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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애리 Aug 25. 2022

나만의 '비밀의 화원'으로 되돌아왔다

나의 뒷산 답사기 : 뒷산 걷기에 대한 인문학적 사유

주말마다 뒷산에 가기 시작한 지 몇 개월이 지났다.  


오랜 만에 등산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배낭 안의 물건도 점점 불어나기 시작했다. 멀리까지 걸을 생각에 도시락이 추가되었고 겨울이라 보온병이 추가되었다. 등산을 할 때 면 티셔츠를 입으면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던 나는 등산복 티셔츠를 샀고, 귀마개와 등산용 넥워머, 장갑도 장만했다. 조금씩 조금씩 더 깊은 산 속까지 걸어 들어가기를 반복하던 나는 진달래 꽃이 거의 질 때즈음이 되어서야 진달래로 유명하다는 동네 산에 다다랐다. 


계절은 어느 새 봄이 되었고, 메마른 가지에서는 연두색 잎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날이 풀리자 뒷산에도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계절은 빠르게 바뀌어 봄이 지나 여름이 다가왔다. 나는 겨울 등산복을 서랍에 정리해 넣고 여름용 등산용품을 사기 시작했다. 그렇게 더운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왔고 다시 겨울이 되었다. 나는 1년 내내 뒷산을 다니고, 시간이 되면 동네의 다른 산에도 가 보았다. 그러면서 등산 용품들은 계속 쌓여갔다. 


그렇게 때 아닌 소위 등산용품 플렉스를 하고 나서 보니, 어쩐지 뒷산만 다니기에는 사 모은 등산용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한동안 플렉스한 등산 용품과 동네 친구가 추천해준 등산앱에 힘을 얻어 나는 먼 곳의 유명한 산을 다니기 시작했다. 인스타그램에 인증용으로 다니곤 하는 100대 명산부터 영남 알프스 같은 산을 가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경로를 탐색하고 거기에 맞춰서 장비를 더 사모으고 하다보니 문득 피로감이 들었다. 주말에 새벽에 일어나서 차를 타고 멀리까지 가는 것도 피곤했지만 산에 가는 것이 어쩐지 의무감이 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피로를 느낄 때면 나는 번번이 뒷산으로 돌아왔다. 


뒷산은 마치 나에게 ‘비밀의 화원’ 같은 곳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아동용 도서일지도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삶에 지칠 때, 정확히 말하자면 정신적 치유가 필요할 때 활력소가 되어주는 책이 있다.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의 <비밀의 화원>이다. 그 책은 인도에서 살다가 부모님을 잃고 영국 요크셔 지방의 고모부 댁으로 와서 살게 된 메리 레녹스라는 소녀의 이야기이다. 


책에는 무어라고 부르는 황무지의 자연 경관과 정원에 대한 아름다운 묘사가 나온다. 나는 몸도 마음도 건강하지 못한 메리가, 작가의 표현에 따르자면 ‘무어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건강해지는 부분을 특히 좋아한다. 


메리는 나르시스트임이 분명한 부모 밑에서 방치되다시피 자라서 몸도 마음도 건강하지 못한 아이다. 게다가 콜레라 유행으로 인해서 모든 사람이 죽거나 도망쳐서, 아무도 없는 집 안에 혼자 방치된 채로 발견되기까지 했으니 요즘 같으면 1년 쯤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할 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건강하지 못했던 메리가 정원을 뛰어다니면서 조금씩 건강을 회복해가는 모습을 읽고 있으면 정말이지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비밀의 화원>에는 메리 말고도 정원을 통해 치유를 얻는 인물들이 또 있다. 메리의 사촌인 콜린과 콜린의 아버지인 크레이븐 경이다. 


콜린은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병약하던 데다가 건강염려증까지 있던 아이었다. 하지만 그는 메리가 발견한 비밀의 화원에서 뛰어다니면서 조금씩 어린아이다운 활기를 되찾아간다. 크레이븐 경은 아내의 죽음 이후 아내가 사랑했던 정원을 걸어 잠그고 아들을 외면한 채 괴로워하면서 저택을 떠나 여행을 다니고 있었다.  멀리 유럽까지 가서 자연 속을 홀로 쏘다니면서 아내를 잃은 슬픔을 치유하려고 했지만 정작 그를 치유한 것은 정원에 대한 기억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원으로 돌아오라는 아내의 목소리를 꿈에서 듣게 된 시점이다. 


나에게 뒷산은 바로 그런 <비밀의 화원> 같은 곳이다. 물론 혼자만 아는 비밀의 장소는 아니지만, 아무도 없는 잡목림 속을 걸어갈 때면 그동안 쌓여왔던 상처들이 겹겹이 벗겨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메마른 풀과 앙상한 갈색 나뭇가지, 낙엽이 쌓인 산길은 봄이 되면서 점점 모습이 변해갔다. 누렇게 마른 풀은 무성한 녹색 수풀이 되었고, 칙칙한 갈색 나뭇가지는 초록으로 뒤덮혔다. 


봄비라도 한 번 쓸고 지나가면 초록색 잡초들이 등산로로 계속 침범해오기 시작하고, 이름모를 들꽃들이 어질어질할 정도로 아름다운 빛깔을 내며 피어난다. 해질녘 수풀에서는 산새 소리가 들려와서 <비밀의 화원> ‘로빈’이 그랬듯 나를 숨겨진 정원으로 인도할 것만 같다. 


길을 잘 잃어버리는 나는 새로운 산에 가게 되면 늘 길을 찾느라고 경치를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 고작해야 산 정상의 뷰를 만끽하고 사진을 찍는 것이 다였다. 마음에 드는 나무, 아름다운 꽃이 나올 때마다 오랫동안 앉아서 감탄하거나, 여러 번 되돌아와서 만끽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뒷산은 다르다. 


뒷산은 나에게 확장된 의미의 정원과도 같은 공간이다. 정상을 가지 않아도 괜찮고, 많이 걷지 못해도 괜찮다. 뒷산에서 나는 꼭 등산을 하러 온 사람일 필요도 없다. 산책객이 될 수도 있고, 그냥 유유자적 맑은 공기를 쐬러온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등산에 대한 부담감 없이 뒷산은 그저 쉬엄쉬엄 걸을 수 없는 곳이다. 


나는 등산을 다시 시작하면서 마음 속으로 거창한 계획을 세웠다. 몇 년 안에는 암벽등반도 배우고, 설산 등반을 배워서 다음에는 좀 더 높은 산을, 더 먼 거리의 산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러면서 거기에 필요한 장비를 찾아보며 즐거워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하다보면 언젠가는 PCT(Pacific Crest Trail)라도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샤워 안하고 자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나니까 왠만하면 불가능하겠지만 말이다)  


언젠가는 나도 높은 산을 오르고, 먼 거리를 걷는 하이커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나에게는 뒷산이 있고, 나는 그곳에서 나만의 ‘비밀의 화원’을 만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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