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니시에이션러브’, 반전보다는 향수다

80년대 명곡 5선

by 나효진

관객들에게 스포일러 방지를 당부하고 시작했던 영화가 있을까? 반전에 대단한 자신감을 갖고 있지 않은 이상 어려운 일이다. 영화 ‘이니시에이션 러브’가 그렇다. ‘이 작품에는 커다란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극장을 나오시면 앞으로 영화를 볼 분들을 위해 부디 비밀을 지켜주시길 바랍니다’라는 부탁의 말로 이야기의 문을 연다. 도대체 그 비밀의 정체가 무엇인지 보는 이들의 관심을 환기시키는 역할도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영화 속 반전이 별 것 아니었을 때 드는 실망감은 배가될 터다. 이만큼의 위험부담을 감수할 만큼 ‘이니시에이션 러브’의 결말이 기가 막혔냐고 한다면, 그렇지는 않다.



또 그렇다고 해서 시시한 반전은 아니었던 것이, 어느 정도는 예상될 법한 전개 속에서도 몇 차례의 비틀기가 더해졌던 까닭이다. 반전 속의 반전들이 단계별로 폭로되며 완벽한 기-승-전-결을 만들어냈다. 제작진으로서는 후반 5분을 자만할 만도 했다. 이야기의 흡인력도 상당하다. 하나의 카세트 테이프에 양면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빌려와서 두 파트로 나뉘어 진행되는 영화는, 초반 순정만화 같은 순수함이 녹아 있는 성장담으로 몰입도를 높인다.


그러나 이 영화의 미덕은 ‘반전’보다는 ‘향수’다. 기실 일본의 가장 화려했던 1980년대-연호를 따와 ‘쇼와(昭和)’시대라고도 불리는-를 다루는 영화들은 매우 많다. 가장 풍부한 문화의 향연을 즐길 수 있던 버블경제 시대의 분위기는 우리나라의 1980년대 극후반과 1990년대로 옮겨오기도 했다. 이 시절을 이야기하는 작품들은 음악부터 소품까지 다양한 방법으로 당대를 소환했다.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이 와다 아키코의 ‘낡은 일기장(古い日記)’를, ‘러브레터’가 마츠다 세이코의 ‘푸른 산호초(靑い珊瑚礁)’를 각각 불러온 것처럼.



하지만 ‘이니시에이션 러브’처럼 모든 수록곡을 1980년대 음악으로 채운 영화는 드물다. 쇼와시대 일본의 높은 음악 수준에 감탄하고, 이 노래들이 담긴 카세트 테이프와 브라운관 TV를 보며 향수에 젖을 수 있게 해 주는 영화가 ‘이니시에이션 러브’다. 영화 말미에는 엔딩크레딧과 함께 ‘80년대 도감’이라는 이름으로 ‘아라레쨩 안경’ ‘검은 전화기’ ‘뉴 어레인지 스텝 리젠트(유행하던 머리 모양)’ ‘조그 스쿠터’ ‘공중전화 부스’ 등이 소개되는데, 이를 전부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나이를 가늠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이니시에이션 러브’의 OST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곡의 분위기는 물론이고, 가사 역시 넉넉하면서도 순수했던 당시 인물들의 감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가장 다채로웠을 적의 일본 문화, 그리고 우리나라의 당대 한켠의 공기까지 속성으로 감상하기에 이보다 좋은 영화는 없을 듯하다.


#1. 1986 Omega Tribe - ‘君は1000%(그대는 1000%)’


‘1986 Omega Tribe’는 그룹명에서부터 짐작할 수 있듯 1986년 데뷔했다. 프런트맨 카를로스 토시키의 어설픈 듯하면서도 담백하고 호소력 있는 보컬과 세련된 사운드로 크게 사랑받았던 그룹이다. ‘君は1000%’는 이들이 발표한 첫 번째 곡. 최근 리바이벌 열풍이 불고 있는 시티팝의 전성기 한가운데 등장한 노래기도 하다.


이 곡은 극 초반 미팅으로 만난 남녀 주인공이 친구들과 함께 바다에 놀러갔을 때 나온 음악이다. 남자는 여자에게 이미 첫눈에 반한 상태지만, 수영복 차림의 그녀를 보고 다시 한 번 심장이 두근거리게 된다. 이때 흐르는 ‘君は1000%’는 한순간 관객들을 1987년의 해변으로 데려간다. 어떤 엔카 느낌의 수록곡보다도 가장 80년대와 여름, 바다에 어울리는 음악이다.


#2. OFF COURSE - ‘YES·NO’


OFF COURSE는 쇼와시대에 불꽃 같은 활약을 펼치고 해산한 J-POP계의 대표적 밴드다. 1973년부터 연호가 헤이세이(平成)으로 바뀐 1989년까지 활동했다. 우리나라에는 일본 드라마 ‘동경러브스토리’-MBC ‘질투’가 표절 논란에 휩싸였던-의 주제곡으로도 유명한 오다 카즈마사가 OFF COURSE의 프런트맨이다. 서정적인 보컬과 가사로 해체 후 발매한 베스트 앨범 역시 전성기 시절의 판매고를 올릴 만큼 내내 호평 속에 노래하고, 연주했던 밴드.


영화 속에서는 아름다운 여자 주인공에 비해 볼품 없는 외모를 지닌 남자 주인공이 변신을 감행하는 장면에 흐르는 곡이다. 두꺼운 안경에 더벅머리, 촌스러운 옷차림과 뚱뚱한 몸매의 남자 주인공이 패션 잡지를 보며 최신 유행 스타일로 거듭나는 과정에 등장하는 이 노래는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말하고 싶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 척 해도 돼요’라는 가사가 막 사랑을 시작해 상대의 마음을 궁금해 하는 극 중 인물의 상황과 절묘히 맞아 떨어진다.


#3. C-C-B - ‘Lucky Chance もう一度(럭키 찬스 한 번 더)’


1990년대 서태지와 아이들이 ‘필승’을 통해 보여줬던 색색깔의 헤어스타일은 사실 C-C-B가 원조다. ‘코코넛 보이즈’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던 이 5인조 밴드는 장난스런 콘셉트와 재미있는 가사로 인기를 얻었다. 이들의 과거 영상을 찾아보면 쇼와시대 음악방송의 화려함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대형 앰프를 동원해 직접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는가 하면, 무대에 타코야끼 트럭부터 경찰차까지 동원된다. 기실 이 시절 발전한 음향 기술과 무대 연출은 오늘날의 일본 음악방송으로 고스란히 이어진다.


드디어 여자 주인공과 ‘썸’을 타게 된 남자 주인공이 전화로 눈물의 고백을 하는 찰나 각자의 집 TV 속에 C-C-B가 등장하며 이 노래를 부른다. 여럿이 어울려 놀다가 다른 남자와 친근한 모습을 보이는 여자 주인공의 모습에 남자 주인공이 질투를 느낀 상황. 가사 역시 ‘그 녀석은 NO NO NO / 양다리 금지’ 등 남자 주인공이 느끼는 감정을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


#4. 太田裕美(오오타 히로미) - ‘木綿のハンカチーフ(목면의 손수건)’


‘목면의 손수건’은 1975년 곡으로, 극 중 시대와는 십 년도 더 전에 나온 곡이다. 당대의 ‘디바’ 오오타 히로미의 붓으로 그린 듯 깨끗한 얼굴과 꾀꼬리처럼 고운 음색이 뭇 남성들을 사로잡았다. 단순하고 경쾌한 멜로디지만 사실 가사는 매우 슬프다. 일을 하기 위해 도회지로 나간 애인을 기다리는 여자와 마음이 변해 가는 남자의 솔직한 심경이 교차되며 쓸쓸함을 안긴다. 후쿠야마 마사하루, 시이나 링고, 퍼퓸, ASKA, Mary J. 등 일본 최고의 인기가수들이 수십년에 걸쳐 다시 부를 정도의 명곡.


재미있는 것은 이 곡이 등장하는 영화 속 장면이 노랫말을 그대로 옮겨 만든 듯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도회지 물이 들어오지 말라’는 여자와 ‘만나러 가는 대신 여기서 유행하는 반지를 보내겠다’고 하다가 결국 변심해 돌아오지 않겠다는 남자의 이야기는 가사 위에 미농지를 대고 영화를 그려낸 것 같은 인상까지 주기 충분하다.


#5. ナオコ(켄 나오코) - ‘夏をあきらめて(여름을 포기하며)’


일본의 전설적 록그룹 사잔올스타즈(Southern All Stars)가 1982년 발표한 곡을 켄 나오코가 1983년에 커버했다. 두 보컬 모두 허스키 보이스가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켄 나오코 버전의 ‘夏をあきらめて’는 원곡의 남성적이고 거친 느낌을 쓸쓸하게 재해석했다. 여름의 어느날을 그리고 있는 노래지만, 그래서인지 가을의 감성이 묻어난다. 뜨거웠던 여름이 끝나고 가로수의 색이 바뀌듯 변한 사랑 이야기가 담겼다. 가사는 매우 야한 편이다. 직설적 노랫말이 외려 상상력을 자극한다.


도시 생활을 하면서 세련된 여자의 유혹에 넘어가고 만 남자 주인공이 의무적으로 고형의 여자 주인공을 찾아와 바다로 향하는 차 안에서 나오는 노래다. 초여름부터 같이 바다에 가자고 졸랐던 여자 주인공이었지만 그 사이 이중생활을 시작한 남자 주인공의 마음은 달라졌다. 몇주를 미뤄 겨우 바다로 가는 차 안에 올랐지만, 남자 주인공이 피곤하다며 적절한 출발 시간을 놓쳤고, 꽉 막힌 고속도로 안에서 이들은 결국 ‘여름을 포기’한다.


[사진] ‘이니시에이션 러브’ 포스터,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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