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가족 #02
스물여섯 살, 세기말이라 불리던 1999년, 성탄을 앞두고 처음으로 전도사로 사역을 나갔다. 어려서부터 자라온 교회를 떠나게 된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었다. 금융위기로 온 나라가 어려움을 겪을 때, 어머니가 운영하시던 작은 식당도 문을 닫게 되었다. 빚으로 인해 살던 집도 경매에 넘어가고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어머니는 한동안 빚쟁이를 피해 이모 댁으로 피신을 해야 했고 동생은 군에 입대를 했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더 이상 봉사를 할 수 없게 되어 불가피하게 전도사 사역을 나갈 수밖에 없었다.
대학원을 다녀야 했고, 용돈도 벌어 써야 했다. 게다가 숙식도 해결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사례가 좋은 사역지는 많지 않았다. 절박한 심정으로 기도했다. 학교 예배당에서 기도하고 돌아오는 길에 기숙사 후배가 “형, 머리가 왜 그래?”하고 물었던 기억이 난다. 새까맣던 머리카락이 희어지기까지 했다. 시간이 지나 다시 머리카락은 까맣게 되었지만, 그때 이후로 사람은 근심으로도 머리가 희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고민하며 기도하던 어느 날, 기숙사 후배가 공고문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 너무나 근사한 대우를 해주는 교회의 전도사 초빙 공고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그때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력서를 넣은 후였다. 부천 소사동에 있는 작은 교회였는데,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담임목사님은 공채방식으로 전도사를 초빙할 계획은 없었다. 소개를 통해 좋은 전도사를 초빙하고 싶었는데, 그만 사임할 전도사님이 공고를 냈던 것이다.
물론 나는 이력서를 내고 가만히 기다릴 수 있는 형편이 안 되었다. 그래서 다짜고짜 전화를 했다. 연륜이 묻어나는 담임목사님의 목소리에 기가 죽었지만, 다급한 마음에 나의 형편을 소상히 말씀드렸다. “지금 대학원을 진학해야 하는데 형편이 안 되어 공부를 계속할 수 없는 상황인데, 마침 목사님 교회의 공고를 보고 희망을 얻었습니다.”라고 말이다. 한 참을 듣던 목사님은 돌아오는 토요일에 이력서를 들고 교회를 찾아오라고 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그 교회에서 사역하게 되리라는 확신은 전혀 없었다. 이미 한 교회에서 퇴짜를 맞은 후였기 때문이다. 일산에 있는 건물이 근사한 어떤 교회였는데, 그 교회에서는 건물 자랑만 한 시간을 듣고 왔었다.
토요일이 되어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교회 앞에 도착했다. 아무리 둘러봐도 교회가 보이지 않았다. 멀찍이 십자가가 보여 가보니 다른 이름의 교회였다. 다시 가르쳐주신 장소로 돌아와 두리번거리다 보니 길 건너편에 지저분한 상가건물 유리창에 “세광교회”라고 쓰인 것이 보였다.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도 최소한 자기 건물은 있는 교회인 줄 알았는데, 작은 것은 둘째 치고라도 피시방에 당구장까지 있는 모습이 어린 생각에 전혀 교회답지 않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담배냄새와 오물 냄새가 나는 계단을 올라 목양실을 찾아 들어갔다. 그런데 그곳에서 만난 목사님은 더 놀라웠다. 목사님께서 시각장애인이었기 때문이다. 목사님께는 죄송한 일이지만, 목사님께서 시각장애인이었다는 것은 내겐 정말 충격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사실 내 처지가 큰 교회 작은 교회 가릴 형편이 아니었다. 목사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보고 교회를 선택할 수도 없었다. 그냥 그 교회가 아니면 공부도 목회도 힘들었다. 그래서 마음을 굳게 먹고 들어가 앉아 묻는 질문에 하나씩 대답을 해 갔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느냐는 질문부터 시작해 특별하게 기억나는 질문이 없을 정도로 면담은 형식적이었다.
면접을 다 마칠 때쯤, 다시 한번 내 형편에 대해 말씀드렸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형편이고, 공부를 하려면 꼭 이 교회에서 사역해야 할 입장이라고 말이다. 그랬더니 목사님께서 의미심장한 말씀을 한 마디 하셨다.
“교회가 어려운 전도사님을 도울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지요.”
아직도 그 말씀과 그 목소리를 똑똑히 기억한다. 결코 잊을 수 없다. 내게 베풀어주신 큰 은혜였기에 말이다.
나는 그 교회에서 8년을 사역했다. 그곳에서 목사가 되었고, 그곳에서 남편이 되었고, 거기서 아빠가 되었다. 물론 그곳, 그분 밑에서 목회의 거의 모든 차원을 배웠다. 삶도 배웠고, 사람도 되었다. 아니, 얼마 전 뵈었을 때 내게 “자기 스스로 되었다고 하면 아직 덜된 거야.”라고 말씀하셨으니 ‘사람이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 8년 동안 거의 사람이 되었다고 하면 틀림없다.
저는 경제적인 목적이 최우선이었다. 오히려 교회도 목사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곳에서 놀랍도록 복을 받았다. 내 삶에 가장 그리운 곳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그곳을 꼽는다. 심지어 모교회도, 어릴 적 살던 고향도 아니다. 그런 이유로 아직도 저는 고속도로에서 나와 시흥에서 부천으로 고개를 넘어갈 때면 고향에 돌아가는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린다.
값진 보물의 비유와 진주 장사의 비유
나는 마태복음 13장에 있는 비유들의 가장 절정은 누가 뭐래도 44절과 45절이라고 생각한다. “값진 보물의 비유”와 “진주 장사의 비유”라고 불리는 말씀이다. 내용으로 보나 위치로 보나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나는 이 말씀에 예수님의 가족이라면 꼭 알아야 할 삶의 방식 “제1원칙”이 들어있다고 본다.
예수님의 비유들 중에는 “천국은 마치 ~과 같다.”라고 시작되는 것들이 있다. 지난 글에 설명했듯이,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 혹은 하늘의 나라를 뜻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가족들이 살아야 할 삶의 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천국의 비유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런 비유들을 읽을 때에는 “천국이 무엇으로 설명되어 있는가?”를 살펴보며 읽어야 한다. 천국의 서술어가 무엇인지 알면 천국의 비유는 그 의미가 비교적 쉽게 풀리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런 원칙을 가지고 44절의 말씀을 읽어 보자.
마 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값진 보물의 비유”에서 천국은 비유의 제목과 같이 밭에서 우연히 발견한 값진 보물이다. 어떤 사람이 남의 밭에 일을 하러 갔다가 우연히 값진 보물을 발견했다. 엄청난 횡재였다. 분명 '우연한' 횡재다. 왜냐하면 이 사람이 그 밭에 간 이유가 보물을 발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밭에 하루 품삯을 위해 간 일용직 노동자이거나 아니면 땅을 빌려 소작을 하는 소작농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밭에 간 이유가 당연히 생계를 위한 것이었다. 그런 그가 자신이 기대하지 않았던 보물을 만났으니 우연한 횡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어떤 이들은 이 비유를 해석하면서 천국을 얻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희생해야 함을 힘주어 강조한다. 이 사람이 자신의 재산을 다 팔아 그 밭을 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다른 측면에서 이 말씀을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둘의 가치가 서로 대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통 조금 더 나은 가치를 위해 조금 덜한 가치를 희생하기도 한다. 가치의 차이가 많이 나지 않거나 대등할 경우 희생에 대한 고민은 더하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런 고민은 할 필요가 없다. 이 사람이 가진 재산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전 재산이 겨우 밭 한 뙈기 값밖에는 되지 않았다. 이 땅은 강남 한 복판처럼 가치 높은 땅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가 찾아낸 보물의 가치는 엄청난 것이었다. 이천만 원 정도의 돈으로 백억의 가치를 얻었다고 하면 맞을까? 사실 이 말씀의 뉘앙스로는 그보다 더한 가치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그가 그토록 기뻐하며 춤을 추면서 자기 재산을 다 팔았을 것이다. 남의 밭에 묻힌 보물을 얻기 위해 윤리도 도덕도 가치관도 다 포기한 것으로 봐서 그 가치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자기 재산이 하나도 아깝지 않게 느껴질 만큼 대단한 횡재를 한 사람. 자신의 모든 윤리, 도덕, 가치관을 뒤엎을 만한 보물을 발견한 사람. 그 사람이 누구일까? 그 사람은 바로 천국을 만난 “나 자신”이다.
내가 처음 전도사 사역을 나갈 때, 나는 그저 내가 계속 공부할 수 있는 경제적인 조건 때문에 사역을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이지만, 더 고귀한 이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엄청난 횡재를 했다. 내 이전의 삶이 하나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귀중한 보물을 얻었다. 인간적인 이유로 사역을 시작했지만, 그 밭에서 저도 횡재를 한 것이다. 이 일에 내가 한 일이라고는 그저 얼마 안 되는 나의 삶의 가치를 사역에 걸었던 것뿐이다. 그러니 이 일이 일어난 것에 내 지분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데 이 일이 일어난 것에 절대적으로 지분을 가진 분이 계셨다. 뒤를 이어 바로 등장하는 “진주 장사의 비유”를 통해 우리는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아무 생각 없이 읽는다면 그저 똑같은 이야기를 두 번 기록해놓은 것뿐이다. 실제로 그렇게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자세히 집중해 읽어보면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45절과 46절의 말씀을 읽어보자.
마 13:45-46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앞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천국의 비유는 천국이 무엇인지가 매우 중요하다. “값진 보물의 비유”에서는 보물이 천국이었지만, “진주 장사의 비유”에서는 제목을 정한 것처럼 진주 장사가 천국이다. 나는 바로 이 부분이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진주가 천국이 아니라 진주 장사가 천국이라는 것 말이다. 천국과 진주 장사, 진주 장사와 천국이 동의어로 간주되었다. 천국과 동의어가 될 수 있는 분은 여럿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흥미진진해진다. 진주 장사가 하나님 아버지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생각해 보라. 값진 진주를 찾기 위해 적극적으로 세상을 두루 다니시는 아버지 하나님. 값진 진주를 발견하고 기뻐하시는 아버지, 이 진주 장사 하나님을 생각하면 저는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한다. 왜냐하면 이분이 그토록 찾아 헤맨 그 진주가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그 진주가 바로 “나”다. 하나님께서는 태초부터 “나”를 계획하시고 준비하셨다. 찾고 기다리고 또 원하셨다. 그러시다가 결국 자신의 전 재산, 하나밖에 없는 아들까지 다 팔아서 “나”를 사셨다. 이래도 가슴이 벅차오르지 않을까?
똑같은 비유인 줄 알았는데, 가만히 살펴보니 전혀 다른 두 비유였다. 하지만 둘을 더해 보면 어떤가? 이런 이야기가 두 이야기 가운데 들릴 것이다.
“나는 어느 날, 나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주님을 찾았다. 거기서 내 삶의 모든 가치를 모아도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가치를 발견했다. 내 인생 최고의 횡재였다. 그러나 내 편에서는 횡재였지만, 주님 편에서는 다함없는 사랑이었다. 나는 어느 날 우연히 큰 복을 만났지만, 주님께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나를 찾고, 바라고, 기다리고 계셨다. 심지어 내게 이 복을 주시기 위해 당신의 전 재산, 그 하나밖에 없는 아들까지 십자가에 희생하시고서 말이다. 그러니 나의 이 모든 복은 오직 주님의 은혜로부터 시작되었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해서 복을 얻는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덕을 쌓으려 하고 공을 세우려 한다. 심지어 기도나 전도까지도 누가 더 많이 하는지 경쟁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더 복을 주실 줄 알고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천국”에 우리의 공로는 하나도 없다. 있어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미하다. 우리가 얻은 하나님의 나라에는 주님의 사랑이 가득하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가족이라면 누구나 “나의 이 모든 삶이 오직 주님의 은혜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시작된 삶
나는 누구에게나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내 삶이 시작되었다고 말이다. 내가 처음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역자가 되겠다고 결단했던 일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 목회자가 될 것을 결심했다. 어머니가 원해서도 아니었고, 목회자에 대한 환상 때문도 아니었다. 목숨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무렵 어머니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자리에 누우셨다. 아버지께서 집에 안 계셔서 어머니께서 홀로 우리 형제를 키우셨는데 무리를 해서 일하시다가 그만 쓰러지셨던 것이다. 사실 불치병도 아니었을 텐데, 가난한 형편에 그럴듯한 진찰을 받아 본 적이 없으니 그냥 그렇게 앓고만 계셨다.
미닫이 문 하나로 바람을 막아주던 작은 단칸 셋방에서, 어머니는 거의 1년을 누워계셨다. 어린 나이에 너는 일러주시는 대로 밥이며 반찬을 해야 했다. 큰일들은 주변 아주머니들께서 도와주셨다. 누우신지 1년이 되어갈 무렵 기력이 쇠한 어머니는 심지어 환상에 시달리기까지 하셨다. 나는 이불 끝에 똬리를 틀고 있다는 보이지 않는 뱀을 쫓아야 하기도 했다.
11월의 어느 밤이었다. 저는 지금도 그 밤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목사님께서 교인들과 함께 심방을 오셨다. 일어날 수 없는 어머니는 그저 눈물만 흘리며 예배를 드렸다. 다 죽어가는 어머니의 임종예배 같았다. 찬송가조차 따라 부르지 못해 눈물만 흘리는 어머니를 보는 것이 너무 힘들어, 저는 화장실을 간다는 핑계로 문을 밀어 열고 마당으로 나왔다. 마당 앞에는 너른 밭이 있어 밖으로 휑하니 뚫려 있었는데, 그날따라 그렇게도 별이 많았다. 문득 전에 오셨던 부흥강사 목사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하나님께 서원을 하면 하나님께서 꼭 들어주신다던 말씀이었다. 특히 목회자의 서원을 하면 그 효과가 대단하다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동의하지 못할 이야기지만, 그때는 어려서 정말 그런 줄로만 알았다.
저는 어느새 하늘의 별을 보며 기도하고 있었다. “하나님, 우리 엄마를 살려주세요. 우리 엄마를 살려주시면 제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목사가 될게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미처 기도를 마치기도 전에 방 안에서 집사님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 어떻게 해!” 거의 탄식에 가까운 목소리들이었다. 가까이 사시던 집사님 한 분이 급히 문을 열며 나를 부르셨다. 나는 그때 끔찍한 광경을 목격했다. 어머니의 몸에서 피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위아래로 쏟아져 나온 피는 이미 방바닥에 흐르고 있었다. 나는 순간 “사람은 저렇게 죽는구나!”하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줄로만 알았다.
할아버지를 모셔오라는 한 집사님의 말씀을 듣고서, 나는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사시는 할아버지 댁으로 달려갔다. 할아버지는 급히 오셔서 어머니를 업고 동네에 하나뿐인 병원으로 가셨다. 몇몇 집사님들이 방을 치워주셨고, 몇몇 분들은 병원으로 따라가신다고 했다.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고 나서, 내게는 평생 잊지 못할 어두운 밤이 찾아왔다.
동생은 아직 어려서인지 조금 칭얼거리다 금세 잠들어버렸다. 나는 거의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두려웠기 때문이다. ‘엄마가 돌아가시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로 시작한 두려움에서 본질적인 죽음의 공포까지 몰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일어나 방문을 꼭 잠갔다. 공포가 얼마나 심했는지 어린 내게는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시간이었다. 새벽까지 두려움으로 떨다가 문득 잠이 들고 말았다. 어느덧 해는 중천에 떴는데, 밤새 뒤척이다 늦게 잠이 들어 학교도 못 가고 자고 있는데, 누군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태현아, 문 열어.”
모기만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였지만,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나는 얼른 문을 열었다. 역시나 어머니였다. 1년 동안 누워계셨던 어머니가 혼자 걸어서 집에 돌아오셨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어머니가 살아서 돌아오셨다. 기적이었다. 모두가 기적이라고 했다. 그날 저녁 어머니가 다른 집사님들과 나누는 말씀을 들으니, 의사 선생님도 기적이라고 말했다고 했다. 몸 안에 있던 염증이 터졌는데, 그냥 그대로 몸 안에서 있었으면 생명을 잃었을 텐데, 몸 밖으로 다 빠져나와 살아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나를 부르셨다. 그래서 나는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니다. 내 성적이 꽤나 괜찮았음에도 불구하고 신학대학을 진학한 것도, 신학을 하는 동안 한 번도 한눈을 팔지 않았던 것도 모두 그때의 사건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저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다. 나란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그런 부르심이 아니었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나는 결코 내 결단으로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이 아니다. 오직 주님의 사랑과 은혜로, 그분의 초대와 이끄심으로 주님의 종이 되었다.
사랑으로 시작하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고 기다리시는 분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찾으시고 바라신다. 사실 그런 하나님의 사랑에 비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별로 사랑하지 않는다. 누가 감히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가 말로써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한다면, 우리의 지난 몇 년 간, 아니 몇 주간, 아니 며칠간의 삶을 돌아봐야 한다. 그러고도 정말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얼마나 살았을까? 아들까지 희생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우리의 사랑을 비교해보면, 그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 앞에 얼마큼 크게 보일까?
하지만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도 이미 그런 사실을 알고 계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별로 사랑하지 않음을 하나님은 잘 알고 계신다. 우리가 아는 것을 하나님께서 모르실리 없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기만 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인정해 주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신뢰하기만 하면, 그 작고 당연한 믿음만으로도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신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의 모든 의로움과 생명과 삶은 오직 그분의 은혜와 사랑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말이 결코 거짓이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사는 예수님의 가족이라면 누구나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 때문이며, 내 삶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시작되었다.”라고 고백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시작된 삶이기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살기를 기뻐해야 한다. 아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살면 물에 사는 물고기가 행복하듯, 숲에 사는 새가 행복하듯, 당연히 행복하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은혜를 잊고 사는 사람들이 참 많다. 오히려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교회 안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목회를 하면서 가장 당혹스러울 때가 바로 그런 때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사람들을 신앙인으로 말날 때 말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런 사람들에게는 천국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천국은 예수님의 가족들의 것이고 예수님의 가족이라면 무엇보다 하나님 사랑의 은혜를 알기에 사랑으로 시작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은혜를 잊은 사람들은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고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족이 아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천국은 한 방울도 없다.
참으로 행복하고 싶은가? 천국을 소유하고 싶은가? 예수님의 가족이고 싶은가? 그렇다면 은혜를 잊지 말고, 예수님처럼 사랑으로 시작하라!
요일 4:10-12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