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 공연이 한참 많을 시기, 공연장에 온 어떤 어린이가 나를 보고 "어, 그림 선생님이다!"라고 외쳤다.
평소에 전시실에 온 학생들을 위해서 전시해설을 하다 보면 학생들과 심지어 선생님들까지 "큐레이터는 전시실에서 설명해주는 분이야"라고 하는 경우가 있는 데다가, 진짜 큰 문제는 일부 문화계 인사들조차도 이따금씩 큐레이터와 심지어 화가와 도슨트 등등에 대해서도 개념 정리가 안되어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뭐, 다들 자기 일 외에는 관심이 없으니까 모를 수도 있는 것이거니와, 그 자리에서 지적하기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사실 설명충이 되기 싫어서 나는 대화 중 사람들이 큐레이터가 뭔지 헷갈릴 때마다 그냥 넘기곤 해왔다.
그래서, 큐레이터, 학예사, 도슨트 등등이 뭔지 헷갈리는 사람들에게, 앞에서는 못했던 설명을 여기에 한 번 써보도록 한다.
큐레이터 Curator(한국어로는 '학예사')
큐레이터는 뭐 하는 사람?
큐레이터는 박물관(미술관 포함)이나 전시기관, 갤러리 등에서 연구를 하고, 소장품 관리를 하고, 전시를 위해 유물(작품)이나 작가를 선택하고, 전시를 기획하고 교육 프로그램을 만드는 다양한 일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사실 큐레이터의 역할을 처음에는 왕이나 귀족의 보물창고에서 단순히 소장품을 관리하고 돌보는(라틴어: curare; 돌보다) 업무를 하는 사람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역할은 점점 확대되어 전시를 위해 유물(작품)을 선택하고 효율적인 전시 디스플레이를 만드는 일부터, 전시를 통해서 하나의 담론을 만들어내고 관람자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내는 일까지 다양한 역할까지 맡게 되었다.
전시를 통해서 담론을 이끌어낸다는 부분 때문에, 큐레이터는 창작자(작가, 화가)와는 다르다.
이따금 화가와 큐레이터를 헷갈리는 사람도 있다. 많은 화가들이 전시 기획에 큐레이터와 함께 참여하고, 설치 작품의 경우에는 작가가 직접 디스플레이를 하고, 전시 교육의 기획에 참여하기도 한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창작자와 큐레이터가 다른 점은, 큐레이터는 창작된 작품에서 시대적, 그리고 역사적 의의를 읽고 그것을 설명하는 내러티브를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모든 큐레이터가 평론가는 아니다.
예술가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방법으로 예술 작품을 창작하고, 평론가는 그것을 해석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큐레이터는 역사적인 맥락 속에서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내러티브를 만들어낸다. 예술가와 평론가는 예술적 감각과 미학적 지식이 주로 필요하겠지만, 큐레이터에게는 역사와 인문학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러한 지식을 토대로 내러티브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야기를 만들어낸다고 해서, 큐레이터는 설명하는 사람(도슨트)은 아니다.
도슨트(docent)는 교육하는 사람이다. 작가도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고, 큐레이터가 전시에 대해 설명을 할 수는 있지만, 도슨트는 그 업무를 좀 더 전문적으로 하는 교육자이다. 박물관(미술관)에서 투어를 하고, 작품을 설명해주고, 일반 관람객에게 어떤 정보를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전문가가 바로 도슨트이다. 그러니까, "큐레이터니까 전시 설명 잘하시겠네요"라고 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학예사
학예사는 큐레이터의 한국어 번역이기도 하지만, 이 용어에 대해서 설명하려면 한국만의 특수한 박물관 체계에 대해서 먼저 설명이 필요하다.
한국은 '박물관미술관의 진흥에 관한 법률'에 따라서(한국은 박물관과 미술관을 이상하게도 따로 분류한다. 여기에 대해서도 할 얘기가 많지만 다음 기회에..) 등록 박물관에 대해서만 박물관, 미술관 명칭을 쓰고 국가의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는데, 이렇게 박물관 등록을 할 수 있는 조건 중 하나가 학예사 자격증 소지자가 근무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 학예사 자격증은 준학예사/정3급학예사/정2급학예사/정1급학예사로 나뉘는데, 이 자격은 시험을 치거나 등록 박물관에서 학예직으로 경력을 쌓는 과정을 통해서 취득할 수 있다. 갤러리에서 근무하는 큐레이터는 사실 학예사 자격증이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지만, 박물관이나 미술관 등 공공성을 지닌 전시공간에서는 학예사 자격증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
그리고 학예사 자격증 취득자는 아니지만, 국공립 박물관에서 일하는 사람을 학예연구사라고 직급을 부여하기도 하는데, 이 말을 줄여서 학예사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다시 말하자면, 큐레이터를 한국어로 번역할 때 학예사라고 하기도 하며, 학예사 자격증 취득자를 학예사라고 부르기도 하며, 국공립 박물관에서 일하는 학예연구사를 학예사라고 하기도 한다는 말이다.
갤러리스트
큐레이터는 한국어로 학예사로 번역되며, 이때 학예사는 대개 박물관(미술관) 등 비상업적인 기관에서 일하는 사람을 일컫게 된다. 갤러리에서 일하는 사람인 갤러리스트도 큐레이터라고 부르기도 하고, 아주 옛날에 일각에서는 갤러리에서 일하는 사람은 큐레이터, 박물관에서 일하는 사람은 학예사, 이렇게 구분하기도 했었다. 그 만큼, 큐레이터-갤러리스트-학예사 등등의 명칭은 혼용되어 사용되어 왔다는 말이다.
갤러리 큐레이터의 업무는 위의 큐레이터의 업무와 겹치는 부분도 있지만 상업적인 업무가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즉, 미술시장을 읽는 능력, 컬렉터와 작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능력, 마케팅과 경영 능력 등이 필요하다.
갤러리스트는 뮤지엄 큐레이터(혹은 공공 전시공간의 큐레이터)와 다른 점이 있다면 작품의 판매에 관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국제박물관협의회(ICOM)의 윤리규약에 따르면, 박물관은 비상업적이고 공공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박물관이 소장품을 판매할 수 있는 유일한 때는 새 소장품을 구입하기 위해 급전이 필요할 때 자금이 필요할 때에 한해서 중복되거나 컬렉션에 의미가 없는 소장품을 판매할 수 있을 뿐이며, 박물관은 항구적인 기관으로써 인류 유산의 보존에 힘써야 할 의무가 있다.
결론적으로 갤러리스트(갤러리의 큐레이터)는 판매를 할 수 있지만, 좁은 의미의 큐레이터(박물관 큐레이터)는 판매에 관여한다는 것이 매우 비윤리적인 일인 것이다. 그니까 저한테는 작품가격 좀 묻지 마세요ㅠ,ㅠ
내가 존경하는 한 큐레이터 선생님은, 평생 화가에게 작품을 선물을 받지도 않았고 심지어 당신이 마음이 드는 작품이라고 그것을 구입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앞에서 설명했던 큐레이터의 역할과 관련이 되어있다. 큐레이터는 역사에 대하 이해를 통해 담론을 만들어내고 작품이 사회와 소통할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이다. 갤러리스트가 미술 시장에서의 한 작품의 위상을 금액을 통해 정한다면, 큐레이터가 만들어내는 담론은 그 미술시장에 영향을 안 미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분도 일절 미술품의 거래에는 관여하지 않은 것이다. 존경합니다. 선생님!
자 그럼, 다시 한번 정리하자.
1. 큐레이터는 박물관, 미술관, 공공 기관, 갤러리에서 소장품 관리, 연구, 전시기획, 교육 프로그램 기획 등등을 하는 사람이다.
2. 화가나 작가는 작품을 창작해내는 예술가이며, 큐레이터는 그것을 해석하고 그것을 통해서 담론과 내러티브를 만드는 사람이다.
3. 학예사는 큐레이터의 한국어 이름이기도 하고, 한국에서는 학예사 자격증 취득자를 뜻하기나, 국공립 박물관의 학예연구사를 일컫는 이름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학예사는 큐레이터이지만, 그 이면은 좀 복잡하다.
4. 갤러리스트는 작품을 판매할 수 있는 사람이다.
5. 도슨트라고 하는, 전문적으로 유물(작품)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일반인의 눈높이에 맞게 가르쳐주는 전문가가 있다. 그런데 이 직업은 큐레이터와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