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어디에 있는가?

영화 '곡성' 가이드 리뷰 003

by 오태현





이 글은 세 번째 글입니다.
첫 번째 글과 두 번째 글을 먼저 읽고 오시면 이 글을 이해하시는 데 도움이 되실 겁니다.









곡성 가이드 리뷰 001 "어둠의 제왕이 이겼다고 생각한 당신에게"
https://brunch.co.kr/@taebarii/25


곡성 가이드 리뷰 002 "왜 선량한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가?"

https://brunch.co.kr/@taebarii/26





영화 '곡성' 스틸컷 | 출처 -Daum 영화, 곡성 2016




영화를 보는 내내,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조마조마하면서 끝까지 영화의 내러티브를 따라갔다. 비극적인 결말을 지으며 영화가 끝났을 때의 그 비참한 마음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여기저기서 탄식 소리가 들렸다. 영화를 보면서 나 스스로 결론을 내리고 있었기에 결말을 예상을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마음이 아프고 절망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왜?! 선량한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아무도 그들을 구원해 줄 사람이 없는가? 영화 '곡성'은 그냥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하려고 만든 이야기인가? 화장실에서 머리를 감다가 갑자기 밀려드는 공포에 대충 수건을 뒤집어쓰고 나와서는 '아! 그 영화 자꾸 생각나네. 무섭네!'하는 그런 여운을 주기 위해 만든 납량특집인가? 피가 튀고 신체가 분리되는 장면을 통해 쾌감을 얻게 하는 고어물인가? 아니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범인이 누구인지 영화에 숨겨진 복선들을 보며 유추해가는 추리물 스릴러 영화인가? 만일 그렇다면 그냥 재미있게 봐야 할 영화가 왜 이렇게 우리의 정서를 이토록 끔찍하고도 절망적으로 만들까?


이전 글에도 말했지만, 나는 이 영화에서 한 질문을 찾아냈다. '왜 선량한 사람들이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하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궁극적으로 '이렇게 악(惡)이 존재하는데 도대체 선량한 사람들을 구해줄 선(善)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향하고 있다. 이런 질문을 담고 있기에 이 영화의 결말이 그토록 끔찍하고 절망적이었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비슷한 주제의 영화와 드라마가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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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작품인 '엑소시스트'는 당시에는 꽤나 충격적인 영화였다고 한다. 그래서 영화에 얽힌 에피소드들도 참 많다. 나는 물론 이 영화를 중학교 다닐 때 VTR로 봤다. 우연히 집에 있어서 보게 되었는데,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내가 호러영화를 좋아하는 줄만 알았다. 그래서 그 후로 여러 장르와 시리즈의 공포물들을 찾아서 보았다. 하지만 결국 내가 호러영화 마니아는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말 재미있게 본 몇 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보고 나서 후회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후속 편이었던 엑소시스트 2편과 3편에도 크게 실망했었다.


영화를 여러 번 본 후에야 알게 되었지만, 내가 엑소시스트를 좋아했던 이유는 이 영화가 인간애와 자기희생의 가치를 다룬 영화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견을 가진 사람들도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이 영화를 그렇게 해석한다.


악령에 빙의된 소녀를 향해 축사를 행하던 두 신부는 큰 충격을 받는다. 그 이유는 이 소녀에게 빙의된 악령이 일반적인 귀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소녀에게 빙의된 악령의 이름을 물었을 때, 소녀는 자신을 악마(the Devil)라고 말한다. 이 부분이 이 영화에서는 상당히 큰 반전 중의 하나다.


악령의 존재에 관한 자료는 중세시대의 문헌들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천사론과 함께 만들어졌는데, 당시의 사람들은 천사와 악마가 당시의 지배구조처럼 '왕-제후-기사'와 같은 계급의 조직을 갖고 있다고 이해했다. 신(神)은 왕이고, 가브리엘이나 미가엘 같은 천사장들이 제후로서 여러 천사들을 거느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악령도 마찬가지다. '사탄'이라 불리는 마귀가 지옥의 왕이라면 아볼루온이나 아바돈, 바알세붑 같은 큰 권력이나 지역을 지배하는 제후들이 조무래기 악령들을 거느리고 있다고 믿었다. 현대에도 많은 문학작품이나 미디어에서 이 구조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보통 영어로는 사탄(Stan)을 악마(the Devil)이라고 부르고 조무래기 악령들을 귀신(demon)이라고 부른다.


보통 사람들에게 질병을 가져다주고, 사람들에게 빙의되어 삶을 망가뜨리는 일을 하는 존재는 귀신(demon)이다. 악령들도 제후급 악령들이나 제왕인 악마(the Devil)는 지옥을 다스린다거나 자신들의 영역, 혹은 맡은 임무가 있기에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들어오지 못할 만큼 바쁘다(??). 그런데 한낱 여린 소녀에게 어둠의 제왕이 들어왔으니 이게 놀랄 일이 아닌가?


이 영화에서는 결국 축사를 행하던 신부가 자기 안으로 악마를 불러들여 몸을 던져 목숨을 희생하는 것으로 소녀를 구한다. 엑소시스트 2를 보면 1편의 결말이 조금 달라지지만, 어쨌든 최소한 1편은 그렇게 결말이 난다. 어떤 사람은 신부가 악마에게 졌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신부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자유의지로 거룩한 희생을 선택한다. 그런 방법으로 악마로부터 무고하게 고통받는 소녀를 구원해낸다. 물론 여기에는 신부의 신앙과 신념이 절대적으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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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잘 안 보게 됐지만, 지인이 추천해줘서 한동안 재미있게 봤던 미드 '슈퍼내추럴'에도 비슷한 주제가 담겨 있다. 주인공인 두 형제 중 동생에게 하필이면 지옥을 만든 장본인인 사탄(Satan)이 빙의되고, 세상에 큰 위기가 찾아온다. 마지막의 순간에 동생은 자신의 의지로 사탄을 자신과 함께 다시 지옥에 가둔다. 동생의 자기희생으로 세상은 위기에서 벗어나게 되고, 많은 생명이 구원을 받게 된다.


그런데 이런 결정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다름 아닌 자동차였다. 아버지의 오래된 자동차. 두 형제가 세상을 누비며 희로애락을 함께 했던 그 자동차. 자동차 구석에 떨어진 작은 장난감, 긁힌 자국들... 이런 것들에 얽힌 따뜻한 추억들이 주인공의 이성을 되찾게 만들고, 옳은 결정을 할 수 있도록 일깨워주었다. 엄청난 위력을 가진 악마를 이긴 힘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늘 간과하고 살아가는, 일상의 따뜻한 추억과 소소한 행복이었던 것이다.





영화 '곡성' 스틸컷 | 출처 -Daum 영화, 곡성 2016





곡성은 한 영화 안에 이런 두 가지 이야기를 모두 담고 있다. 공교롭게도 종교적 신념과 따뜻하고 소소한 일상의 행복이 이 영화에서는 꽤나 큰 비중을 차지한다. 아마도 영화를 꼼꼼히 본 사람이라면 이 영화가 지나치게 종교적인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또한 미스터리 한 스릴러 영화 치고는 내러티브에 즐거움과 따뜻함이 너무 많이 묻어있다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을 것이다. 감독이 의도를 했다면, 이 글의 서두에 말한 '악이 실현된 사회에 소소한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는 무고한 사람들을 돌봐줄 선한 신은 어디에 있는가?'를 질문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선한 신이 있다면, 왜 이런 끔찍한 현실에 개입하지 않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말이다.


이 질문에 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은 '인간의 자유의지'뿐이다. 선은 반드시 있으며, 선은 악을 반드시 이기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선이 이기는 세상을 실현하는 것은 신(神)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다. 이미 그 모든 가치에 대한 선택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으며, 위임되어 있다. 그것을 신학적으로 인간의 '자유의지'라고 말하는 것이다.





영화 '곡성' 스틸컷 | 출처 -Daum 영화, 곡성 2016





성경을 가르치다 보면 흔히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선한 하나님이 왜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만들었나요?" 논리는 그렇다. 아예 만들지 않았으면 죄를 지을 일이 없었는데, 그런 걸 만들어 놓고 소위 요즘 말로 사람을 '낚은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하지만 '사랑'과 '선물'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오히려 선악과 이야기의 메타포는 상당히 깊이 있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서정윤 시인은 "사랑한다는 것으로"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랑한다는 것으로
새의 날개를 꺾어
너의 곁에 두려 하지 말고
가슴에 작의 보금자리를 만들어
종일 지친 날개를
쉬고 다시 날아갈
힘을 줄 수 있어야 하리라


의식주를 해결해주고 편안히 살게만 해준다고 사랑은 아니다. 사랑한다고, 편히 쉬라고, 날개를 꺾는 일은 끔찍한 저주다. 아무런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은 진짜 사랑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있는 자유의지는 신에게서 위임받은 엄청난 사랑이자 귀한 선물이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자유의지로 머무를 수도 있고 떠날 수도 있다. 우리는 선을 선택할 수도 있고 악을 선택할 수도 있다. 심지어 수많은 선 중에서 하나 혹은 여럿을 선택할 수도 있고, 수많은 악 중에서도 마찬가지로 선택할 자유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도 우리의 몫이다. 신은 이것에 간섭하지 않는다. 다만 가까이서 지켜볼 뿐이다. 아니, 세심하게 지켜보고 있다. 왜냐하면 그 결과를 각자에게 결산해야 하기 때문이다.






영화 '곡성' 스틸컷 | 출처 -Daum 영화, 곡성 2016






우리는 자유의지로 선을 선택할 수도 있다. 혹은 악을 선택할 수도 있다. 그런데 거기에는 항상 가치 기준의 문제가 있다. 그건 어떤 것을 더 소중히 여기느냐의 문제다.


이 영화를 보고 영화의 스토리를 따라가다가 나는 문득 세월호 사건을 떠올렸다. 세월호 사건을 되짚어 보며, 세월호를 운영하던 사람들에 대해 나는 '과연 그들이 종교인이었을까?'하는 의구심을 갖는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라면 마땅히 금전적이고 물질적인 가치보다, 생명의 가치를 더욱 추구해야 하지 않는가 말이다. 혹시라도, 추호라도 위험할 수 있다면, 과감히 얼마간의 이익은 포기해야 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 그들은 사랑도, 희생도 없었다. 오히려 정도만 지켰어도, 욕심만 부리지 않았더라도 일어나지 않을 일이 일어난 셈이다. 그들이 거리에서 그렇게 외치던 사랑과 구원의 신은 과연 어디에 있으며, 과연 그 하나님이 결산할 때 이들을 용서할 것인가 묻고 싶다.


우리는 물질, 명예, 권력... 이런 것들에 너무 큰 가치를 두고 살아간다. 그보다 더 가치를 두고 살아야 할 것들이 많은데도 말이다. 하다 못해, 문방구에서 플라스틱 머리핀을 사며 환하게 웃는 꼬맹이의 미소가, 우리가 그토록 열심히 쫓아가고 있는 돈이나 지위보다 훨씬 값어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느냐 말이다. 도대체 무엇에 그리 열광하고, 무엇에 미쳐, 무엇을 쫓아가고 있는가? 뭣이 중헌 지도 모르고...


말로는 종교적인 신념에 대해 침을 튀며, 고함을 치며 논쟁하고 주장하면서 실제로는 어디 그런가? 아이들의 미소가 귀하다고 하면서 과연 우리는 그 미소를 지켜주고 있는가? 말로는 사랑과 행복을 외치면서 과연 진정한 사랑과 행복에는 얼마나 관심을 갖고 투자하고 있는가? 돈! 돈! 돈! 돈! 돈에만 혈안이 되어, 종교단체든 사회단체든 복지단체든 정치단체든... 다 똑같은 이기적인 목적을 향해 가고 있지는 않은가?











선량한 사람들은 무고하다. 결국 이기적인 사람들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 그리고 어떤 희생적인 사람들은 그런 고통을 당하는 무고한 사람들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기도 한다. 물론 현상적으로 볼 때는 이기적인 사람들은 악마와 함께 승리하고, 무고한 사람들은 고통을 당하고, 선을 행하는 사람들은 크게 진 것 같이 보일지 모른다.


그래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빛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미 처음부터 존재했다. 그러니 무고한 사람들의 고통이 벗어지는 날이 올 것이며, 희생적인 사람들이 보상을 받는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이기적인 사람들과 악마가 심판받는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빛이 비치면 어둠은 쫓아낼 필요도 없다. 숨을 곳조차 찾지 못한다. 그렇기에 악(惡)과 선(善)이 싸우면 선(善)이 반드시 이긴다. 그래서 우리는 소소한 따뜻함과 행복에 더 가치를 두고 살아야 한다. 그 잘난 이익과 그것을 바꾸지 말아야 한다. 신앙 때문에 사랑과 희생의 가치를 배웠다면, 말로만이 아니라 소소한 생활 속에서 그것을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 어떤 신념 때문에 옳은 길을 선택했다면 끝까지 그 원칙을 지켜나가야 한다.


선택은 바로 우리의 몫이다. 우리는 이 세상을 행복하게도 할 수 있고, 불행하게도 할 수 있다. 물론 불가항력적인 악이 우리에게 닥칠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善)의 최후 승리를 믿으라. 그러면 언젠가는 결국 이기게 될 것이다.


현상적으로 선이 지는 것 같다고, 신은 어디에도 없고 악마만 있는 것 같다고 포기하고 타협해서는 안 된다. 그래도 끝까지 사랑과 희생과 일상의 행복한 삶에 가치를 두고 그것을 지켜나가야 한다. 그러면 결국 선이 완성된 세상을 꿈꿀 수 있다.


진짜 꿈은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무엇이 되거나 무엇을 얻는 것이 진짜 꿈이 아니다. 내가 무엇이 되지 않아도, 무엇을 얻지 못해도, 그것만은 꼭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야말로 진짜 꿈이다. 그런 꿈을 꾸는 사람들이 세상을 바꿨고, 행복하게 만들었다.


선이 이기는 사회, 악마가 머물 곳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은 우리들의 선택에 달려 있다.






영화 '곡성' 스틸컷 | 출처 -Daum 영화, 곡성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