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음의 매력에 눈뜬 초딩
지금이야 축적된 정보 속에서 이런 저런 음악을 다양하게 듣게 되었지만 꼬꼬마 시절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악착같이 노래를 '수집해서' 들었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허허. 가장 많이 듣던 음악들을 크게 두 장르로 나눈다면 일렉트로닉 그리고 소울음악. 그 중에서도 시작은 일렉트로닉이었다.
그 시작은 초등학교 2학년, 내가 9살이었던 그 해 명절이었다. 새해가 가까워지는 시점이었을 거다. 가수들이 텔레비전에 나와서 화려한 의상을 입고 춤추며 노래했고, 나는 친척들과 주전부리를 먹으며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하늘에서 새둥지 같은 걸 타고 이정현이 내려왔다.
황금색 둥지에서 황금색 옷을 입고 내려와서는 강렬한 가사와 춤과 컨셉으로 노래하는 이정현은 나에게는 너무 충격이었다. 집에 와서도 내가 뭘 본거지... 하는 생각에 혼란스러워 했지만 그 노래가 더 듣고 싶었다. 얼마 뒤 우리 가족은 다른 도시로 가던 중 휴게소에 들렀고, 나는 거기서 인생 첫 카세트 테이프를 사게 된다. 나는 이정현, 동생은 량현량하.
이렇게 나는 테크노 키즈가 되...지는 않았다. 이정현을 시작으로 장나라, 박정현, 이수영, 빅마마, 그리고 브라운 아이드 소울(이 앨범은 나에게 또 다른 취향의 물꼬를 터 준다)의 테이프를 차례차례 사 모으면서 슬픈 음악을 듣고 또 들었다. 그렇게 5년이 흘러 흘러 중학생이 된 나는 또 한번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노래와 운명의 만남을 가지게 된다.
익숙한 전자음이지만 이정현처럼 거세지 않았고, 내가 좋아하는 단조 듬뿍 들어간 곡 진행에, 많은 사운드가 촘촘히 들어가 있어서 그림처럼 묘사가 섬세한 음악. 인터넷을 뒤져 알아보니 클래지콰이였다.
생각해보면 내가 노래 들을 때 가사를 못 듣게 된 건 클래지콰이의 영향이 크다. 멜로디를 둘러싼 많은 소리들을 하나 하나 뜯어 듣다 보면 가사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진다. 클래지콰이 1집은 클래식, 재즈, 팝, 보사노바 등 많은 장르를 일렉트로닉 안에 완성도 있게 담아 국내 음악계에 큰 의미가 있는 앨범이기도 하다. 더불어 나에게는 다양한 장르를 접하도록 격려해준 요정 할머니 같은 존재. 아직도 생각난다. 와 어떻게 이렇게 만들었지 하면서 덩실덩실 어깨를 들썩이던 중학교 1학년의 나.
허밍어반 스테레오 <Baby Love> 2007, 캐스커 <Skylab> 2005, 롤러코스터 <Absolute> 2002
클래지콰이로 시작된 국내 일렉트로닉 음악에 대한 관심은 허밍어반 스테레오와 캐스커로 이어진다. 세 그룹 모두 크게는 일렉트로닉으로 분류되지만 겹치지 않는 각자의 색깔이 있었다. 나는 여기에서 노선을 살짜쿵 벗어나 전설의 밴드 롤러코스터로, 롤러코스터의 보컬 조원선을 타고 윤상으로 향하게 된다. 윤상이 2008년 내 놓은 <Song book>에 수록된 '넌 쉽게 말했지만' 이라는 곡은 조원선의 목소리로 녹음되었다. 이 곡을 듣고 나는 두 가지 느낌을 받았다. 조원선의 목소리는 정말로 처연하고, 윤상은 정말로 전자음을 사랑하는구나. 나중에 알았지만 윤상은 전자음악을 공부하기 위해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다.
해외에는 더 많은 뮤지션들이 있었다. 클래지콰이는 일본의 시부야케이와 공통점이 많아 FPM, M-Flo, 몬도 그로소, 프리템포, 토와테이와 같은 뮤지션들의 음악을 좋아하게 되었다. 많은 시도 후에 정통 일렉트로닉 보다는 펑키나 재즈를 기반으로 한 전자음악을 좋아한다는 것도 알았고. 검정고시를 치고 난 후에는 비슷한 취향의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면서 다양한 국적의 음악들을 들었다.
유럽쪽 팝/락에 관심이 많던 한 오라버니는 너무나 유명한 다프트 펑크를 나에게 선물처럼 소개해 줬다. 유럽 아저씨들의 전자음악이라니. 뭐 그들의 매력이라고 하면 말할 것도 없다. 색깔이 분명한 그들의 음악은 로봇 헬멧에서 보여지는 이미지와도 일맥상통한다. 한때 그들이 더 이상 좋은 음악을 내지 못하는 건 아닐까 걱정한 적이 있다. 그냥 느낌이 그래서. 2013년에 낸 앨범의 타이틀인 Get Lucky를 들고서는 내가 괜한 걱정을 했다고 말할 수 있었다. 다프트펑크의 행보와는 무관하게 나의 일렉트로닉 사랑은 2010년 끝을 맺는다. 안 좋아해서가 아니라 더 좋아하는 것이 생기는 시점이었다.
<참고>
* 클래지콰이에 대한 리뷰를 찾아보면 그 당시 충격받은 건 나 뿐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이 그룹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서 링크.
* 롤러코스터가 어떻게 인디음악의 장을 열었는지 궁금하다면 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