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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민 Mar 21. 2016

영화<룸> '룸'보다 더욱 숨막히는 자유

사랑으로 다시 채울 수 있을까?


 영화 룸은 단순히 감금 되었던 룸에서의 탈출기를 그려낸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룸을 탈출한 두 모자의 변화 된 삶과 그들이 새롭게 마주한 고통에 시선을 집중한 영화이다. 특히 조이의 아들 잭의 시선으로 바라본 룸 속 세상과 바깥 세상의 극명한 차이, 이를 통해 아이가 겪는 정서적 변화의 과정에 집중하여 영화의 흡입력을 높였다.    
  영화 시작부터 1시간 가량은 오로지 가로세로 3.5m 크기의 방에서 조이와 잭이 살아간 5년의 세월을 보여준다. 작은 방 바깥세상을 알지 못하는 잭에게 룸은 유일한 세계이고 엄마만이 "진짜" 생명체이다. TV 속 인간과 생명체는 모두 그림에 불과한 가짜라고 믿는 잭. 엄마는 잭에게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거짓으로 그를 납득시켜왔다. 하지만 5살이 된 잭에게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해줘야 한다는 강력한 의지가 조이와 잭을 룸에서 탈출 시켰다.   
  영화는 룸에서의 생활은 물론이고 탈출의 과정까지 숨 막힐 듯한 긴장감을 조성하였다. 잔잔해 보이지만 흡입력 있는 이야기 구성은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영화의 몰입도를 높였다. 무엇보다도 영화 룸이 빛났던 이유는 감독이 탈출 이후 조이와 잭이 겪는 변화와 갈등에 이야기의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영화가 진짜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는 룸 밖의 세상을 마주한 조이 모자의 모습이었다.
 룸 안이 세계의 전부였던 잭에게 룸 밖의 세상은 그저 놀라움의 연속이다. 태어나서 계단을 본적이 없는 잭에게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상조차 낯선 '처음'의 일이다. 그런 잭에게 소통과 사회성을 부르짖는 조이의 모습은 룸 안에서의 강건한 어머니의 모습이 더 이상 아니다.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자신을 비관하며 트라우마에 몸부림치는 피해자로 전락하고 만다. 조이는 이제 24세가 되었지만 룸 밖에서 오히려 17세 속 세상에 스스로를 가두며 분노를 폭발시킨다. 룸 안의 통제된 생활이 자신을 더욱 올곧게 만들었다면 풍족이 주는 안락함은 되레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이러한 혼란을 가중시킨 것은 역시 가십만을 쫒는 미디어와 대중들이었다. 잭의 존재 자체가 삶의 이유였던 조이에게 잭을 세상 밖으로 보내지 않았다며 책임을 운운하는 미디어는 그녀를 사지로 내몰았다. 피해자의 정신적 상처보다는 룸 속에서 일어난 "일"에만 관심을 갖는 언론의 행태는 조이의 삶의 의미조차 송두리째 앗아가버렸다. 이 지점에서 관객들은 '조이모자가 차라리 룸 안에서의 생활이 더 편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만큼 감독은 탈출 후 겪는 조이의 고통을 극대화시켜 사건의 심각성을 더욱 부각시킨다. 또 그런 엄마를 바라보는 잭을 통해 치유와 회복의 과정이 얼마나 많은 사랑과 관심을 요구하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잭의 '긴머리', '친구', '그래도 엄마'라는 세가지 키워드는 조이를 다시금 살아날 수 있게 만든다. 죽어가는 조이를 살린 것은 아들 잭, 그녀에게 삶의 의미를 되찾아 준 것도 역시 아들 잭이다. 17세의 나이에 납치된 어린 ‘조이’와 엄마가 된 ‘조이’ 사이에서 방황하는 그녀를 잭은 사랑으로 보듬는다. 작은 룸에서의 결핍이 가져다 준 서로를 향한 뗄 수 없는 사랑, 룸 밖의 풍요가 주는 작은 행복 찾기는 관객들에게 가장 단순한 결론이자 결말을 말해준다. 모자가 살아갈 진실한 삶의 공간. 어쩌면 룸보다 더욱 숨막힐 공간이지만 서로가 있기에 그 숨막힘조차 사랑으로 채워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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