것이고요. 


비급여 진료과 쏠림현상으로 필수진료과의 의사가 부족한 것, 지역에서 일하는 의사가 부족한 것, 여기까지는 의사와 국민들이 모두 문제라고 생각하고 해결되어야 한다고 보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더 나아가 '의사가 더 필요하지 않고 우리 의료는 지금도 최고'라고 말하는 것은 그냥 현상유지를 하려는 기득권의 몸부림으로밖에 비치지 않을 것입니다. 


어제 작고하신 서울의대 의학교육학교실 신좌섭교수님의 말씀을 유튜브에서 찾아 들었는데 그 말씀이 마음에 꽂힙니다. 

"맹자 이루상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으리라' 는 아이들의 노래를 들은 공자가 제자들에게 '자네들 저 노래를 들어보게. 물이 맑을 때는 갓끈을 씻지만, 물이 흐리면 발을 씻게 된다. 이는 물 스스로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전문직 집단도 스스로 정돈하고 변화시키지 않으면 세상의 업신여김을 당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인 것이지요." 

https://youtu.be/vBBXWo1m1c0?si=fzyY0jyWgSyd0uZ0

한국 의료제도의 모순이 바로잡혀야 한다고 이야기하더라도, 이 모순된 의료제도에서 이득을 취해왔고 그것이 잘못되었으며 스스로도 변화하겠다는 자기 반성 없이는 의사들은 계속 발 씻은 물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암 산정특례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