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아의 나라> 앤 패디먼 지음, 이한승 옮김, 반비, 2022
*이 글은 작년에 썼던 글(https://brunch.co.kr/@cathykimmd/362)을 외부기고용으로 수정한 것입니다*
지난 의정갈등 당시의 일이다. 당시 교육부는 정원을 늘려 교육여건을 갖추지 못한 의대가 의학교육평가원(이하 의평원)의 불인증처분을 유예할 수 있도록 하는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예고했었다. 당시 “의평원을 무력화시키려는 시도”라며 의사사회에서는 비판이 들끓었는데, 관련된 유튜브 동영상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의평원장을 지내신 원로교수님이 “무당을 의사로 인정하는 나라도 있다”면서 정부를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그렇지. 의평원의 인증도 무시하고 정원을 마구잡이로 늘린다면 그것은 무당을 의사로 인정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일견 공감을 하면서 그런 나라가 혹시 어떤 남반구의 후진국이 아닐까 하면서 그 동영상을 시청했다.
그런데 의외로 그 나라는 다름 아닌 미국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미국의 캘리포니아 주였다. 동영상에서 원로교수님은 "캘리포니아는 몽족의 무당도 메디컬 프로페셔널로 인정한다”면서 그런 (이상한) 나라도 있으니 “정부의 권위일랑은 애초에 믿지 말고 민간 자율로 의학교육의 질을 관리하면 된다”고 말씀하고 계셨다.
아, 그런데 몽(Hmong)족. 그러고보니 얼마전 학회 다녀오면서 비행기 안에서 읽었던 책에 나온 내용인 것 같았다. 그래. <리아의 나라>!
몽족은 ‘묘족’이라고도 불리는 라오스 북서부 고산지대의 소수민족이다. 라오스의 공산화 이후 70년대에 15만명이 미국으로 이주하였고, 그들 중 상당수가 캘리포니아에 거주한다고 한다. “리아”는 고향을 등지고 미국으로 건너온 몽족 부모에게서 1980년대에 태어난 그들의 열 네번째 아이다.
작가인 앤 패디먼은 리아의 탄생 장면부터 이야기를 풀어간다. 리아의 가족과 친지들은 미국의 산부인과에서 태어난 아기를 데려와 혼을 몸에 붙들어 매는 하얀 실을 아기의 손목에 묶고 닭과 돼지를 잡아 나누어 먹는 몽족의 전통의식을 치른다. 곧 이야기의 배경은 몽족의 역사로 옮아온다. 인접한 나라인 중국과 태국, 그리고 19세기 인도차이나 반도를 점령한 프랑스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 몽족의 특성은 독특하다. “그들은 조국을 가져본 적도 없지만 노예가 되어본 적도 없기 때문에” “자부심이 강하지만 오만하지 않으며” “문자나 종교라는 구심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대단히 독특한 소수민족이라고 한다.
책은 18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장마다 <Lia> <Hmong>이라는 부제가 번갈아가며 붙어있다. <Lia>는 뇌전증으로 캘리포니아 머세드 공립병원의 응급실과 병실, 중환자실을 리아와 가족들, 리아를 진료하는 의료진의 이야기다. 리아가 앓는 뇌전증 증상을 ‘영혼’이 몸을 떠나버려서 생긴 증상으로 이해하는 리아의 부모, 그리고 발작 증상으로 응급실 단골손님이 되어버린 리아를 최선을 다해 진료하지만 어느 정도는 관성에 젖어갈 수밖에 없고 약을 제멋대로 먹이는 순응도가 좋지 않은 부모를 탓하며 그들의 문화를 이해할 여유가 없는 의료진이 등장한다.
<Hmong>에서는 몽족이 거쳐온 라오스내전과 난민캠프 등 집단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리아의 가족을 포함한 몽족 사람들이 전쟁과 혼돈을 거쳐 죽음의 공포를 딛고 태평양을 건너와 의학을 비롯한 미국의 현대 문명과 부딛치면서 겪는 혼란과 불신을 이해하게 된다. 의료인의 눈에 비친 리아의 부모는 정말 한심하고 무식하다. 뇌전증 지속상태에 빠진 리아를 치료하기 위해 한밤중에도 차를 몰고 응급실로 달려오는 헌신적인 의료진에게 감사를 표한적도 없고, 난민에게도 무상의료혜택을 베푸는 미국의 복지제도에게 조금도 고마워하지 않는 진상 보호자들이다. 그러나 몽족의 언어와 생활에 깃들어있는 의식이 어떻게 형성이 되었는지, 20세기에 그들이 어떤 수난의 역사를 겪고 미국에 정착하게 되었는지를 읽다보면 그들의 마음을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을 것 같고, 어쩌면 우리 환자들을 보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정말 짜증나고 나를 지치게 만들지만 미워할 수는 없는 우리 환자들.
리아는 뇌전증 지속상태와 패혈증이 겹쳐 중환자실에 입원하게 되고, 리아의 부모와 친지들은 의료진과의 의사소통에 실패하고 패닉상태에 빠진다. “죽을 수도 있다”는 경고를 “죽어야 한다”는 위협으로 알아들은 부모는 리아를 데리고 병원을 빠져나가려는 소동을 벌인 후 결국 hopeless discharge를 하게 된다. 의료진의 경고와는 달리 리아는 기적적으로 생존하였고, 이는 가족들의 현대의학에 대한 불신에 불을 지핀다. 리아는 식물인간 상태가 되지만 30세까지 가족의 돌봄을 받다가 사망하게 된다.
‘무당’ 이야기로 되돌아가보자. 캘리포니아 의료계에서는 리아의 케이스를 포함해 몽족의 독특한 문화와 의식구조 때문에 치료순응도가 매우 떨어지는 문제를 확인한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환자는 의사가 권하는 처치에 저항감이 있다 해도 의사가 선의에서 그런 처방을 한 것이지, 자신을 해치려고 그러는 건 아니라는 신뢰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몽족을 대하는 의사들은 그런 신뢰를 받을 수 없었다. 더구나 몽족 입장에서 볼 때 해로워 보이는 투약지시를 따르라고 계속 강요하는 것은 수천 년 동안 복종하느니 죽음을 택해온 몽족의 완강한 기질을 자신도 모르게 거스르는 섬뜩한 과오를 저지르는 것과 같았다.”
하아.. 이런 환자와 가족들을 도대체 어떻게 진료한단 말인가. 정말 골때리는 일이 아닐 수 없는데, 이에 대해 책에서 저자가 인터뷰한 정신과의사이자 의료인류학자인 아서클라인먼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 강제의 모델을 찾기보다는 중재의 모델을 찾아야 합니다. 몽족사회의 일원을 찾거나 의료인류학자를 찾아 중재를 구할 수 있거든요. 단 중재란 이혼과정 같아서 양측이 다 양보한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제일 중요한 게 무엇인지 정한 다음에 나머지는 전부 기꺼이 타협할 수 있어야 합니다. ..... ”
결국 그런 '타협'의 하나로 캘리포니아 주가 택한 것은 몽족의 치료순응도를 높이기 위해 몽족 무당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즉 몽족 무당의 독립적인 의료행위를 허용한 건 아니지만, 현대의학적 치료의 보완적 부분으로 받아들여 몽족 환자들의 치료에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책에는 이런 내용이 나와 있다.
"1980년대 중반 프레즈노의 중부 캘리포니아 다민족 서비스 센터는 연방정부의 단기지원금 10만 965달러를 받았다. 몽족치료사들과 서구 정신건강 전문가들을 활용하는 통합적인 정신건강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자금이었다. 이에 따라 여덟명의 치 넹 (몽족 무당)이 자문위원으로 고용되었다. 그들은 250명의 환자를 치료했는데, 대부분 정신건강의 일반적인 경계를 넘어서는 불만을 호소하던 사람들이었다. 이 프로젝트의 경과 보고서는 미국 납세자들이 자금 지원을 한 자료 중 가장 놀라운 것 가운데 하나다. 여기엔 '악귀 쫓는 의식' '이승과 저승을 나누는 의식' '큰 전기레인지 위에 사는 신령을 달래는 의식'이 포함된 열여덟가지 치유의식이 기록되었다."
책에서는 이러한 '의식'만으로 환자의 증상이 호전된 경우도 있었고, '의식'으로는 호전되지 않아 현대의학적 치료를 완강히 거부하던 환자가 받아들이게 된 경우도 기술하고 있다. 즉 현대의학으로는 해결하기 어렵거나, 환자가 필요한 치료를 받아들이게 하기 어려운 경우 이러한 문화적 접근은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 책이 우리나라에서 출판된 것은 2022년 9월이지만 원작은 1997년에 출판되었고, 이를 통해 알려진 몽족 환자들에 대한 오해와 문화충돌을 계기로 머시 메디컬센터 (책에 등장하는 머세드 공립병원의 현재 이름)에서는 "Shaman Certification Program" 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솔직히 좀 너무 나갔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환자의 건강과 안녕이라는 목표를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도 마다하지 않고 다양한 문화적 배경의 환자들을 수용하려는 시도를 한다는 것이 놀랍기도 하다. 물론 그럴 수 있는 것은 미국 의료계의 권위가 확고하기 때문일 것이다. 즉 의학의 권위가 침해당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어야 보완대체의학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의사들은 아직 무당을 보완재로 활용하기보다는 무당과 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이니 아직은 면허와 의학교육인증에 국가의 힘을 빌리기는 해야 할 것 같다. 다시는 윤씨같은 이상한 대통령이 나오지는 않기를 바라며...
아무튼, 사람의 말과 행동의 양식을 역사와 문화의 맥락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어찌보면 당연한 이치를 진료실에서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이를 장대한 민족의 역사와 현대 병원에서의 드라마를 엮어 설득력있게 제시한 이야기는 정말 매혹적이니 한번 꼭 읽어보시기 추천드린다.
p.s. 작년에 전자책으로 읽고 올해 다시 읽으려고 인쇄본을 샀는데 2022년 초판인데 2025년에 2쇄를 찍었더라. 이런 좋은 책이 3년만에 2쇄를 찍다니 안타깝다..... 우리 의대 도서관에 좀 들여놓으라고 했는데 여러분 많이 사주세요. 흙 제 두번째 책도 2쇄를 못찍었는데 내코가 석자입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