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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io 시오 Jan 01. 2016

모순으로 사는 것

반갑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모순으로 가득 찬 사람이다. 각각의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그 종류가 다양한데 그게 참 우스울 정도다. 단적인 예가 여기 있다. 나는 아기자기하거나 사랑스러운 걸 별로 안 좋아한다. 어렸을  때부터 레이스, 분홍분홍 티셔츠, 곰 토끼 강아지가 수놓아져 있거나 마음 따뜻하게 하는 영어 문구가 적힌 옷이나 물건은 사양했다. 인형도 촉촉한 눈망울을 가진 곰돌이 같은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길가에 꽃을 보고 '와아 꽃이 너무 예쁘다아' 하는 일은 절대 없었다(지금은 몇 종류의 꽃을 좋아하는 쪽으로 발전). 그런데 몇 주 전에 내 방을 방문한 친구가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너 방에 진짜 귀엽고 아기자기한 게 많구나!
뭔소리여?


완전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나는 키가 작고 귀엽게 생겼지만(응?) 남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에는 취미가 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내 방에는 공책밖에 없는 책상 하나. 침대 하나. 그 옆에 책이 올려진 작은 탁자 하나. 이 정도면 완전 안 귀엽지. 문제는 방 한켠에 놓인 피규어와 내가 그린 그림들이었다. 근데 나는 억울했다. 그건 귀엽고 아기자기한 게 아니라 무심한 듯 귀여운 듯 쿨한 건데? 변론하고 싶었지만 그만뒀다. 뭐라고 해 봤자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 사람 눈에는 그게 다 귀여운 거니까. 사실 나 빼고 거의 모든 사람이 내 방을 귀엽다고 했다. 나는 안 귀여운 사람인데 귀여운 사람인 거였다.   





 이런 산뜻하고 가벼운 모순점이야 '나한테 그런 면도 있더라구' 하면서 하하호호 얘깃거리로 꺼낼 수 있다. 그 보다는 무거운 종류, 예를 들면 사람들을 많이 케어하고 관심 쏟는 줄 알았는데 꽤 개인적이고,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는 줄 알았더니 제법 외로움을 타는 나의 모습에도 태연하게 접근할 수 있다. 한 가지 면만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어딨어. 그렇지만 사람에게 매달리지 않고 하나님께 의지하자, 나보다 남을 사랑하자 스스로에게 상기시켜 주면서. 그러나 마냥 웃어넘길 수 없는 모순의 벽이 존재한다. 넘길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 사실은 그 앞에서 절망하고, 고개를 떨구게 된다. 저 바닥 밑을 쳐다보고 있자니 빛이 들어올 틈이 없다.  




내 삶을 내 스스로가 개척해 나간다고 생각하면 참 답이 없었던 때가 있다. 나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에게 내 운명을 맡겨야 한다니. 좋기는커녕 괜찮은 사람도 아닐뿐더러 무엇이 나에게 좋은 건지조차 모르는 나에게. 내게는 예수님이 필요함을 느끼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이전 것은 지나가고 완전히 새로운 것이 된다고 한 말씀이다 (고후 5:17).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는 얼룩덜룩한 내가 예수님으로 인해 새 것이 되고,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가 된다는 것(고후 5:21)은 나 스스로는 절대 제시할 수 없는 해결책이었다.




내 삶을 내 마음대로가 아닌 하나님 원하시는 데 쓰기로 한 뒤 몇 년이 흘렀다.  그동안 나는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 더 기쁜 사람이 되었다. 점점 아량이 넓은 척, 괜찮은 척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대단한 희생을 한 양 혼자 서글퍼하지 않는다. 내 생각과 감정만 따라가지 않는다. 내 약한 부분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려고 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매번 궁금해한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이기적이고, 본능에 약하고, 더 괜찮은 사람이고 싶고, 필요 이상으로 나태하다. 영악하고 치사한 나의 모습에 신물이 난다.




내게 있는 모순을 마주하는 것, 아니 내가 모순 그 자체임을 발견하는 것은 달갑지 않다. 내가 나아가는 방향이 아니라 내 구질구질한 모습 자체로 시선이 꽂힌다. 마음에 들지 않아. 만약 게임이라면 간단하게 그만두면 될 텐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하면서. 그러나 여기서 필요한 것은 나에게 꽂힌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는 일이다. 내가 가고 있는 방향으로, 죄의 무덤에서 죽을  수밖에 없던 나에게 생명을 준 존재에게로. 예수님에게로. 로마서 6장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6절)... 이와 같이 너희도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11절).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12절)...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13절)



여전히 남아있는 죄의 습관들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내 안에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들을  하나하나 바로잡는 일의 시작이 된다. 그러나  방구석에 앉아서 나의 못남과 악함을 곱씹기만 하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 아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나에게 준 생명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가 내 생명을 위해 희생하셨듯 나는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사랑해야 한다. 이 사랑은 감정적인 사랑이 아니고 행동이고, 희생이고, 예수님 사랑을 전달하는 거다.




남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될수록 내가 얼마나 남을 사랑하지 않는지, 본인 위주로 살고 있는지 보게 된다. 넌덜머리가 난다. 스스로를 위해 사는 삶에는 기쁨도, 희망도 없다는 것을 앎에도 내 삶은 여전히 날 위한 삶이다. 그렇기에 나는 더 사랑해야 한다. 내 조그만 마음 대신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람의 발걸음을 따라 자국이 남듯 매일 사랑의 흔적을 남길 거다. 작년에는 참 아쉬운 게 많으니 2016년에는 더더욱. 내 안의 모순은 걸어야 할 길을 걷지 않을 변명거리가 아니다. 오히려 그 길을 순종함으로 걸어야 할 이유이지.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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