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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효진 May 05. 2019

첫 외화 획득

2018.2.8 ~ 2018.2.12

마지막 도쿄행 이후로 두달이 흘렀다. 저번 여행이었나... 만났던 새로운 캐릭터 중 한 명이 상당한 한국빠였다. 지금까지 사귀었던 남자가 전부 한국사람이고 일본인이랑은 죽어도 사귈 맘이 없다고 할 정도. 한국어 수준도 꽤 높아서, 오래 말하지 않으면 모를 만큼 발음도 좋은 아이였다. 우에토미라는 이자카야에서 일하는 유키노라는 친구였는데 몇 달에 한 번씩 한국음식 이벤트를 하고 있다고 했다. 이번 여행은 그 이벤트에 초대받았다는 핑계로 시작됐다.


가기 전에 또 서운할 일이 있었다. 요 며칠 지난 여행기들을 정리하면서 느낀 것인데 아직 나는 사람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도 그렇고, 일본인들은 확실히 관계 맺기에 서툴다. 이렇게까지 이런저런 장벽에도 불구하고 빨리 마음을 열고 친해지는 관계가 처음이라 좋으면서도 무겁게 느껴지는 듯했다. 그러다보니 나에게는 대절친 수준으로 기대 주기를 바라면서도 정작 자신은 열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인간에게 흥미를 가지고 접근할 수 있는 것도 천성이고 능력이라 생각하기에 그런 것들을 요구하지는 않지만 대신에 마음의 균형은 맞춰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과도하게 열려 있는 쪽은 불안해지기 마련이기 때문에.


그 서운했던 일이란 건, 치쨩의 이혼 소식이었다. 남편과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고, SNS로 연결돼 있기에 어느 정도 소식을 감지할 수 있어서 이혼을 추측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그런 빅 이벤트를 치르고 연락이 없었다는 것이 견디기 힘들었다. 심지어 이번에 내가 오면 보고할 것들이 있다고 하는 말들을 들으니 나는 도쿄에 있을 때만 그 애의 친구인 건가 싶기도 했다.


아무튼 나는 이 시점에 이미 회사를 관둘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퇴사 시점에 초과된 연차값이 까이지 않는 선에서 휴가를 냈다. 주말 끼고 4박5일... 남들은 이 정도 기간에 이거저거 다 하고 돌아오는게 보통이거늘 술 마시는 것 말고 아무 것도 안 하는 주제에 모자라게 느껴졌다.


이번에도 도심공항을 이용하려 했으나 웬걸 김포공항은 이제 도심공항을 이용할 수 없단다... 그래서 짐만이라도 미리 부칠 수 있을까 했지만 불가능이었다. 그래서 김포공항에 리무진 첫차를 타고 가서 짐 보관소에 캐리어를 맡기고 출근을 했다. 보통 열정이 아니었다. 안에 냉장보관해야 하는 식재료도 있었기에 불안했지만 일과를 마치고 김포공항으로 향했다.


김 가게 딸이 아니냐고 할 정도로 매번 김을 한 박스씩 사 가서 나눠줬다.


와인을 곁들인 순조로운 야간비행 끝에 초고속으로 신주쿠터미널행 리무진에 올랐다. 창가에 보이는 도쿄타워가 낭만적이었다. 노라존스의 'Sleepless Nights'가 귓전에 자동재생됐다.



aux에 가서 내일 모레 이벤트를 같이 하기로 한 유우키에게 식재료들을 맡기고, 감독과 잠깐 만나서 이야기 한 다음 타나에 얼굴을 비추고 네이바에서 명물 소면참프루를 먹었다. 친구들이 전부 나와준다거나 그렇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도 앞으로는 그만큼의 마음만을 주기로 했다. 쿳상과 치카라상이 생일이었어서 준비한 술을 주고 샴페인을 얻어 먹었다. 그리고 치쨩에게 내가 생각했던 것들을 말했다. 원래 남의 말을 잘 안 듣기로 유명한 애여서 이걸로 끝이 나더라도 사실 아쉬울 건 없었다. 물론 예상대로 한국에 있는 내게 방해될까봐 말을 하지 않았다는 답이 돌아왔지만 나는 이걸로 치쨩과의 관계에서 낮은 벽이라도 만들어 두기로 했다. 그런데 이후의 일들을 보면 오히려 이 아이는 벽을 허물지 않았나 싶다.


치카라상은 모든 걸 귀찮아 하는 것 같으면서도 요리를 만들면 꼭 맛이 있다.


샴페인을 마시고 늘 마지막 코스로 정해져 있는 나나메로 갔다. 지금에야 깨닫고 조심하는 부분이지만 나나메는 원래 5시까지다. 근데 내가 가기만 하면 여섯시를 기본으로 넘겼으니... 봐줘서 고마워 텟쨩...



옷도 안 갈아입고 침대에 쓰러져서는 해가 중천에 떠서야 일어났다. 어제 사 두었던 일본 한정 피치 코카콜라를 마셨다. 괜히 샀다 싶었다. 호기심이 많으면 그 인생 괴로워~



다음날이 이벤트였기에 회의 비슷한 거라도 할 겸 우에토미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참고로 나는 음식점에서 일 해 본 적이 없는 것을 넘어 밥을 지어본 적도 없는 인간이다. 음식 같은 걸 돈 받고 내놓을 수준이 될 리 없었다. 그래서 주문이나 받고 음악이나 틀겠거니 했건만...


이 동네에서 합리적 가격의 런치로 유명하다.


그리고 도쿄행 초창기에 알게 됐던 요코상이 일하는 시란토로가 폐점을 앞두고 있다 해서 치쨩과 얼굴을 비추러 갔다. 지금은 나도 절절히 공감하고 있는 부분이지만, 갑자기 다니고 있던 회사가 없어진다고 하면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상당할 것 같았다. 요코상도 나이가 적지 않았기 때문에 더 힘들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이 이후로는 요코상을 동네에서 전처럼 많이 볼 수 없게 됐다.


내가 이런 건강식스러운 안주를 사실 돈 주고 안 먹는데


이날은 잔지바루에서 꽤 오래 금요일 바텐더로 일했던 도라쨩도 졸업하는 날이라고 했다. 마시다보니 또 여섯시 반이 돼 있었다. "내일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라는 늘 해 보고 싶던 대사를 날리고 바를 나왔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치쨩이 내가 가고 나서 왜 가냐고 펑펑 울었단다. 아니 그럴 저거가 아니야...



겨우 일어나서 12시까지 와 달라던 우에토미로 갔다. 유키노는 아침부터 이벤트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내게 방해가 될까 싶어 나를 늦게 불렀다고 했다. 그냥 처음부터 같이 하면 빨리 끝났을 것을... 꼬마김밥을 말고 나물을 무쳤다. 의외로 잘 하긴 했는데 시간이 모자랐다. 유우키는 숙취를 호소하며 정말 하나도 도와주지 않았다. 야 나도 여섯시 반까지 마셨거든...



첫 손님은 사우다지 보보상이었다. 전표를 적기만 하면 되는데 내가 보기에도 불안했다. 그리고 두어시간 한가하다가 갑자기 손님들이 물밀듯이 들이닥쳤다. 내가 준비한 일곱시간 논스톱 리믹스는 시끄러워서 들리지도 않았다. 설마 내가 음식을 만들리라곤 생각하지 않았건만 전을 부치고 앉아있었다 제사 때도 해 본 적이 없는데... 일본에서 전을 부치다니... 친구들은 나의 등 밖에 볼 수 없었을 만큼 무지하게 바빴다. 다시는 이벤트 같은 것 참여하지 않으리 결심했다. 텟쨩한테 막걸리까지 잔뜩 얻어먹으니 도저히 안에 있을 수가 없어서 뭐 종반에는 거의 마시기만 했던 기억이다.


청소까지 대충 끝나고 타나로 가니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 이래서 사람들이 퇴근하고 술 한 잔씩 하다가 중독이 되기도 하는구나... 싶었다. 정신의 괴로움은 어느 정도 겪어봤지만 이런 육체의 피로는 거의 처음이었다. 이걸 잊기 위해 술을 마셨다. 그러다가 두 시쯤 네이바 바닥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ㅋㅋㅋㅋㅋ 정말 싫어하는 취객의 행동 중 하나인데 정말 난생 처음으로 바 구석에서 한 두 시간 뻗어버리고 말았다.


자고 일어나 보니 얼굴은 아주 산뜻했다. 감독과 카케이가 있었다. 감독도 졸다가 여섯시쯤 돌아가고, 나랑 카케이는 가타야에 가기로 했다. 가타야는 오전 4시 30분부터 정오까지만 하는 기사식당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 그래서 아침까지 마시고 술이 부족한 사람들은 가타야에 간다. 카케이는 가타야가 처음이라고 했다.


가타야 명물 마파두부


먹고 나와서 집으로 가려는데 카케이가 굳이 우리집을 보고 싶단다. 셈이 뻔해 보였지만 본인은 할 맘이 없었기 때문에 화장실이나 쓰고 가라고 하려는데 뭐 어느새 침대에 누워 있었다. 정말 잠만 푹 자려고 했는데 코골이가 진심으로 심각했다. 헤비메탈을 들으면서도 잘 수 있는 나지만 그런 시끄럽고 리듬감 없는 코골이는 처음이었다. 휴지로라도 귀를 막으려 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아서 손가락으로 귀를 막고 잤다.


두 시쯤 일어나서 나는 샤워를 하고 카케이를 깨워서 밥을 먹으러 갔다. 가다가 동네 사람들을 만났는데 아무 것도 안했음에도 여간 창피한 것이 아니었다. 역 앞 유명한 스파게티집에 가서 스파게티를 먹고 헤어졌다.



이날은 마지막날이자 3월에 한국으로 여행을 온다는 메구미와 사토미를 만나는 날이다. 메구미는 술을 거의 안 먹기 때문에 동네 카페에서 한 네 시간 수다를 떨었나보다. 중간에 유키노에게 알바비 조로 돈을 받았다. 원래 만엔인 것 같았지만 환율을 고려해서 500엔을 더 넣었다고 했다. ㅋㅋㅋ 그러고는 메구미, 사토미와 즉흥적으로 노래방에 가서 열창을 하고 나는 타나로 갔다.



마지막날이었지만 한산한 분위기에서 항상 밟는 코스를 밟았다. 치쨩은 나오지 않았다. 나나메에서 카케이와 카케이를 좋아하는 미유키의 키스신을 구경했다. 마지막은 키라와 네이바에서 아침까지 마셨다. 비행기는 오후 네시 반... 키라가 혹시 비행기를 놓칠까 영상통화를 걸어 주었는데 정말 감동의 눈물이 날 뻔했다.



하네다에서 늘 가는 흡연카페로 향했거늘 이게 웬일인가 1월 말을 끝으로 영업을 종료했다는 슬픈 소식이...! 도심공항도 없어져 카페도 없어져... 여행의 설렘과 여운 일부가 동시에 사라져 버린 순간이었다.



김포에 도착하니 취재진 비슷한 무리와 팬 비슷한 무리가 모여 있기에 잠깐 멈췄다. The XX였다! 짐 찾을 때부터 스타일 좋은 백인들이 있어서 눈길을 가더니만... 일본 공연을 마치고 한국 공연을 위해 온 것이었는데 나랑 같은 비행기를 탄 모양이었다. 팬서비스가 장난이 아니었다. 괜히 주변을 서성이다가 자랑용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짧고도 긴 2018년 첫 도쿄행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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