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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태현 Feb 27. 2016

예수님의 가족 01
왜 예수님의 가족인가?











내 나이 스물두 살 되던 해에 일생 처음 주일예배를 드리지 못했다. 몇 대를 이은 신앙의 가문은 아니지만 처녀시절부터 교회를 다녔던 어머니 덕분에 어려서부터 항상 주일이면 어머니의 손을 잡고 교회를 다녔다. 먼저 천국에 간 형에 대해 추억할 때도,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무릎까지 오는 눈을 헤치며 함께 교회에 가던 기억이다. 7살 여름 성경학교를 통해 교회학교에 등록한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예배에 빠진 적이 없었다. 학교는 빠져도 예배에 빠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던 어머니 때문이기도 했지만, 나 스스로도 주일에 교회에 가는 것이 즐거웠기 때문이다. 내 유년기와 사춘기의 추억은 대부분 교회와 관련이 있다. 그런데 그런 내가 교회를 가지 못하는 사정이 생겨버렸다.


육군 훈련소에 입소해서 첫 주일을 맞이했는데, 아무도 교회에 가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다른 훈련소는 어떠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내가 입소했던 훈련소는 첫 주차에 종교행사를 시키지 않는 것 같았다. 사실 완전히 달라진 환경에 정신없이 하루하루가 지나가니 그날이 주일인지 조차 몰다. 주일예배를 빠진 건 그다음 주 토요일이 되어서야 알다. 종교활동을 위해 종교를 조사했기 때문이다. 마음이 좋지 않았다. 서글픈 생각마저 들었다. ‘평생 주일을 어긴 적이 없었는데...’ 부끄럽지만 눈물도 났다.


다음날 예배에 참석해서 맨 앞자리에 앉았다. 군종병의 찬양인도로 예배가 시작됐고, 나는 온 힘을 다해 찬양을 부르며 예배를 드렸다. 뒤쪽의 다른 훈련병들도 큰 소리로 찬양을 부르고 있었다. 그 정도 숫자의 사람들에게서 기대할 수 없는 커다란 찬양소리였다. 나는 그 훈련소에서보다 더 박력 있는 찬양을 그 이후로 들어본 적이 없다. 가슴이 벅차올랐고 눈물이 흘렀다. ‘예배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한 주 예배를 빠졌다는 서글픔과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눈물을 펑펑 흘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려 뒤를 보고는 눈물이 쏙 들어갈 정도로 웃었다. 내 뒤에는 예배당을 가득  채운 스님들이 손을 들고 울면서 찬양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손을 들고 찬양하는, 머리를 빡빡 깎은 훈련병들의 모습이 꼭 그렇게 보였다. 그 광경 또한 평생 잊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예수님의 가족이 되어 예배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격적인 일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주 그 사실을 잊고 산다. 마치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 아이들이 부모님의 소중함을 잊고 사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가 햇빛, 공기, 물, 낮과 밤의 소중함을 잊고 살듯 말이다. 그런 우리에게 사도 마태는 마 12:46-13:58을 통해 예수님의 가족이 된 기쁨을 전해준다.




마태와 예수님의 가족


마태는 마태복음을 통해 줄곧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면 당연히 하나님 나라의 국민들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마태는 “하나님 나라의 국민”, 혹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말보다 “예수님의 가족”을 더 좋아했다. 마태복음에는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에 대해 “백성”이라는 말은 없고, 가족 구성원을 뜻하는 “형제”라는 말이 훨씬 많이 등장한다. 마태는 자신의 공동체가 “예수님의 가족”으로 살기를 원했음에 틀림없다. 마태복음의 가장 중심에 예수님의 가족 이야기를 넣은 것도 그러한 이유일 것이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 온, 신앙의 매너리즘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가족”이라는 말이 그리 가슴을 울리는 말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였던 마태는 마 12:46-13:58에서 예수님의 가족 된 사람의 기쁨이 어떠한지 우리에게 보여준다. 적어도 마태에게는 예수님의 가족이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벅찬 감격이었는지 모른다.     


마 12:46-50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하니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누가 내 어머니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마리아와 예수님의 가족들이 사역하고 계시는 예수님을 찾아왔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가족을 배척하시고 오히려 제자들을 향해 손을 내미시며 “저들이야말로 나의 참 가족이다.”라고 선언하신다. 참고적으로 마가복음 가족들이 온 이유를 따로 설명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귀신이 들려 정신이상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서, 가족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러 왔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 가족들을 배척하셨을 수도 있지만, 마태복음 13장을 끝까지 읽어 보면 마태가 이 말씀들을 기록한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마태복음 13장의 말미(마 13:53-58)에는 오히려 예수님께서 육신의 가족들에게 배척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예수님의 고향에 살고 있던 예수님의 가족들(친척들)은 “그를 잘 안다.”라고 하면서도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을 배척했다. 예수님은 “선지자가 자기의 고향과 집 외에는 존경받지 못함이 없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아무런 능력을 행치 않으셨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의 참된 가족은 육신의 가족이 아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예수님의 제자들이던 것이다.


마태는 마태복음 13장의 앞과 뒤를 이렇게 “예수님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로 감싸 놓았다. 그 이유는 바로 이제부터  이야기할 여덟 개의 비유가 예수님의 가족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가족이라면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 예수님의 가족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최소한 자신의 공동체만큼은 그런 예수님의 가족으로 살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태가 이렇게 예수님의 가족을 중요하게 생각한 이유는 무엇일까? 마태는 도대체 왜 그토록 “예수님의 가족”이 된다는 사실에 가슴이 뛰었을까?


내가 처음 중학생이 되었을 때, 가장 좋았던 것은 외박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한 번도 집을 떠나 부모님 없이 잠을 잤던 적이 없었다. 먼저 천국에 간 형 때문에 생긴 어머니의 상처 때문에 친구들과 노느라 외박을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중학생이 되면서 그럴 수 있는 기회들이 생겼다. 성탄절 새벽송을 비롯해, 송구영신예배를 드리고 난 후 모였던 중고등부 송년회 모임, 학생부 여름 수련회가 바로 그런 기회들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좋았던 것은 여름수련회였다. 멀리 다녀온 것도 아니고 그저 교회 근처의 기도원에서 3박 4일 집회에 참석한 게 고작이었다. 학생 집회도 아니고 장년들을 위한 집회였기에 지루하고 고단했다. 고등부 형들은 몇 번이나 탈출을 시도했다가 전도사님과 선생님들께 붙들려왔다. 새벽 5시, 오전 10시, 오후 3시, 저녁 7시, 하루 네 번집회는 꼬박꼬박 열렸다. 의자도 없이  맨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서 말씀을 듣다 보면 다리도 아프고, 허리도 아팠다. 마지막 날 담임목사님께서 우리가 수련회 하는 모습을 보러 오셨다가 전도사님과 선생님들에게 호되게 야단을 치셨다. 아이들을 너무 고생시켰다고 말이다. 우리를 향한 목사님의 긍휼(?) 덕분에 우리는 1박 2일을 강가에서 신나게 놀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4박 5일 수련회를 한 셈이다.


모두들 힘들게 버틴 수련회였다지만, 나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내겐 그 수련회가 그렇게 좋았다. 저녁 집회가 끝나면 캄캄한 하늘에 별이 그렇게 많았고,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하나님 저는 여기 살았으면 좋겠어요.’하고 기도했다. 이유는 있었다. 정말 예쁜 누나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모두 얼굴 하나하나 기억이 난다. 수진, 승희, 원숙, 주원, 효신, 혜원이라는 이름을 가진 누나들이었다. 누나들은 시간만 나면 내 옆에 앉아서 조잘조잘 이야기를 했고, 나를 예뻐해 주었다. 어떤 누나는 내가 밥을 먹을 때면, 밥을 다 먹을 때까지 말동무를 하며 기다려주기도 했고 직접 식판에  두세 번씩 밥을 떠다 주기도 했다. 덕분에 '내가 꽤나 괜찮은 사람이구나'는 생각이 들었다. 누나들뿐만 아니라 몇몇 형들도 내게 매우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나를 위해 미리 일정을 알려주고 간식을 챙기는 형도 있었다. 학교에서 만났으면 무서웠을 형들인데, 교회에서 만난 사이라 그런지 친절했다.  그때가 참 좋았다. 거기가 천국 같았다.


십  수년이 지나 전도사가 된 후에야 그들의 친절이 내가 잘났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이유를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 집이 너무 가난했기 때문이다.  나는 불우한 학생이었다. 그러니 우리 전도사님은 형들과 누나들을 불러 “태현이는 가정이 불우한 아이니 너희들이 특별히 신경을 써 줘야 한다.”라고 부탁을 했을 것이다. 나도 전도사가 되어 그렇게 했으니 우리 전도사님도 그렇게 하셨을 것이 분명하다. 어쨌든 나는 지금도 우리 전도사님과 누나들, 형들에게 고맙다. 지금은 몇몇 하고만 가끔 연락하고 지내지만, 늘 그들을 사랑하고 추억한다. 언젠가는 명절에 가족들 모이듯 모두 모여 옛이야기들을 두런두런 나눌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 지금도 참 행복하다.


마태는 모든 가족과 이웃들이  손가락질하는 세리였다. 그런 마태가 예수님의 가족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에 얼마나 감격했을까? 세리라면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죄인의 대명사였다. 세리들은 공인된 폭력배였기 때문이다. 어떤 부자가 로마 황제에게 거금을 바치고 세금권을 취득하면, 자신은 세리장이 되고, 지역의 폭력배들을 모집하여 세리로 삼았다. 일정 금액의 세금을 로마에 바치고 나면 나머지는 모두 세금권을 가진 세리장의 몫이었다. 그런 이유로 세리들은 온갖 폭력을 동원해 세금을 걷었다. 그래서 세리는 가족들에게까지 비난받는 지독한 불한이었다. 마태는 그런 세리였다. 그에게는 분명히, 기댈만한 친척이나 가족이 없었을 것이고, 혹시 있었더라도 마태를 향해 손가락질하는 사람들뿐이었을 것이다. 심지어 예수님께서도 누가복음에 보면 마태를 버려진 환자와 죄인으로 보셨다(눅 5:29-39).


그런 마태를 향해 예수님은 손을 내미시며, “이 사람들이야말로 나의 참된 가족이다!”라고 선언하셨다.(마 12:49-50). 예수님께서는 애써 어머니와 형제들을 부인하면서까지 마태를 당신의 가족으로 인정해주신 것이다. 마태는 이미 예수님께서 제자로 불러주셨을 때, 자신이 세던 돈까지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사람이다(눅 5:27-28). 자기 재산을 내놓고 예수님을 위해 잔치를 벌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눅 5:29). 모두 손가락질을 하는 자신을 제자로 선택하신 예수님께  감동해마지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가족이라니! 제자도 벅찬데 주님의 형제라니!’ 마태는 감격해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모양이다. 눈물이 흐르고 가슴이 벅차올랐을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가족이 된 마태의 마음이었다. 내가 두고두고 기억하는 믿음의 가족들처럼,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마태에게 있어서 추억하면 추억할수록 고마운 사람들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런 마태가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을 “백성”이라고 부르지 않고 “형제” 즉, “가족”이라고 부른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님의 비유     


마태는 마태복음 13장을 여덟 개의 비유로 묶었다. 이 여덟 가지의 비유는 마태가 생각하기에 예수님의 가족으로서 꼭 알아야 하는 삶의 수칙이었다. 어느 가정이나 꼭 지켜야 할 약속이  한두  개쯤 있는 것처럼, 마태의 공동체에도 기본수칙이 필요했을 것이다. 마태는 그 수칙들을 예수님의 비유에서 찾았다.


예수님의 비유들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말씀들이다.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으로 한때 성경은 본래적인 것과 비 본래적인 것으로 구분되기도 했다. 몇몇 성서학자들은 ‘복음서들 중에 어떤 말씀이 예수님께서 하신 본래적인 말씀인가?’하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방법대로 연구와 토론을 거듭한 끝에 도저히 부인하려야 부인할 수 없는 예수님의 어록들을 묶어보았다. 그랬더니 결국 산상수훈과 비유만 남았다고 한다. 그러니 예수님의 비유들은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꼭 알아야 하는 상식 중의 상식이다. 사도 마태가 자신이 편집한 복음서의 가장 가운데에 여덟 개의 비유를 꼼꼼하게 구성한 이유도 이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의 원어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통치다. 고대에는 왕의 통치권이 미치는 곳까지가 그 왕의 왕국이었다. 나라를 구분할 때, 지정학적인 위치보다는 왕의 법이 우선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는 법률과 삶의 양식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마태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가족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13장의 비유들은 예수님의 가족으로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삶의 방식이다.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여덟 가지 비유는 잘 살펴보면 두 개씩 묶을 수 있다. 각각의 비유마다 예수님의 가족으로서 지켜야 할 수칙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나는 둘씩 묶어 묵상하다가 더 깊은 뜻을 발견하게 되었다.


예수님의 가족이라면 꼭 알아야 할, 또한 반드시 받아들여야 할 삶의 방식. 예수님의 가족이 된 기쁨과 감격을 잃지 않고, 예수님과 함께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방법.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시 133:1-3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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