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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애리 Aug 16. 2022

어느 날, 뒷산에 갔다

나의 뒷산 답사기 : 뒷산 걷기에 대한 인문학적 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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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의 1월 1일의 일이다. 


어쩐 일인지 나는 그 날 새벽 6시에 일어났다. 어떤 사람에게는 새벽 6시가 평소같은 기상시간일 수도 있겠지만, 직장까지 차로 15분 정도 걸리는 곳에 살고 있어서 종종 8시가 넘어서 겨우 일어나는 나에게는 까마득한 새벽이었다. 


새해이니 일찍 일어났다, 라고 이야기하고 싶지만 사실은 그냥 잠을 설친 것이다. 


근 몇 년 동안 나는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여러 가지 일로 마음 고생을 한 뒤 도저히 회복이 되지 않았다. 정신적으로 너무 지쳐 있어서 일상을 영위하는 것 조차 힘들었다. 늘 밤에는 넷플릭스 드라마와 칼로리 높은 음식으로 고통을 마취시켰고 그렇게 영상에 탐닉하다가 잠자리게 들면 잠을 설치고 계속 자다깨다를 반복하곤 했다. 


그 날도 잠을 설쳐 새벽에 깼다. 잠은 다시 오지 않았다. 천장을 쳐다보며 멍하니 누워있는데 문득 며칠 전 알록달록한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이 뒷산으로 가던 것이 떠올랐다. 아파트 놀이터를 지나서 쪽문을 나가면 표지판도 없는 등산로 입구가 있었다. 몇 년 간 그 아파트에 살면서 이따금씩 나는 그 입구가 뭔지 궁금했는데 며칠 전에야 비로소 그 정체를 알게 된 것이다. 




‘등산’이라는 것을 안 한지는 10년도 넘었다. 


마지막으로 등산다운 등산을 한 것은 텐산을 걸은 것 뿐이었다. 10년 전 눈이 허벅지까지 쌓인 높은 산에서 엉덩이 썰매로 하산했던 것이 마지막 기억이다. 때는 겨울이었지만 내가 살고 있던 남부지방에는 눈은 여간해서 볼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갑자기 그 때 텐산을 걸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얼음처럼 차갑고 건조하고, 엄청나게 청량하고 신선하게 느껴졌던 산 속의 공기. 물론 뒷산은 고도 때문에 어질어질한 일도 없을 것이고 눈 속에서 조난당할 일은 전혀 없을 테지만. 


10년도 훨씬 전에, 텐산도 올라가봤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물론 케이블카와 스키리프트를 타고 산 마루까지 올라갔는 사실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뒷산 따위는 그냥 조깅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면 티셔츠와 조깅복 바지를 입고 야구 모자를 쓴 채 물통 하나만 손에 쥐고 며칠 전 봐 두었던 등산로 입구로 향했다. 사실 나는 산 공기만 좀 쐬고 내려와서 근처에 있는 운동장에서 조깅을 할 생각이었다.  




지금도 내가 사용하는 등산 앱에 등산로가 표시가 되지도 않은 그냥 동네 뒷산이었다. 


표지판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나는 사람들이 밟고 갔던 길을 따라서 그냥 아무 생각없이 걸었다. 남부 지방의 겨울 숲에는 아직도 낙엽만 수북히 쌓여있었다. 1월 1일이라 대부분의 등산객들은 아마도 일출을 볼 수 있는 다른 산에 간 것이 분명했다. 그 날 내가 걸으며 만난 것은 부산하게 움직이는 새들 뿐이었다. 


나뭇가지를 헤치면서 낙엽이 쌓인 좁은 길을 한참 걸어가다 보니, 길이 넓은 숲길에 이어진 것이 보였다. 그제야 등산로 방향 표지도 눈에 띄었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인 등산로였다. 원래 조깅을 하러 나왔다는 사실을 까맣게 있고 나는 표지판을 지나쳐 등산로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길은 하나였고 나는 어디를 향해 가는 줄도 몰랐다. 그냥 손에 든 물통에서 물이 다 떨어질 때까지만 걷다가 돌아올 생각이었다. 


추운 겨울 날씨였지만 오르막 내리막을 빠르게 걷다보니 온몸에서 땀이 났다. 윗옷을 벗어 허리에 묶었다. 차가운 공기와 데워진 몸이 만나자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나는 어디인지도 모를 숲 속 한 가운데 서서 물통의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나무 위에서는 이른 아침부터 깨어있던 새들이 푸두득 날아오르며 지저귀고 있었고, 바람에 스치는 나뭇가지 소리, 청아한 아침 공기 속에 울려퍼지는 나의 숨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 않았다. 능선을 걷고 있었지만 빽빽한 나무에 가려져 전망도 보이지 않았던 터라, 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숲에 혼자 남겨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무섭다기보다는 포근하고 편안한 기분이었다. 


그 날 아무 생각 없이 걸어왔던 길은 3km 정도였다. 


이어진 길을 쭉 가면 봄 진달래로 유명한 어떤 산으로 이어진다고 표지판에 나와 있었다. 더 가고 싶었지만 물이 다 떨어져서 더 이상 갈 수가 없었다. 나는 뒤를 돌아 다시 집으로 향했다. 




폐로 들어오는 차가운 아침 공기와 숲의 냄새, 그리고 내가 한 발 한 발 딛고 있는 산길이 모두 완벽했고, 할 수 만 있다면 영원히 걷고 싶었다.


산길을 되돌아가면서, 나는 알 수 없는 기쁨으로 마음이 채워지는 것 같았다. 비밀의 정원을 발견했던 메리 레녹스가 된 기분이었다. 저 앞으로 이어진 산길을 걸어 가보고 싶었고, 저 앞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었다. 


나는 돌아오는 주말에 다시 오리라고 결심했고, 스스로 놀랍게도 나는 그 결심을 지켰다. 주말에 집 안에서 미적거리면서 드라마만 하루 종일 보고 있던 인간을, 동네 뒷산이 밖으로 끄집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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