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hio 시오 Jan 06. 2019

어른이 아이에게 줄 수 있는 선물

며칠 전 회사 동료와 칼국수를 먹다가 눈물에 대해 이야기했다. 눈물을 흘리는 이유가 뭘까. 슬프거나 기쁠 때마다 눈물이 나는 건 아니던데. 우리는 홍합 껍데기를 골라내며 이런저런 기억을 꺼내어 보았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 울어주었던 기억, 내가 누구 때문에 울어본 기억... 그 순간들을 되짚다가 동시에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던 건 '너무 아름다울 때 눈물이 난다'는 거였다.   


그러고 보면 어김없이 나를 울리는 순간들이 있다. 최근에는 영화 <룸>을 보다가 그랬다. 한 남자에게 납치를 당해 아들 잭을 낳게 된 조이는 아이가 다섯 살이 되던 해 <룸 room>을 탈출하게 된다. 조이는 밖으로 나오기만을 바랐지만 수년만에 마주한 세상은 너무 달라져 있었다. 부모님은 이혼했고, 엄마는 가족의 친한 친구였던 레오와 새 가정을 꾸렸다. 조이가 온몸으로 혼란스러움과 부딪히는 동안 잭은 태어나 처음으로 세상과 만나게 된다. 사람은 물론이고 낙엽, 바람, 건물 그 모든 것이 처음이고, 낯설었다.


 그런 잭이 걸음을 내딛을 수 있도록 옆을 지켜준 사람은 친할아버지가 아닌 할머니의 새 동반자, 레오였다. 그는 남자를 특히 경계하는 아이와 대화를 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대신 잭이 있는 듯 없는 듯 행동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배가 고픈데 뭔가 맛있는 걸 좀 먹어야겠어!' 하곤 그를 지켜보던 잭이 있는 줄 몰랐다는 듯 인사한다. 그리고는 함께 앉아 시리얼을 먹는다. 맛있지? 나도 이 맛을 좋아해.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시리얼에 집중할 때 레오는 슬며시 웃는다.         

'아저씨는 개가 있어요?' 잭이 물었다. 레오는 그렇다고, 너도 곧 만나게 될 거라고 말해준다. 잭은 시리얼을 우물거리며 자신이 '룸'에서 키웠던 강아지 인형에 대해 이야기한다. 레오는 아이를 불쌍하게 쳐다보거나, 그 좁디좁은 방에서의 생활을 듣고 얼굴을 찡그리지 않는다. 그래? 그렇구나. 마치 아이가 오늘 아침 일어나서 한 일을 얘기했다는 듯 덤덤하게 끄덕이며 시리얼을 우물거린다.    


영화 <로마>에서는 이런 장면이 있었다. 주인공인 가정부 클레오는 빨래를 널고 있고, 주인집 아이들은 주위에서 총싸움을 한다. 막내 페페의 총을 맞은 형이 내 게임이니 네가 죽어야 하는 거라고 화를 내며 자리를 떠나자 페페는 평상에 눈을 감고 눕는다. 클레오가 말을 걸자 아이는 죽어서 말을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자 클레오는 아이의 반대 편에서 머리를 맞대고 눕는다. 머리가 닿는 것을 느낀 아이가 뭐 하는 거냐고 묻자 클레오는 대답한다. 나도 죽어서 말 못 해. 둘은 그렇게 누워서 잠깐의 시간을 공유한다. 페페, 죽어있는 것도 괜찮다.


아이는 어른의 시선으로 자란다. 아이를 그저 말을 잘 들어야 하는 약하고 단순한 존재로만 본다면 그는 빛을 잃는다. 어른의 눈동자에 내 모습이 온전히 담김을 느낄 때 아이는 자신이 사랑받고 있음을 안다. 나를 알아봐 주는 어른의 눈빛. 몸이 닿지 않아도 그 사이로 전해지는 기운, 그와 주고받는 대화 몇 마디로 아이는 스스로가 온전히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네가 하는 일이 하찮지 않다고 말해주는 것. 네가 가진 모습의 아름다움을 함께 바라보는 것. 아이는 거기에 온 삶으로 화답한다.  


초등학생 때 나는 즐겁지 않은 아이였다. 마음이 우울하고 자신감이 없어 뭘 해도 그렇게 신나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하굣길에는 땅에 머리를 박고 보도블록을 쳐다보며 길을 걷고, 일 년에 한 번은 꼭 머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학교를 가지 않았다. 6학년 때 만난 담임선생님은 그런 나를 가만히 놔두는 법이 없었다. 발표를 시키고, 쉬는 시간에는 좋아하는 영화와 책 이야기를 함께 하고, 수업시간에 토론을 할 때면 나를 끼워 넣곤 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기억해 두었다가 어디서든 그걸 발견할 때면 내게 알려 주셨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반 아이들이 가진 색깔과 모양을 들여다 보고 함께 기뻐하는 분이었다. 내 머리 위 하늘은 온통 흐리기만 했는데, 그때부터 내 마음에 빛이 생겼다. 지금까지 우리는 그 시간을 추억하고, 이제는 뵐 수 없는 선생님을 마음에 그린다.  


고개를 숙이고 걷던 나는 이제 언덕 너머를 볼 수 있게 되었고, 그때의 선생님보다 나이가 많아져 버렸다.

꽤 자주 바란다. 그가 했던 것처럼 내 시선도 누군가를 자라게 하기를.

매거진의 이전글 소리 대신 공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