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끝날 때 즈음 편지를 썼던 이에게 또 몇 마디 적어 보내고 싶어 엽서 한 장 샀다. 이름을 크게 부르고 서너 줄 써 내려가는데 이상하게도 너무 술술 적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멈췄다. 내가 이 말을 전에 했었나? 다섯 달 전 그에게 어떤 말들을 보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떤 마음을 나누고 싶었을까. 그래서 어떤 말로 빈 줄을 채웠을까. 종이 두 장에 적힌 내 마음이 너무 날것은 아니었는지, 혹시 너무 감추려 애를 써서 초라해 보이진 않았을까 덜컥 불안했다.
문득 손을 사각거려 종이 위에 마음을 소복하게 적는 일, 흐릿했던 생각을 또렷하게 그려내는 이 행위가 무모하게 느껴졌다. 시간이 지나면 흐려질 내 마음을 생생하게 기록하는 것도 모자라 상대의 손에 쥐어주며 내게서 떠나보내는 일이지 않은가. 수개월, 혹은 수십 년 당신의 공간에 머무를지도 모르는데. 몇 달 전의 나는 편지쓰기에 대해 이렇게까진 생각해보지 않았다.
3년 전 대학교를 졸업하고 부모님과 미국 서부로 패키지여행을 떠났다. 일행 중에는 내 또래의 남자가 한 명 있었는데, 라스베이거스에서 시티투어를 하는 동안 대화 몇 마디를 나눌 기회가 생겼다. 그는 자유시간에 함께 야경을 보러 가지 않겠냐고 물었고 거절할 이유가 없던 나는 그러자고 했다. 여행이 마무리될 때 즈음 그는 나에게 쪽지 하나를 건넸다. 날 보고 첫눈에 좋아하게 되었다, 함께 야경을 본 시간이 좋았고 한국에서도 만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여행지에서 이런 쪽지를 받은 사실이 흥미롭긴 했지만 딱히 만날 생각은 없어 거절했다.
그러고 서너 달 뒤였나, 그가 인스타그램에 올린 황당한 포스팅을 보게 된다. ‘사랑하는 자기와의 1000일. 항상 고마워!’ 그 여자 친구에게 내가 받은 쪽지를 보내주려다가 뒷일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그만뒀다. 내가 이 일을 지금도 기억하는 이유는 그가 보냈던 쪽지 때문이다. 그 구질구질한 고백이 적힌 종이 쪼가리가 내 편지함에 틀어박혀 있어서 볼 때마다 어이가 없거든!
15년이 훌쩍 넘은 내 편지함에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담겨있다. 상자 앞에 앉아 편지들을 꺼내볼때마다 당당한 그 용기들에 눈이 부시다. 어쩜 이렇게 부끄러움 하나 없이 또박또박 말하지? 새삼 내가 작게 느껴지고 그들이 멋져 보인다. 숨기지 않아 반짝거리는 고백들이 가득하다. 종이 한 장 한 장에 마음이 여백 없이 담겨있다. 어렴풋이 짐작했던 당신의 생각이 고개를 빤히 들어 나를 쳐다본다. 내가 외면할래야 외면할 수 없도록. 잘 몰랐다 둘러댈 수 없도록.
그래서 편지는 잊히지 않겠다는 용기가 담긴 고백이다. 써 내려간 나는 잊어도 편지를 간직하는 이는 기억할 수 있는 특권을 건네는 거다. 순간의 생각이었든 오래 묵은 감정이었든 구분하지 않고 고스란히 전달한다. 내 손으로 내 의지로 말이다. 관계의 중력이 감정의 역사를 기억하는 사람에게 있다면, 그 힘을 기꺼이 내어주기 위해 시간을 들여 마음을 꾸역꾸역 채워 넣는다. 봉투에 담아 스티커까지 예쁘게 붙여서 손에 덥썩 쥐어준다. 이렇게 위험한 이 일을 우리는 감히 하고 있다. 내 마음 한 조각 떼어다 싣는다. 당신의 마음에 싹 틔우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