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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io 시오 Nov 30. 2015

내 머리를 누일 곳

언젠가부터 '집'하면 떠오르는 곳이 없다. 지금 부모님이 사시는 곳은 작년에 이사한 집이고, 내가 그 집에서 잠을 잔 날만 세어보면 채 한 달이 안될 거다. 내가 살고 있는 미국 집은 이제 겨우 11개월을 살았다. 다음달이면 계약이 끝남과 동시에 졸업을 해서 또 어디론가 가버릴 거다. 1년 혹은 6개월 단위로 떠돌아다니는 생활은 어느새 8년 차가 되었지만 딱히 싫다거나 한 적은 없다. 그저 달팽이처럼 등에 작은 집 하나 멘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2007년 10월에 아부지는 나를 서울로 보냈다. 내 인생 처음으로 대구를 벗어나서 살게 된 거다. 당황스러움과 설렘으로 시작된 객지 생활 동안 나는 익숙지 않은 지하철을 타고, 서울말 쓰는 사람들과 어울리며 지냈다. 누가 봐도 십대인 내가 사복을 입고 대낮에 활보하는걸 이상하게 쳐다보는 어른들의 시선도 신선했다. 나름의 방법으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별로 곱씹지 못했던 것은 앞으로 부모님과 같이 사는 일이 길게는 없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엄마는 나를 일찍 내보낸 것을 아쉬워하는 듯한 말을 한 적이 있다. 생각해보니 그때 내가 많이 어렸다.


내 방, 대구, 2008.


창천동 한 빌라에서 여덟 명의 언니들과 시작했던 첫 자취를 시작으로 여기저기 보금자리를 틀었다. 포항에서 지내게 된 학교 기숙사에서는 동기들보다 두 살이 어려 귀여움을 받고,  그다음 해에는 선배라는 이유로 편히 지냈다. 미국에 가기 전 까지는 서울에 갈 때마다 외삼촌과 작은 이모가 나를 번갈아 맡아주었다. 외숙모는 출근하느라 바쁘셨음에도 아침마다 바나나우유를 챙겨주셨다. 저녁에 외삼촌과 숙모, 내가 거실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으면 두 분이서 번갈아가며 영어 선생님 전화를 받았다. 젊은 직장인 부부는 이렇구나 싶었다. 작은 이모는 홍대에 살았는데 평일 저녁에 밖에서 만나 맛있는 걸  사 먹기도 하고 길거리 쇼핑을 다니기도 했다. 토요일 아점은 꼭 나가서 사 먹는 이모의 모습은 우리 엄마랑 다른 싱글의 냄새가 풍겼다. 친구 같은 이모가 고마웠다.



미국에 와서 1학년들이 지내는 기숙사를 거쳐 아파트를 구해 살기까지는 3년이 흘렀다. 그동안 나는 먹고 싶은 건 해 먹고 공과금은 꼬박꼬박 내는 훌륭한 자취인이 되었다. 남에게 얹혀사는 것 아닌 생활의 첫 시작이었다. 룸메이트의 눈치를 가끔 봐야 하는 것 말고는 완전한 자유가 보장되는 내 집! 완벽하게 혼자 사는 것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후에 휴학해서 서울로 돌아가 일을 하면서는 (나름) 금전적으로도 자유로워졌다. 내 이름으로 의료보험증이 나온 걸 나도, 부모님도 신기해했다.  





지나 보니 참 좋은 기억들이다. 지금까지의 생활이 너무 만족스럽다. 그러나 앞서 말한 어느 곳도 내 몸과 마음이 푹 쉬어지는 진짜 '집'은 아니었다. 누워서 잠을 자고, 추위와 더위를 피할 수 있는 거처였지. 가끔 몸 만한 캐리어 두 개에 나의 모든 짐을 담아 실어 보내고 버스에 타면 아무 데도 뿌리내리지 않은 나무 같다는 생각이 든다. 8년 전 서울행이 너무 급작스럽고 무리였던 결정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간혹 스친다. 문제가 있는 건 아닌데, 가끔 어디선가 문제 삼는 마음이 생기는 거다. 그런데 오늘 선데이스쿨에서 치유하시는 하나님이란 주제 안에서 몇몇 사람이 '나를 가족으로부터 떨어뜨려 놓으셨던 하나님'을 간증했다. 아 나는 또 까먹고 있었다. 방관자가 아닌 직접 내 삶에 관여하시는 하나님을. 그것은  어제오늘 막 시작된 게 아니라 처음부터 계속되어 왔던 일이고, 2007년도 그 간섭의 일부였음을.  



부모님이 내 생활 반경에서 사라지면서부터는 내 삶에 간섭할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 빼곤 없었다. 이  때부터 부모님과의 갈등이라는 커다란(?) 바위에 가려져서 잠잠했던 나와 하나님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건 마치 수영장에서 혼자 헤엄치겠다며 떼쓰는 나를 하나님이 바다에 던졌는데 거기서도 혼자 헤엄치겠다고 떼쓰는 꼴이었다 (참고로 나는 수영을 못한다). 나는 마음대로 행동했고 하나님은 그런 나를 지켜만 보시지 않았다. 나를 적극적으로 휘저으시는 동안 많은 사람들과 사건사고, 또 수 년의 시간이 동원되었다. 그렇게 하나님은 침착하고 현명하게 내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법을 가르쳐주셨다. 나는 스스로와 부모님을 포함한 타인이 준 상처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법을 배우고, 각자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다시 집을 생각해 본다. 내가 객지에서 살면서도 한 번도 외롭지 않았던 것은 내가 하나님 아버지의 인도하심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를 부모님의 집에서 이끌어 내신 분이 나의 집이다. 그 집은 나와 매 순간을 함께 하신다. 기쁨은 그로부터 나오며, 나의 가장 못나고 어두운 순간에도 내 집이기를 거부하셨던 적 없다. 내가 어디로 가든지 당신이 나의 집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내가 거하는 곳은 당신이라는 빛 안이다. 당신 무릎을 베고 누울 때 나는 비로소 평안을 누린다. 어디일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는 내 미래의 거처를 걱정하지 않기로 한다. 어디가 되었든 간에 당신이 나의 집이다.  


신명기 8:2-10절을 떠올린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  




내 방, 엠포리아,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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