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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치버 Dec 22. 2022

변절자 03

하느님을 변화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기도를 한다.  
- 쇠렌 키르케고르

#신을 만나다

무신론자였던 유명 유튜버가 갑자기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나의 관심을 끌었다. 살면서 신의 존재에 대해 설득력 있는 주장은 처음이었다. 그는 인간에게 신은 꼭 필요한 존재라며,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쳤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성장하고 어른이 될수록 더욱 외롭고 혼자 싸워야 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하지만 신을 믿는다면, 혼자 있어도 혼자가 아니다. 신과의 관계 속에서 대화를 나누고 해답을 갈구하고 성찰하고 기도한다. 전지전능한 신과의 관계 속에서 무한한 가치를 찾을 수 있다. 무한한 보물창고가 생기는 것과 같다. 나의 잠재력을 무한히 키울 수 있다.’

누군가에겐 신의 존재가 무한한 보물창고였다

나는 말문이 막혔다. 죄 없는 사람에게 전쟁이나 질병을 안기는 신은 악마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에겐 고달픈 삶을 버티는데 필요한 존재라고 볼 수 있다. 나는 지금까지 잘못된 질문을 하고 있었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신이 있냐, 없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왜 사람들에게 신이 필요한지 물어봐야 했던 것이 아닐까. 우월감에 취해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말했지만, 오히려 수준 낮은 질문 속에 갇혀 있었다. 돌이켜보면 좁디좁은 시야로 정의 내린 무신론을 무기로 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무자비하게 휘둘렀다. 어설프게 사람들을 판단해온 것이다.

나의 잠재력을 무한히 키울 수 있다면 나에게 역시 신이 필요했다. 삶은 직선이 아닌 수많은 굴곡의 연속이기에, 끝까지 살아내려면 가끔은 기댈 수 있는 존재가 그립기도 했다. 나와 같은 인간에게 기대기엔 한계가 있었다. 신에게 잠시 나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무한하고 절대적인 힘을 가진 존재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위안인가. 죄 없는 사람, 가여운 사람들을 위한다는 마음을 근거로 신을 부정했지만 스스로에겐 가혹했다. 나 스스로 곁에 있는 신을 빼앗고 아무도 두지 않으려 했다. 

나는 신 그 자체가 아닌,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보며 신과 멀어져 갔다. 나에게 전도를 행했던 신도들의 모순된 행동과 억압에 신물이 났다. 국정원에서 지령을 받은 요원처럼 신을 무기 삼아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고, 그들의 명령대로 내가 행동하도록 유도하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들을 모두 제쳐놓고 보니, 신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수십 년 전에도 신과 대화를 나누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나만 아는 이야기

외아들로 태어난 나는 오랫동안 외로움과 싸웠다.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고, 땅바닥에 누워 멍하게 무언가를 바라보거나 혼자 중얼거리며 공상에 빠져 살았다.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간단한 물건만 있으면, 새로운 세계를 탄생시키며 롤플레잉을 했다. 밖에서 들으면 마치 누가 놀러 온 것처럼 들릴 정도로, 작은 방에서 혼자 다양한 역할을 도맡아 여러 명의 나와 대화하곤 했다. 친구들과 함께 놀 때는 나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이 어색하지만, 내 안에 들리는 목소리와는 무엇이든 나눌 수 있었다. 어쩌면 세상에 혼자 남겨진 기분이 또 다른 나를 만들어낸 건지도 모른다. 그 존재는 신이었을지도 모른다. 혼자 놀고 있는 나와 친구가 되어준 신.

어린 시절의 외로움은 내 안에 또 다른 목소리를 만들어냈다

인간의 두려움은 종교를 만들었다. 사나운 짐승과 거친 자연환경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신’이라는 허상을 만들어 북을 치고 노래를 불렀다. 인간을 생매장시키고 동물의 목을 잘라 피를 바쳐가며 자연재해가 멈추고 때론 비를 내려달라고 빌었다. 두려움과 간절함이 새로운 존재를 만들어냈던 것처럼, 어린 시절의 나도 마찬가지였을까. 그렇다면 지금 다시 신을 만나게 된 것은 그때처럼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을지 모른다. 

우린 아기에서 어린이 그리고 어른으로 이름이 바뀐다. 이름표는 바뀌었지만 같은 존재다. 성숙해지고 똑똑해졌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대로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과 인지는 변하지 않았다. 외로움, 두려움, 설렘, 슬픔, 증오의 감정을 그때처럼 똑같이 느낀다. 여전히 보살핌을 받고, 기대고 싶어 한다. 우리가 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이유다. SNS에 아무리 멋지고 강한 나의 모습을 올려도 거울 속의 내 모습과는 다른 것처럼, 마음만은 여전히 여리고 약하다. 

우리는 누군가의 뱃속에서 태어난다. 심장의 두근거림을 ASMR로 들으며 편안하고 안정적인 상태로 10개월 동안 쑥쑥 자란다. 뱃속 여행을 마치면, 불안과 공포가 기다리고 있다. 충분한 영양분을 공급해주던 탯줄이 끊기고, 몸의 모든 신경을 자극시킨다. 춥고, 배고프고, 무섭다. 수많은 자극과 위험에 노출되어, 안전한 뱃속으로 다시 들어가고만 싶다. 절대적인 사랑만이 두려움을 잠시나마 잊게 해 준다. 우리는 여전히 세상이 무섭다. 이제 추위도 배고픔도 스스로 해결할 수 있지만, 죽음을 알아 버렸다. 친구가 죽고, 가족이 죽는다. 나도 결국 죽는다. 죽음을 극복한 인간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신은 죽지 않는다. 죽음을 극복한 대상을 이길 순 없다. 나는 왜 신을 이기고 싶었을까. 사랑이 부족해서일까. 두려움을 숨기고 싶었을까. 실체도 없는 존재와 허공을 휘저으며 오랜 세월 싸웠다. 싸움의 결과는 허무했다.

우린 모두 뱃속에서 태어나 엄청난 공포를 느끼며 세상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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