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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태현 Jun 26. 2021

예수님의 가족 03
세상이 이해 못할 삶

예수님의 가족 #03



어머니의 찻잔     


스물일곱 살, 한 참 전도사로 사역하고 있던 내게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어머니셨다. 어머니께서 들려주신 말씀은 그리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고향집이 경매에 낙찰이 되어 이제 다른 사람이 와서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어머니께서는 집을 고치는 인부들이 들어와 집안에 있는 세간을 모두 내다 버리기 전에 쓸 만한 것들을 챙겨 오자고 하셨다.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하고는 교회의 승합차를 빌려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집으로 내려갔다.


집에 도착해 문을 여니 마음이 영 좋지 않았다. 어머니께서도 한참을 그냥 서 계셨다. 손 때 묻은 살림살이들이 집안 가득 있었다. 추억이 고스란히 그 안에 담겨 있는데, 대부분 버리고 가야 했다. 한동안 넋 놓고 세간들을 보다 어머니께서 먼저 일을 시작하셨다. 어차피 어머니나 나나 모두 남의집살이를 할 때라, 큰 물건들은 챙길 수가 없었다. TV랑 옷가지들을 챙기고 나니 차에 무언가를 더 실을 수도 없었다. 어머니는 20년이나 된 냉장고를 보시며 계속 안타까워하셨다. 


어머니께서는 “내게 지하실로 내려가자.”라고 하셨다. 이미 차에 더 실을 자리도 없는데 그냥 버리고 가자고 말씀을 드렸지만, 어머니는 “그래도 내려가 보자.”라고 우기셨다. 마지못해 내려가 보니, 지하실도 살림이 한가득이었다. 그 안에는 포장도 뜯어보지 않은 그릇들이 잔뜩 있었다. 나는 남의집살이 하면서 그릇이 웬 말이냐고, 더 실을 데도 없으니 그냥 남들이나 쓰라고 두고 가자고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들은 척도 하지 않으시고 계속 그릇 상자들을 만지작거리셨다. 그러다가는 결심을 하신 듯 그릇 두 상자를 품에 안으셨다. 내 감정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다 못해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어머니께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제발 좀 버리고 가시라고요. 더 이상 실을 곳도 없는데, 가져가도 남의 집에 어디다 쌓아두려고요. 그렇게 그릇에 미련이 남아요? 이렇게 망하고서도 왜 버리지 못하세요?”     


못된 놈이, 얼굴에 인상을 써가며, 어머니께 있는 대로 성질을 부렸다. 그때 나는 별로 들어본 적이 없는 어머니의 욕을 들었다.     


“이 새끼야! 너 장가가면 주려고 그래!”     


어머니의 한마디에 나는 더 이상 성질을 부릴 수 없었다. 어머니께서는 결국 그릇 두 상자를 직접 안고 차에 타셨다. 차를 몰고 운전하는 동안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울고 계셨고, 나도 마음으로 울고 있었다.     


두상자 중 하나는 지금 우리 집에 있다. 나와 내 동생이 결혼하면서 어머니께서는 그 그릇들을 하나씩 나눠주셨다. 그 그릇 상자 안에는 예쁜 파란색 찻잔이 들어 있었다. 집들이를 하고 예배를 드리면서 사역하던 교회의 목사님과 교인들을 몇 분 모셨다. 차를 드시면서 하나같이 찻잔이 너무 예쁘다고 하셨다.


그 지하실에서 나는 도저히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때는 슬픔이 많았고 어렴풋이 어머니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때를 생각하면 오히려 슬픔보다 사랑이 더 많이 기억된다. 나도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어머니의 마음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나 보다.     


우리는 깊이 알지 못하면 오해하는 일이 많다. 오해뿐만 아니라 미워하기까지 한다.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혐오스러워하거나 증오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이유로 믿음의 사람들은 오랫동안 미움을 당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어이없는 일일 경우가 많다. 비상식적이고 비합리적일 수 있다. 그러나 믿음과 믿음대로 사는 삶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은 세상이 오해하더라도 믿음대로 사는 법이다. 마태는 마 13:31-33에서 이런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세상 사람들이 오해하고 미워하더라도 믿음의 사람들이 꼭 지켜야 할 것과, 꼭 살아야 할 삶의 방식을 말이다.               




겨자씨의 비유     


마 13:31-32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어떤 사람이 겨자씨를 자기 밭에 뿌렸다. 그 씨는 커다란 나무가 되었다. 그리고 새들이 와서 깃드는 튼튼한 나무가 되었다. 그런데 바로 이 겨자씨가 천국이라는 것이다. 쉽게 생각하면 ‘아! 천국은 작은 것을 심어 큰 것을 거두는 것이로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이 이야기에는 엄청난 모순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질문에 대답해 보라. 밭에 나무를 심는 것이 잘한 일인가? 또 그 밭에 새들이 와서 둥지를 틀었다. 좋은 일인가?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이 일이 어이없는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나무를 심으면 땅의 수분과 양분을 모두 나무가 빨아들여 주변에 곡식이 자랄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나무에 새들까지 와서 아파트를 짓고 살고 있다니, 이는 심각한 일이다. 분명 새들 때문에 밭에 난리가 날 것이기 때문이다. 곡식 밭이든 과수원이든 쑥대밭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런데 이 겨자씨가 천국이란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신앙을 볼 때도 똑같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어이없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믿음을 갖고 사는 것, 교회에 나가는 일들이 다 비상식적이고 비효율적이다. ‘일주일에 하루는 좀 쉬어야지. 교회에 나가 하루 종일 노래하고 기도하고 봉사하는가? 게다가 목사에게 돈까지 갖다 바치고 도대체 저들은 정신이 어떻게 된 사람들 아닌가?’ 물론 이 생각이 사실은 아니지만, 어쨌든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그들에게는 우리가 헌금을 하거나 봉사를 하는 일, 심지어 일주일에 하루 교회에 나오는 것조차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신앙의 의미를 아는 사람들은 오히려 그런 생각을 가진 세상 사람들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볼 것이다.     

곡식이나 채소밭에는 나무를 심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꼭 한그루는 심어야 한다. 왜냐하면 농사는 사람이 짓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계도 오랫동안 일을 하면 쉬게 해야 하는데, 하물며 사람이랴! 실제로 시골에 가면 밭에 듬직한 나무 한그루가 서 있다. 요즘은 기계로 농사를 지으니 없을 법한데도 얼마 전 산골에서 목회하는 친구 교회에 갔다가 밭에 서 있는 나무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심지어 그 나무 아래에는 평상까지 있었다. 예전에는 그냥 돗자리를 깔고 쉬거나, 그도 아니면 그냥 흙 묻은 옷차림으로 풀 위에 쉬곤 했었는데, 이제는 나무로 잘 만들어 장판까지 깔아놓은 좋은 평상도 있었다.     


어릴 적 아버지께서 삼청교육대에 끌려가셔서 할아버지 댁에 얹혀살았던 적이 있는데, 그때는 할아버지께서 농사를 지으셨다. 논농사를 지으셨는데, 모내기철이나 추수철이 되면 상당히 바빴다. 중간에 농약을 치시거나 논을 갈아엎을 때도 일손이 필요하곤 했었다. 농사가 바쁠 때면 할머니와 어머니도 함께 바빠지신다. 할아버지와 동네 어른들이 새벽 일찍 논에 나가시면 할머니와 어머니도 새벽같이 일어나셔서 밥을 지으셨다. 그렇게 아침을 차려 광주리에 차곡차곡 쌓아 머리에 이고 두 분이 논으로 나가셨다. 농부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면 두 분은 돌아와 참 거리를 만드신다. 간식이라야 도토리묵이나 국수, 미숫가루 정도였지만 일꾼들은 참 좋아했던 것 같다. 오전 참이 끝나면 점심을 준비하셨고, 점심이 끝나면 오후 참으로 두부나 부침개와 함께 막걸리를 준비하셨다. 모내기나 추수같이 일이 저녁 늦게까지 있을 때는 고기를 삶거나 볶아서 근사한 저녁을 배달하기도 했다. 그때, 나무 그늘은 참 유용하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시간에 논두렁에 걸터앉아 쉬기란 여간 고통스러운 게 아니다. 그러니 논두렁에 그늘 시원한 나무 한 그루 있으면 얼마나 좋은가? 천국이 따로 없다. 거기가 천국이다.     


이것은 우리네 농촌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은 아니다. 아프리카에 선교를 갔더니 넓디넓은 옥수수밭 한가운데에도 커다란 아카시아 나무가 서 있었다. 얼마나 큰지 그 그늘에 족히 이삼십 명은 누울법했다. 그 정도 나무라면 분명히 주변의 옥수수가 여럿 결실을 못 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옥수수 몇 그루가 뭐 그리 대수인가? 사람이 쉴 곳이 없다면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것을. 만일 사람이 일하다 쓰러져버리면 농사는 모두 헛일일 뿐이다.     


청년들과 함께 영월로 농촌봉사를 간 적이 있었다. 우리는 이박삼일 동안 농사를 지었다. 농가마다 파리와 모기로 고생을 하신다고 해서 살충제도 뿌리고, 길도 닦고 축대도 쌓았다. 그중에서도 제일 힘들었던 일은 콩밭에 잡초를 제거하는 일이었다. 할머니 한 분이 농사를 지으시는 밭이었는데, 관절 때문에 수술을 하시고 병원에 한 달을 입원해 계셨다고 했다. 돌아와 보니 밭이 엉망인데, 올해 농사는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하셨다고 했다. 밭이 굉장히 넓었다. 사실 이런 일이 아니더라도 할머니 혼자서 그 밭을 일구신다는 말을 듣고 한 참 당황스러웠었다. 그런데 도시에서 청년들이 왔으니 희망을 걸어보신다고 했다. 다들 수건을 뒤집어쓰고, 이틀을 꼬박 콩밭에 앉아 있었다. 손으로 뽑히지 않아 호미로 캐내다시피 하면서 잡초를 뽑았다. 처음에는 밭고랑 끝이 보이지 않았는데, 이틀 만에 콩만 남기고 잡초를 모두 뽑아버렸다. 그래도 우리는 워낙 여러 명이었으니까 말이다.     


마지막 날 저녁, 청년들은 동네 어르신들을 모아서 콘서트를 했다. 나도 취사병 경력을 살려 어르신들께 저녁으로 삼계탕을 근사하게 대접했다. 저녁식사가 끝날 무렵, 밭주인 할머니께서 나를 찾아오셨다. 내 손을 붙들고 한 참을 우셨다. 고맙다고 말이다. 그러면서 꼬깃꼬깃한 돈 삼만 원을 쥐어주셨다. 청년들과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라고 하셨다. 사실 받아서는 안 되는 돈이었다. 시골 어르신들의 형편을 빤히 아는데, 우리가 보태드렸으면 드렸지 받아서는 안 되는 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받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걸 받지 않으면 분명 할머니는 너무 슬퍼하실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연실 “감사합니다. 꼭 맛있는 것 사 먹을게요.”하며 인사를 했다. 그러고는 정말 청년들과 함께 오는 길에 휴게소에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축복기도를 진하게 하고서 말이다.     


농사는 사람이 짓는다. 사람이 쓰러지면 농사는 끝이다. 농부들은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농사철이 되면 특별히 몸조심을 한다. 제 때, 제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논이든 밭이든 사람이 일하는 곳에는 나무 한그루가 꼭 심겨있다. 그런데 그게 바로 천국이다. 하나님의 나라다. 하나님의 나라는 밭에 심은 겨자 나무 씨앗과 같다.     


사실 겨자는 나무가 아니다. 겨자풀대는 크면 3미터까지 자라기는 하지만, 새들이 둥지를 틀 수 없는 풀이라 한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하필이면 겨자씨에 비유하셨을까? 겨자씨가 작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작은 것에서 큰 것이 나오는 가장 적절한 비유가 겨자씨와 겨자풀대의 비유였다. 이 비유는 겨자씨와 밭에 심은 나무를 섞어놓은 비유라고 할까? 어쨌든 세상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매우 놀랍고 황당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깨알 반만 한 작은 씨앗을 뿌렸는데, 커다란 나무가 되고 새들까지 와서 깃들었다. 마치 처음엔 예수님을 그냥 구경하러 왔지만 자기 소유까지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선 제자들의 이야기처럼 말이다.     


신앙을 모르는 사람들은 대체로 우리를 모자란 사람으로 여긴다. 우리는 일주일 동안 일하고 주일이 되면 교회에 모여 또 일한다. 게다가 그렇게 열심히 일한 돈을 목사에게 갖다 바친다.(실제로는 그렇지 않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니 밭에 나무를 심은 꼴이요, 나무에 새까지 와서 둥지를 틀고 앉아있는 형상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를 향해 조소를 날리고 한심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은 전혀 모른다! 육신에 쉼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의 영혼에도 쉼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돌아가기 전까지 우리의 삶에 참된 쉼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일주일에 하루는 주님께 돌아와 주님 품에서 푹 쉰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의 영혼이 주님을 만나 안식을 얻는 것이다. 안식은 평안의 결정체이다.     


편안은 결코 평안이 될 수 없다. 집에 누워 편안히 쉰다고 마음과 영혼의 평안이 오는 건 아니다. 수백만 원짜리 안락한 침대에서도 평안이 없다면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야 한다. 하지만,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도 평안이 있다면 우리는 코를 골며 곤히 잘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족이라면 우리 인생의 밭에 신앙의 나무 한 그루를 심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어이없다고 해도 우리는 그 나무를 심는다. 나무 그늘의 유익을 알기 때문이며, 인생의 길을 다 달려가려면 반드시 때때로 얻는 신앙의 안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누룩의 비유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며 어이없어하는 일은 비단 신앙생활 자체만은 아니다. 우리의 생활 습관이나 가치관에도 그들은 매우 놀라고 당황스러워한다. 아니, 그래야 한다. 물론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지금은 오히려 우리의 세상살이가 신앙이 없는 이들보다 못할 때가 더 많다. 기가 막힌 이야기다. 제발 교회 밖의 사람들이 교회 안의 우리를 보고 깜짝 놀랄 일들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 물론 긍정적인 일들로 말이다. 부정적인 일들 때문이라면 그들은 교회 안의 우리를 보며 이미 많이 놀라고 있으니 말이다.     


마 13:33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그 옛날에 어느 집 며느리가 밥을 지었다. 식구는 다 해야 열 명 남짓한데, 밥을 두 가마니를 지었다. 이 며느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상식대로라면 아마도 집에서 쫓겨났을 성싶다. 가루에 누룩을 넣은 여인을 쉽게 말하자면 이와 같다. 누가 이 여인을 이렇게 극단적인 상황으로 몰아넣었는가? 바로 누룩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누룩이 천국이라고 하셨다. 이례적이다. 성경에서는 누룩이 좋은 의미로 쓰이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하셨다. 이 누룩은 누구나 꺼려하는 이야기의 대표적인 비유 대상이다.     


누룩은 빵을 부풀게 하는 데 쓰인다. 원래의 가루가 얼마 안 되어도 누룩으로 부풀려놓으면 상당히 크다. 밤톨만 한 반죽이 주먹만큼 커진다. 그런데 이 여인은 가루 세 말에다 누룩을 섞었다. 무려 32리터가 되는 양이다. 떡도 한 말을 하면 그 양이 엄청나다. 가족끼리 먹을 양은 절대로 아니다. 하물며 세말의 가루라면 그 양이 지나치게 많다. 2리터 드는 생수통으로 열여섯 병 분량의 가루에 누룩을 넣었으니 그 양이 얼마나 많을까?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이 여인은 이제 큰일을 저질러버렸음에 틀림없다. 게다가 이 여인의 상황이 극단적인 이유는 누룩을 가루에 넣으면 저장이 불가능하다는 사실 때문이다. 지금처럼 냉장고가 있어 냉장이나 냉동을 시켜놓으면 모를까? 이 가루들은 이제 곧 쉬고 냄새가 나고 썩어버릴 것이다. 이 여인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저지른 것일까?     


그런데 이 여인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상황이 있다. 이 여인을 해명해 줄 딱 한 가지의 상황, 그것은 “잔치”다. “나눔”이다. 혼자 먹으려고 했다면, 이 여인은 바보이거나 정신과 진료를 받아야 하는 사람이다. 이 여인은 잔치를 벌이려고 이 많은 가루들을 부풀렸다. 아니, 잔치를 염두에 두지 않았더라도 이 여인은 이제 잔치를 벌일 수밖에 없다. 나누려고 하지 않았다고 해도, 나눌 수밖에 없어졌다. 이것이 누룩의 능력이다. 누룩은 그녀의 삶에 들어가 부풀려 잔치를 벌이게 했고, 나눌 수밖에 없는 삶으로 변화시켰다. 천국은 이 누룩과 같다. 천국이 그 삶에 들어온 사람들은 스스로를 주체할 수 없어진다. 왜냐하면 천국이, 그 삶의 양식이 온 가치관을 바꿔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토록 많은 부자들이 스스로 가난해졌고, 전도유망하던 청년들이 세상의 성공을 버리고 오지로 들어갔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난 뒤, 그들의 삶은 본질적으로 달라졌다.     


우리나라 최초의 권서전도자였던 서상륜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양반 가문에 태어났지만 13세의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고향을 떠났다. 만주의 고려문이라는 곳에서 홍삼 장사를 하려다가 장티푸스에 걸리고 만다. 이때만 하더라도 장티푸스는 장질부사, 혹은 염병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정도로 위험한 돌림병이었다. 그가 다 죽어가고 있을 때, 마침 중국에 와 있던 매킨타이어 선교사가 그를 정성껏 간호하여 살려낸다. 역병이 돌면 금줄을 치고 격리하는데, 자신의 목숨도 아끼지 않고 그를 치료해 준 것이다. 죽을병에서 회복된 서상륜은 “형제도 친구도 나를 버렸는데, 도대체 예수가 누구이기에 생면부지의 죽은 개와도 같은 나를 당신은 이렇게 살려주는가? 그래서 예수를 믿는 도를 알아보고 싶다.”라고 말하며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다. 그는 로스와 매킨타이어 선교사를 도우며 그들에게 한글을 가르쳐주고 다른 세명의 사람들과 함께 우리 글로 된 첫 번째 성경인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를 편찬하였다. 그러고는 그 성경을 가지고 박물 장사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성경을 재미있는 이야기라고 권하여 돈을 받고 팔면서 권서전도자가 되어 자신의 고향인 황해도 송천(솔내, 소래)으로 돌아가 사람들을 전도하고 우리나라 첫 번째 교회인 송천 교회, 즉 소래교회를 세웠다. 만일 매킨타이어 선교사가 죽어가는 서상륜에게 강제로 영접을 시키려 했다면 아마도 그는 예수님에 대해 그토록 감동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매킨타이어 선교사가 그에게 사랑을 베풀어 헌신했을 때, 그는 그 안에서 예수님을 발견하고 평생 자발적으로 예수님께 헌신하는 진정한 신앙인이 되었다. 이처럼 이 땅에 처음 복음이 들어왔을 때는,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신념을 우리에게 복사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교회를 짓기보다 먼저 학교를 짓고 병원을 지었다. 알렌의 제중원, 아펜젤러의 이화학당, 배재학당... 이름만 들어도 자랑스러운 선교사들의 병원과 학교들 아닌가? 그들은 그곳에서 사람들의 생명을 살려냈고, 인재들을 키워냈다. 아마도 그들을 만난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했을 것이다.     


‘나는 가난한 시골 농부의 자식인데 왜 저들이 나를 이렇게 가르쳐 주는 걸까?’     

‘나는 노비의 자식인데, 파란 눈의 외국인들이 왜 저렇게 나를 위해 장학금을 만들면서까지 헌신하는 걸까?’

‘나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약자인데 왜 나를 살리기 위해 저들이 저렇게 애를 쓸까?’     


그러나 결국 그 병자들이 살아나 한국 초대교회의 일꾼이 되었고, 그 학생들이 배워서 한국 근대사의 주역들이 되었다. 누군가 그들의 가슴에 뜨거운 그리스도의 사랑을 심어 그들을 그런 신앙인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름 모를 그 여인의 삶에 들어갔던 누룩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들어갔고, 제자들에게 들어갔던 누룩이 또 그들의 제자들에게 들어갔으며, 시간이 흐르고 흘러 파란 눈의 선교사들에게 그 누룩이 전염되었고, 결국 이 땅에도 그 누룩이 들어오고야 말았다.     


하지만 시간이 많이 흘러서 그런지, 아니면 누룩을 제대로 이어받지 못해서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누룩도 없는 사람들이 누룩이 있다고 우기는 것인지, 요즘은 그 누룩의 힘을 교회 안에서 보기가 참 어렵다. 교회 밖의 사람들은 우리의 헌신과 열정에 놀라지 않고 오히려 비상식적이고 비윤리적인 것에 놀라곤 한다. 정말 유감이 아닐 수 없다. 교인들은 자기들끼리 만족하면 그만이지 세상을 도무지 놀래 주려 하지 않는다. 교회 안의 사람들은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며 귀히 여기지만, 세상에서는 주님의 이름이 땅바닥에 떨어진 지 오래되었다. 세상에서 주님의 이름이 밟히고 있다. 누구 때문인가? 바로 우리 때문이다.     


신학대학교에서 한국교회사를 배울 때, 교수님께서 해 주신 말씀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 만주의 한 일본인 경찰서에서 있었던 일이다. 경찰서장이 형사들과 순사들을 불러놓고 “3.1 운동의 주모자들을 잡아오라.”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형사들과 순사들이 “누가 주모자인지 어떻게 압니까?”라고 물었다. 경찰서장은 “기독교인들이 주모자이니 기독교인이라고 하면 모두 잡아와라.”라고 말했다. 순사들과 형사들이 어이가 없었다. “아니 어떤 사람이 뻔히 잡혀갈 줄 알면서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말하겠습니까?” 그랬더니 경찰서장은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3.1 운동 당시 기독교 인구는 소수였다. 실제로 3.1 운동에 가장 많이 참여한 사람들은 천도교인들이었다. 그런데도 그 당시엔 모든 사람들이 기독교인이면 애국자요, 지도자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일본인 경찰서장까지도 한국의 기독교인들을 그렇게 평가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떤가? 지금은 기독교인이라면 자신들만 아는 이기적인 사람들, 말만 번지르르하고 전혀 삶은 엉망인 사람들, 겉과 속이 다른 표리 부동한 사람들이 되지 않는가? 세상이 우리를 그렇게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교인들은 전도를 한다고 아파트 초인종을 누른다. 누구냐고 안에서 물으면 지나가다 목이 말라 물 한 잔 얻어 마시러 왔다고 말한다. 무슨 아파트 10층에 물을 얻어 마시러 올라갈까? 그건 그렇다 치고 문을 열면 일단 발부터 끼워 넣는다. 그러고는 복음을 전한단다. 그런데 이 웃지 못할 일이 실제로 교회가 전도하는 방법이라는 것이 문제다. 많은 전도왕들과 전도 단체들이 그렇게 거짓말로 속이면서 전도하라고 가르쳤다. 그런데 지금은 사이비 종교들이 그 일을 그대로 따라 하고 있다.     


내가 자주 들어가는 어떤 커뮤니티에서 어떤 불신자 청년이 다음부터는 발이 부러지든 말든 문을 쾅 닫아버리겠다고 쓴 글을 보았다. 어떤 젊은이는 전도하러 여자 두 사람이 왔는데, 복음을 듣는 게 싫어서 보기에도 민망한 동영상을 큰 소리로 틀어놓았다고 한다. 이런 일은 상식적으로도 성범죄에 해당하는데, 그 아래 댓글들이 더 가관이다. 잘했다는 것이다. 좋은 방법인데 몰랐다고, 자신들도 누군가 전도하러 오면 그렇게 하겠다고 한다. 이토록 세상이 우리를 싫어한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던 그 오해 때문은 아니라는 사실이 우릴 슬프게 한다.     


우리는 우리 안에 천국이라는 누룩이 들어와 부풀려졌음에도 온전히 세상과 나누지 않고 세상에 잔치를 벌이지 않아 썩어버린 것이 아닐까? 우리가 우리끼리 모이는데 즐거워하고 우리끼리만 주님을 모시고 우리끼리만 서로 사랑을 베풀 때, 수천 명이 먹을 가루를 부풀려놓고 겨우 열 식구 모여 앉아 빵을 구워 먹고 있는 어리석은 사람들처럼 되어 버렸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그렇게 살았다. 자신들의 재산도 모두 내어 함께 나누어 먹고, 고난당하는 이들과 함께 나누었다. 천국이 우리 삶에 들어와 날마다 잔치를 벌이는 모습을 보며, 세상 사람들이 ‘사람들이 어떻게 저렇게까지 부풀려 나누며 살 수 있는가?’하며 놀라야 하는데, 반대로 지금 세상은 우리를 보며 ‘저 정신 나간 사람들은 저렇게 많은 가루를 부풀려놓고 썩히고 있다.’라며 놀라고 있다.     


우리는 언젠가 누군가에게 뜨거운 사람들이었던 적이 있는가? 누군가 우리의 모습을 보며 “네가 믿는 예수가 누구시기에?”하며 주님을 영접할 수 있을까? 물건을 배달하고 돌아서는 택배기사가 우리 집 문 앞에 붙은 교패를 보며 피식 비웃는 것이 아니라,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면, 우리의 지인들이 기도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이중성에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손을 얹고 감사할 수 있다면, 우리의 이웃들이 “당신이 교인이야?”하고 삿대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은 역시 교인이야.”라며 엄지손가락을 올릴 수 있다면, 만일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키며 나누는 삶     


신앙이란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어이없는 삶이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 나라를 사는 예수님의 가족들은 밭에 나무를 심는 사람들이다.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고 비웃는다 할지라도 풍성한 추수를 위해 영혼의 안식을 누릴 줄 아는 신앙의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예수님의 가족들이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의 가족들은 자신의 삶을 부풀려 이웃과 나누는 사람들이다. 심지어 사람들이 어이없어하며 고개를 흔들어도 자신의 밑바닥까지 긁어 주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족이요, 그분의 제자들이다.     


못된 아들 녀석의 성질머리와 잔소리에도 불구하고 그릇 두 상자를 안고 계셨던 어머니의 마음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알고 나니 얼마나 나는 부끄러운 사람이었나? 나는 여기서 더 나아가 예수님을 생각해본다. 세상이 조롱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외칠 때, 심지어 제자들까지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습니까?”하며 어이없어할 때도, 묵묵히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셨던 예수님을 생각해보자.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어도 예수님은 그렇게 구원을 이루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예수님의 가족이라면 자기 인생의 밭에 “신앙”이라는 나무 한그루를 심어야 한다. “유대인이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유대인을 지켰다.”는 유명한 말처럼 그 나무 한그루가 우리 인생을 지킬 것이다. 또한, 예수님의 가족이라면 자기의 삶을 부풀려 나누어야 한다. 마치 오늘이 지나면 다 썩어 없어질 것처럼 이웃과, 세상과,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삶을 나누어야 한다. 퍼주고 퍼주면 바닥이 드러나고 비루해질 것 같지만, 그래도 바닥까지 싹싹 퍼주어야 한다. 바닥까지 싹싹 퍼내면 더 깨끗한 생수를 펑펑 솟아내는 우물처럼 우리의 인생도 맑은 은혜로 넘쳐흐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마 22:37-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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