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프롤로그
사는 것이,
밥을 짓는 일처럼 해야 하는 일, 그리 특별할 것 없는 일, 누구나 하는 일, 죽을 때까지 벗어날 수 없는 일.. 그런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일찍이 그런 생각을 떠올린 것은 아니고 나이가 들고 그래도 좀 살았다 싶을 때 든 생각이다. 그렇다고 꽤 곰곰이 생각하다 그런 결론에 이른 것 또한 아니고. 그냥. 어느 날. 갑자기.
기쁨에 겨워 특별히 잊을 수 없는 일이면 넘칠수록 좋고 슬픔에 젖어 특별히 지울 수 없는 일이면 피하고 싶은 게 삶에게 바라는 욕심이다. 하지만 그 비중을 사람이 능동적으로 분배할 수는 없다. 심지어 어떤 형식을 입었든 특별한 일이라면 기억에는 남을 텐데 슬픔의 형식을 입은 기억이 더욱 또렷하게 남아있기도 하다.
살다 보니,
차라리 행불행에 관계없이 뇌리에 짙게 밴 잊히지 않는 기억의 냄새를 그만 증발시켜버리고 싶은 시기가 오더라. 그냥 이일 저일 없이. 높낮이 없이. 그러니까 별일 없이 평안하게 살아갈 수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더라.
특징 없는 시간의 반복이지만, 쨍한 흰 빛깔 고운 밥 한 숟갈 위에 감각을 깨우는 태와 색과 맛을 얹어 입안 가득히 채워 넣어 예민한 혀끝과 건재한 치아 사이사이로 사는 맛 넘실거리는 밥 한 공기 뚝딱하는 평범한 시간과 닮은, 수없이 평범한 일상들. 그것들이 해를 입지 않고 그 시간들이 방해받지 않고 매일매일 같은 속도와 모양으로 흐르고 빚어져 안도의 정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그걸로 족해지는 때가 왔다고 할까. 그게 뭐라고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 솟구치는 순간이 반드시 찾아들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 주저하지 말고 마중 나가자. 환대하자. 받아들이자. 그러면 충분하지 않을까.
이제야, 일상이라는 단어는 얼마나 소중한지.
저 멀고 깊숙한 곳에 웅크리고 있는 오래된 기억처럼 대부분의 시간 잊혔다가, 아슬아슬하지만 아무 잘못 없이 그럭저럭 잘 살고 있는데 느닷없이 삶에게 명치 한 대 맞고 정신이 번뜩 들 때가 있나. 기어코 그런 충격을 받을 때, 너무도 당연하다고 여겨졌던 것들이 오만한 확신 때문에 도둑 맞거나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그제야 알게 되나. 그런데도 돌아서면 또 잊어버리고 이전과 별반 다르지 않은 한심한 시간을 보내고. 또 어느 날 문득 아차, 싶으면서 제정신을 차리게 되나. 그나마 그것 참 다행이라 여기고 감사하게 되나.
살려고 먹는지, 먹으려고 사는지,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한가 싶었던 날. 밥을 짓다가 별거 없이 이게 사는 거지 싶었던 날. 인생 거창할 것 없고 하루 천 원의 삶이든 천억 원의 삶이든 결국은 밥은 먹어야 한다는, 이미 알았던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날.
새삼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앞으로의 내 삶은 이미 그랬듯이 밥을 짓는 일과 별반 다르지 않고 그걸로 충분하며 그저 감사하면서 살 것이라는 게 선명해졌다. 그런데도 하잘것없는 주제에 변덕스럽고 잡생각 많고 감정 기복도 심한 사람인지라 충분하고도 감사한 일상의 삶에 일희일비하기도 하겠지만. 밥을 짓는 일은, 살아가는 일은, 멈추지 않을 것임은 분명하기에 오늘도, 오늘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