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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태현 Jun 26. 2021

예수님의 가족 04
마음을 바꾸라

예수님의 가족 #04



유익한 것, 무익한 것, 해로운 것     


스물두 살, 훈련을 마치고 자대 배치를 받았다. 육군훈련소와 경찰학교를 지나며 시위를 진압하는 훈련을 받고 진압부대에 편입이 되었다. 부대원이라고 해야 고작 150여 명쯤 되는 작은 부대였다. 본부소대에서 대기기간을 마친 후, 소대 배치를 받을 때까지는 그래도 편안했다. 막상 소대 배치가 끝나자 고난이 시작되었다. 온갖 궂은일은 막내들의 몫이었으므로 몸이 편할 날이 없었다. 그래도 한 가지 위로가 되었던 것은 주일 오후에는 교회에 가는 일이었다. 작은 부대였기에 영안에 교회가 없었다. 처음 부대에 배치를 받고 다음날 중대장님을 면담하는 시간에 당돌하게 “나는 신학생이고 목사가 될 사람이라 주일이면 꼭 교회에 가야 합니다.”하고 말했다. 다행히도 함께 듣던 직원 중 한 분이 신실한 집사님이셨고, 중대장님도 교회에 대해 편견이 없는 분이라 허락을 해 주셨다. 그 이후로 주일 오후가 되면 혼자서 영 밖으로 나가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부터 큰 문제가 생겼다. 6개월 정도 먼저 온 선임이 있었는데, 나보다 한 살 나이가 어린 사람이었다. 사회에서는 공수도 도장의 사범이었다는데, 몸이 깡마르고 검은 피부에 보기에도 사나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얼굴만 사나운 게 아니었다. 성격도 매우 거칠었는데, 특히 그는 내가 식사시간에 식사기도를 하는 것을 싫어했다. 식사를 하면 일부러 내 앞에 앉는데, “기도하면 죽어.”라고 꼭 한 마디를 했다. 처음엔 “제가 기독교인이고 신학생이라 저는 밥 먹기 전에 꼭 기도를 해야 합니다.”하고 설명을 했지만 결국 아무 소용이 없었다. 식사기도를 위해 눈을 감으면 그때부터 전투화 발길질이 시작되었다. 기도를 마치고 눈을 뜰 때까지 정강이를 걷어차는데 참으로 고통스러웠다. 그때는 왜 그렇게 고집스러웠는지 모른다. 꼭 눈을 감고 손을 모아야 기도한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며칠을 그렇게 괴롭히더니, 결국 자신을 무시한다고 화를 내며 나를 이불 창고로 끌고 갔다. 벌써 몇 명의 선임들이 그 안에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들어가고 문을 닫자마자 구타가 시작되었는데, 태어나서 그렇게 많이 맞아본 적이 없었다. 온몸이 아프고 입안이 다 터져서 며칠 동안 피가 났다. 그러고 나서야 그는 식사시간에 나와 다른 식탁에 앉아주었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취사병으로 발탁되어 본부소대로 자리를 옮겼다. 취사반에는 두 명의 선임이 있었는데, 참 좋은 사람들이었다. 이미 내가 신앙을 가진 것 때문에 괴로움을 당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도 알고 있었다. 내가 부대에 오기 전에 한 선임이 있었는데, 그도 신학대학교를 다니는 신학생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학생임에도 술에 담배에, 심지어 휴가 때면 근처 다방의 아가씨들과 신나게 청춘을 불태웠다는 것이다. 성격도 좋지 않아 후임들을 많이 괴롭혔다는데, 특히 나를 힘들게 했던 그 선임을 많이 괴롭혔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이해가 되었다. 어느 날 신병이 하나 들어왔는데, 신학생이라며 당돌하게 교회를 다니겠다고 하고서 혼자 영 밖으로 나다니니 얼마나 심사가 뒤틀렸을까? 자기를 괴롭히던 신학생 선임과 오버랩되어 내가 얼마나 미웠을까? 게다가 기도하지 말라고 명령했는데 들은 척도 않고 기도하는 나를 보며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올랐을 것이다. 그쯤 생각하고 나니 그를 용서할 수 있었다. 이해가 되었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처음엔 도저히 이해도 되지 않고 용서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받았을 고통을 생각하니 내가 더 신앙인으로서 바른 모습을 보여줘야겠다는 사명감마저 들었다.


그 후로 몇 달이 지났다. 부대에 잔치가 있어 돼지를 한 마리 잡았다. 잔치가 있으면 취사병들은 매우 바빴다. 그날도 음식들을 만들고 돼지를 손질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병들은 모두 삼삼오오 모여 고기를 구워 먹었지만, 우리는 중대장님과 직원들의 상에서 고기를 구우며 봉사를 해야 했다. 마침 나는 그날 중대장님의 불판을 맡고 있었다. 취사병들이 이렇게 애를 쓰니 중대장님도 기분이 좋으셨는지 내게 소주를 한잔 따라서 주셨다. 내가 우물쭈물하자 왜 안 마시느냐고 물으셨다. “나는 신학생이고 목사가 될 사람이라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라고 했더니 중대장님이 갑자기 화를 내셨다. “우리 형도 목사다. 인마! 중대장이 따라주는데 안 마셔? 명령 불복종이야! 이 자식 영창 보내!” 갑자기 어른이 화를 내니 몹시 당황스러워 어쩔 줄을 몰랐다. 나는 그 자리에서 도망쳐 부대 화장실로 숨었다. 저녁도 못 먹고 온종일 일만 하다가 그런 일을 당하니 설움이 북받쳐 올랐다. 한 참 동안 화장실에서 혼자 울었다. 두 시간쯤 지났을까? 교회 집사였던 직원께서 화장실로 날 찾아오셨다. 어차피 영 안에 숨어봐야 화장실이니 쉽게 찾으셨던 모양이다. 나를 불러놓고는 중대장님께서 들어가셨으니 나와서 저녁을 먹고 내무반으로 들어가 쉬라고 하셨다. 터덜터덜 취사장으로 들어갔더니 두 선임이 밥상을 차려주었다. 먹는 둥 마는 둥 하고는 내무반으로 들어가 잠자리에 들었다.


취사반의 두 선임은 참 나를 좋아했다. 늘 잠자리에 들 때면 내 양 옆에 누워 잠을 잤다. 그날도 역시 두 선임은 내 옆에 누웠다. 가끔 “교회에 가면 예쁜 여자들이 있냐?”며 묻기는 했지만 그날은 처음으로 “너는 왜 교회에 다니느냐?”라고 물었다. 아마도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도 고집스럽게 자기만의 신앙을 지키는 내가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그날은 꽤 늦게까지 두런두런 이야기꽃이 피었다. 어렸을 때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던 일부터, 학생부 시절 하나님을 만난 이야기, 교회 식구들 이야기, 내가 왜 신앙생활을 하는지 들려주었다. 그랬더니 두 선임이 “우리도 이번 주부터 같이 교회에 갈까?”하고 묻는 게 아닌가?


다음날 중대장님은 술이 깨셔서 나에 대한 일은 까맣게 잊으셨다. 덕분에 영창은 면했다. 하지만 그 주부터 우리 취사병들은 모두 근무복을 다려 입고, 구두를 닦아 신고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 후로 신앙이 있지만 두려워서 교회를 못 나가고 있던 여러 명의 후임 병사들도 함께 교회에 갈 수 있게 되었다.    

 

세상에는 유익한 것과 무익한 것, 해로운 것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에서 이것들을 구별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때로는 잘못 판단해서 유익한 것을 버리고 무익하거나 해로운 것을 취하기도 한다. 이런 일에 일체의 비결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태의 공동체에는 이런 지혜가 있었다. 물론 이 지혜는 예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왔다. 마태는 마 13:24-30의 “가라지의 비유”와 마 13:47-50의 “그물의 비유”를 통해 유익한 것과 무익한 것, 해로운 것을 고르는 지혜를 우리에게 전해준다.               




가라지의 비유     


가라지의 비유는 “천국은...”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하나님 나라에 관한 비유다. 그러니 분명 예수님의 가족이 살아야 할 삶의 방식에 관한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이 비유에서 천국은 밭에 좋은 씨를 뿌린 “사람”이다. 사람이 천국이니 이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라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가라지의 비유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살라고 말씀하시는 이야기이다.     


마 13:24-30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 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 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어떤 주인이 좋은 씨앗을 밭에 뿌렸다. 그런데 난 데 없이 가라지가 생겨났다. 그것도 이삭이 팰 때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꾼들이 난리가 났다. 그도 그럴 것이 가라지는 한 밭에서 한정된 양분을 빼앗으며 자라기 때문에 결실에 타격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스라엘 땅에는 “독보리”라는 종류의 가라지가 있는데, 그 모양이 밀이나 보리와 흡사하다. 자라는 동안에는 구별이 어렵고 이삭이 팰 때에야 구별이 가능하다. 그런 이유로 일꾼들이 오랫동안 잡초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이제야 잡초를 알아본 일꾼들은 마음이 급하다. 이제 막 결실하기 시작하는데, 저 가라지가 결실하는 알곡들의 영양을 좀먹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뽑을 결심을 하고 주인에게 물었다. “주인님, 뽑아버릴까요?” 그랬더니 주인께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셨다. “놔둬라! 그러다 알곡까지 다칠라.” 일꾼들에게는 알곡이 영양을 빼앗기는 것이 문제인데, 주인은 알곡의 안전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도무지 가라지를 뽑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 인생에도 수많은 가라지가 있다. 그 가라지는 사람일 수도 있고, 어떤 환경일 수도 있다. 우리는 계속 그 가라지를 뽑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하늘 아버지께서는 가라지를 뽑지 말라고 명령하신다. 가라지는 도무지 뽑는 것이 아니다. 거기엔 다 이유가 있다.     


가라지를 뽑지 않는 이유는 첫 번째로 구별이 안 되기 때문이다. 청년들과 농촌봉사활동을 가보면 가끔 논에 들어갈 때가 있다. 논에는 벼가 자라고 있다. 또한 잡초들이 자라고 있다. 그 잡초들 가운데 “피”라고 하는 것이 있다. 나는 농촌에서 자란 데다 할아버지께서 벼농사를 지으셨기 때문에 이 “피”를 잘 알고 있다. 사실 벼와 피는 구분이 잘 되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독보리처럼 이삭이 패어야나 구분이 잘 된다. 벼는 이삭이 패어 점점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지만, 피는 그렇지 않다. 태생이 뻣뻣하다. 하지만 이삭이 패기 전이라고 농부들이 피를 구별 못하는 것은 아니다. 겉으로 보기엔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잎 마디를 제쳐보면 잎 마디가 갈라지는 모습에 따라 벼와 피를 구별할 수 있다. 일단 구별이 되면 피를 제거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봉사하러 간 청년들과는 이 일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가르쳐줘도 잘 못하기 때문이다. 잎 마디 모양을 설명하고 피 제거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면 처음에는 곧잘 피를 가려낸다. 하지만 얼마 안 가서 수북이 쌓이는 벼를 보게 되고야 만다. 상당히 혼동되기 때문이다. 그만큼 곡식과 가라지의 구별은 어렵다. 가라지인 줄 알고 뽑다 보면 곡식인 경우가 태반이다.


우리 인생에 괴로움을 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모두 다 가라지는 아니다. 몇 년쯤 지난 뒤에 돌아보면 오히려 그 사람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경우 절대 그는 내게 가라지가 아니었다. 일과 환경도 마찬가지다. 내 기억에서 잘라내어 버리고 싶은 일들, 지금 나를 숨 막히게 하는 환경들이 모두 가라지인 것 같아 다 뽑아버리고 싶지만, 그게 가라지가 아닐 수도 있다. 오히려 그 일이, 그런 환경이 더욱 나를 알곡으로 만들어주는 밑거름일 수도 있다. 이 가라지 같은 사람, 일, 환경을 뽑아낸 후에 엄청난 후회를 할 수도 있다. 가라지는 우리가 쉽게 판단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도무지 가라지를 뽑지 않는 것이 좋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가라지를 뽑지 않는 두 번째 이유는 가라지를 뽑다가 우리의 인생까지 송두리째 뽑힐 수 있기 때문이다. 논에서 피를 제거할 때, 유의할 점은 “뽑지 않는다.”는 것이다. 피는 이미 벼 옆에 자라면서 그 뿌리를 벼와 함께 엉켜 자라고 있다. 그렇기에 아무 생각 없이 피를 뽑아버리면 그 주변의 벼들도 “쑥”하고 뽑혀버린다. 그래서 가라지는 뽑지 않고 줄기 끝을 꺾어서 제거한다. 물론 뿌리와 근원은 살려두는 것이다. 그마저 아깝다고 파내려다간 주변의 벼들이 온전하기를 기대할 수 없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인생은 매우 복잡하게 얽혀있다. 그렇기에 가라지를 발견하고 확신이 서더라도 뽑지 않는 것이 지혜롭다. 가령 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 중 가라지를 발견했다고 치자. 그 형제, 혹은 자매가 계속 문제를 일으키고 여러 사람을 실족케 하기에 우리 공동체에서 뽑아버리기로 했다. 쉽게 뽑아지겠는가? 보통은 쉽게 뽑아지지도 않을뿐더러, 교회가 한 개인에게 상처를 입힌다고 오히려 문제만 더 커질 뿐이다. 교회 안에는 분란이 일어나고 결국 많은 사람들이 실족하게 되고 만다. 이런 일은 실례를 들기가 민망해 그렇지, 지금 우리 주변 교회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현상들이다.


어디 교회만 그런가? 주변을 돌아보라. 아주 사소한 일, 치약을 어떻게 짜 놓는지 때문에 이혼한 부부들이 흔하다. 소위 성격차이 말이다. 저 사람의 저런 모습만 없으면 참 좋겠다며 그 모습을 뽑으려다 깨지는 가정들, 관계들, 공동체가 그렇게나 많다. 심지어 약간의 미용을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들도 있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인가?     


청년들을 상담하다 보면 직장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이들이 많이 있다. 그중에서도 으뜸은 관계의 문제이다. 물론 동급자나 하급자와의 관계도 있겠지만, 대부분 상급자와의 관계가 가장 심각하다.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면 그 상급자가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인격적으로도 모자라고 이기적이며 사악하기까지 하다. 그런 사람 밑에서 일을 하려니 도저히 더 이상 일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나는 청년들의 말을 믿는다. 그들의 말은 사실이다. 그 상급자는 분명 정상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직장을 옮겨야겠다고 말하는 것에는 대부분 반대한다. 왜냐하면 직장을 옮겨도 그런 상사는 꼭 하나씩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해결책으로는 꼭 이 직장에서 1년을 견디라고 말해준다. 물론 1년을 견디고 온 청년에게는 1년을 더 견뎌보라고 한다. 그렇게 3년까지 권고하지만, 만일 3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으면 그때는 직장을 옮겨도 좋다고 말해준다.     


서울에서 목회할 때, 우리 청년부에 자매가 하나 있었다. 밝고 예쁠 뿐만 아니라 중국어 실력도 뛰어나 무역회사에서 통역을 도맡아 하는 인재였다. 내게 상담을 요청했는데, 이야기를 듣고 보니 부장님 때문에 도저히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얼마나 다혈질이고 감정적인지 일하다가 이 자매를 여러 번 울렸다는 것이다. 그 부장님만 보면 가슴이 떨리고, 표정관리가 되지 않고 우울해 너무나 힘들다고 했다. 그래서 회사를 그만두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1년만 견뎌보라고 말해주었다. 함께 기도하면서 돕겠다고 했다. 이 자매는 나와 상담을 하면서 뿐만 아니라 자기의 소그룹에서도 계속 그 부장님을 험담했다. 하지만, 그렇게 비난하고 험담한 후에는 결국 자신이 사랑으로 감싸야함을 인정했다. 몇 주간 그런 상태는 계속되었다. 하지만 조금씩 나아졌고, 3개월쯤 후에는 기쁜 소식을 듣게 되었다. 함께 기도하며 나누다 보니 부장님을 이해하고 용서하게 되었고, 결국 자신의 태도를 바꾸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애써 미소를 짓고 상냥하게 대했는데, 부장님의 다혈질도 누그러지기 시작했고, 인정받고 사랑받는 분위기에서 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회 초년생들이 회사에 입사하면 대부분 이런 갈등을 한 번씩은 겪게 된다. 그러면 보통의 사람들은 갈등을 피해 다른 곳으로 일자리를 옮긴다. 그런데, 옮긴 곳에서 꼭 그런 갈등의 관계를 또 겪게 된다. 그러면서 “왜 내겐 이렇게 이상한 사람들만 꼬이는 걸까?”하며 괴로워한다. 몇 번을 그런 일을 당하면, 결국 다 포기하고 자신의 일을 하려고 한다. 여건이 되어 자신만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다 관계의 문제가 없을까? 그렇지 않다. 그런 곳에도 갈등의 문제는 늘 도사리고 있다. 어느 순간 내가 그렇게도 미워하고 욕하던 그 상사를 꼭 닮은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다.


가라지를 뽑으려고 하면 그때부터 우리의 인생은 굉장히 복잡해진다. 단순해질 것을 기대하고 뽑기 시작하지만, 얽히고설킨 문제들이 결국 우리의 인생을 곤란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래서 가라지는 도무지 뽑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인생에는 가라지가 있다. 하지만 그 가라지는 뽑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그렇다면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인가? 농부들에게 그냥 내버려 두는 일은 없다. 가라지 외에도 뽑아야 할 잡초들이 많고, 뿌려야 할 비료가 산더미 같다. 가라지는 내버려 두고 열심히 밭을 가꿔야 한다. 열심히 밭을 가꾸며 거름을 뿌리다 보면 분명 가라지도 자라겠지만, 곡식도 잘 자라게 된다. 가라지가 자라는 것에 관심을 갖다 보면 마음이 불편하겠지만, 가라지 말고 곡식을 보라. 풍성하게 자라 황금빛 들판을 춤추는 곡식들을 상상하면 기쁨이 넘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이 있다. 우리에게는 쓸모없는 가라지이지만 주인에게는 그나마도 쓸 떼가 있다. 가라지는 묶어 땔감으로 쓰이게 되는 것이다. 불태운 재는 밭에 거름으로 쓰인다. 가라지도 주인께는 남는 게 없이 활용된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하나님은 악도 선용하시는 하나님이시다.”라고 말했다.               




그물의 비유     


하나님께서는 가라지를 뽑지 말라고 하셨다. 그런데 이 비유의 짝인 그물의 비유를 보며 우리는 큰 혼란을 겪게 된다. 언제는 추수까지 기다리라고 하시고서는 이제 와서 즉시로 그물을 끌어내고 적극적으로 앉아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려내라고 하시는가? 아무리 봐도 이해하기가 어렵다.     


마 13:47-50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     


좋은 말은 반복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이다. 그래서 한 번 더 반복하려고 한다. 예수님의 천국 비유는 천국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천국이 무엇인지 알면 비유의 의미를 잘 알 수 있다. 이 비유는 천국이 그물이다. 천국이 사람이라면 하나님 아버지를 뜻하겠지만, 천국이 사물이니 이 비유는 조금 더 복잡해졌다. 그물의 비유에서는 그물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이 비유의 뜻을 아는데 가장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렇다면 과연 그물이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     


마 13:1-2 그날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서 있더니     


예수님께서 지금 말씀하시는 장소가 어디인가? 그렇다. 바닷가이다. 예수님은 바닷가에서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께서 바닷가에 서서 어부 출신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는 데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물론 다른 출신들도 있었겠지만 적어도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게네사렛(갈릴리와 같은 말임, 이렇게 쓰는 이유는 2부에서 밝히겠음)의 바닷가 사람들에게 이 그물이라는 물건은 상당히 친근한 것임에 틀림없다. 어촌마을에 그물은 그들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매일 그물질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날 그물에 무엇이 올라왔는지가 가장 큰 관심사였으며, 그물 안에는 그들의 희로애락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어떤 그물은 그들에게 수족과도 같았을 것이다. 그만큼 오랫동안 자연스럽게 함께했던 물건이 그물이다.


나는 한 때, 사진에 몰두했던 적이 있었다. 누군가 사진을 잘 찍으려면 슈퍼마켓에 갈 때도 카메라를 들고 다녀야 한다고 해서, 실제로 촬영용 스트랩을 사서 아예 손에 묶고 다녔었다. 그렇게 일 년을 넘게 했더니 정말 카메라 조작의 달인이 되었다. 여러 대회에 수상을 휩쓸고 다녔었다. 아마도 그 당시에는 나보다 더 카메라를 가까이에 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또한 나보다 더 사진을 많이 찍은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거의 잠자는 시간 빼고는 카메라를 달고 살았으니 말이다. 사실 잠자는 시간에도 손만 뻗으면 카메라를 들 수 있도록 가까이 두고 잠을 잤다. 그러고 보니 나도 못 말리는 사람이다. 어쨌든 그랬더니 나중엔 카메라를 안 들고 있으면 손이 하나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카메라에 찍힌 사진들에 나의 삶과 감정들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제자들과 그곳에 모인 바닷가 사람들에게 그물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물의 비유를 들려주셨다. 바닷가 사람들 자신의 인생, 삶, 내면을 표현하려면 이보다 더 적당한 비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물은 바로 그들 자신이었다. 그러므로 그물의 비유는 예수님 앞에 모인 제자들 자신과 연결시키면 아주 간단히 해석된다.


우리는 온종일 그물질을 한다. 그리고 그 그물에는 매번 한가득 무언가가 올라온다. 오늘 하루의 삶을 돌아보라. 적극적으로 오늘 하루의 삶을 끌어내 놓고 찬찬히 앉아서 들여다보라. 온갖 것들이 가득 있을 것이다. 잘한 일, 좋은 일, 나쁜 일, 괴로운 일, 사랑, 평안, 미움, 시기, 질투... 이런 것들로 가득 한 나의 내면에서 좋은 것은 다시 주워 담고 못된 것은 미련 없이 내버리라. 이렇게 하면 내 인생이 천국이 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가족들이 사는 방식이다.     


몇 년 전 소그룹 성경공부를 인도하면서 알게 된 자매가 있다. 부모님께서 신앙생활을 하시다가 교회에 나오지 않으시는데, 딸이 교회에 가는 것을 많이 반대하신다는 것이었다. 사실 우리 청년부에 이런 자매들이 여럿 있었다. 대부분 청년예배에 강단에서 춤을 추는 자매들이었는데, 여러 자매가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심지어 주일에는 교회에 못 가게 하려고 방문을 밖에서 잠그고 자기 딸을 가두는 부모도 있었다. 아마 그분들이 보시기에 교회는 모두 사이비 종교같이 보이셨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부모님들은 예수님을 전혀 모르는 분들이시니 그렇다손 치더라도 예수를 믿던 부모님의 반대는 견디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매번 교회를 다녀오면 부모님과 언쟁이 있고 다툼이 생긴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집 앞에서 대적 기도를 하고 들어간다고 했다. 부모님을 미혹하는 악한 영에게 대적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전혀 다른 해결책을 알려주었다. 도무지 대적 기도를 하지 말라고 했다. 오히려 하나님께 부탁을 드리라고 했다. 지금 집에 올라가면 분명 부모님께서 화를 내실 텐데, 부모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셔도 “네”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또 어떤 모습, 어떤 표정을 짓더라도 부모님을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고 말이다. 그렇게 하겠노라고 나와 굳게 약속을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결과가 어땠을까? 물론 결과는 놀라웠다. 그다음 주에 얼굴이 상기되어 모임에 찾아왔다. 내가 가르쳐준 대로 기도하고 올라갔더니 신기하게도 그날 부모님과 다투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라지의 비유를 보면 가라지의 원인을 원수에게로 돌리는 주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다. 가라지를 원수가 뿌렸다면, 원수가 그렇게 한 목적이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가라지에 집중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가라지만 보며 좌절하고 뽑아버리려고 애쓰다 삶까지 송두리째 뽑히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마땅히 버려야 할 자신의 죄와 허물과 어둠은 생각도 못한 채, 삶을 지옥 같은 절망으로 채워버리도록 하려는 것이 그들의 계획이다.


대학원 시절 논문을 악마에 관한 주제로 쓰면서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악한 것들에 집중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께 집중하면 저절로 어둠은 떠나게 된다는 진리를 알게 되었다. 그런 뜻에서 매일 내 삶을 천국으로 조율하는 일은 정말 중요한 일이다. 악한 것이 떠나게 하려고 안간힘을 쓰다가는 결국 자신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외면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내 안에 좋은 것을 채우려는 시도를 계속한다면 결국 악하고 더럽고 죄악 된 것들이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만다. 부모님을 향해 대적하는 기도를 하게 되면 결국 부모님과 대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부모님을 사랑하게 되면 부모님께 사랑받는 것이 당연하다. 놀라운 일은 그렇게 시작된다. 지금 그 자매의 어머니는 내가 섬기는 교구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계신다. 심지어 암투병의 고통스러운 시간을 예수님과 함께 뛰어넘으셨다. 그리고 두 모녀는 이 고통까지도 가라지가 아닌 감사라는 이름의 좋은 물고기로 그들의 삶에 담아놓았다.               




가라지와 그물     


우리 인생에는 수많은 가라지가 있다. 그것은 성경에 있는 것처럼 사람일 수도 있고, 사건일 수도 있고, 환경일 수도 있다. 이러한 가라지의 공통점은 외부적인 요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 외부적인 요인들에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다. 이것들을 바꾸거나 없애버리려고, 혹은 좋은 것으로 얻으려고 애쓰고 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얘들아, 너무 그런 일에 애쓰지 마라.”하고 말씀하신다. 오히려 “네 인생을 돌아보고 정리하는 게 좋단다.”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늘 거꾸로 한다. 어떻게든 외부적인 요인을 바꾸려고 하면서, 자신은 합리화한다. 온종일 친 그물을 보며 좋은 것은 다 버리고, 나쁜 것들만 가득 담아둔다. 사랑받은 일, 배려받은 일, 감사할 일들은 모두 내버리고, 남이 내게 섭섭하게 한 일, 미워하는 마음, 시기하는 마음, 욕심... 이런 것들은 꼭 붙들어 둔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라. 그것이야말로 지옥이다. 지옥은 꼭 죽어서 가는 스올(땅 밑)의 불구덩이만이 아니다. 불만족하고 미워하고 원망하는 것으로 가득한 인생이야말로 지옥이 아닌가? 천국 또한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삶의 방식이 예수님의 가족들이 사는 방식이라면 그야말로 천국이다. 내 외부의 조건들을 바꾸려고 하기보다는 늘 자신의 안을 돌아보는 사람. 자신의 삶을 천국으로 채워 가라지가 가득한 밭도 정성스럽게 가꿀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의 인생은 천국이다. 가라지가 자라지만 알곡도 자란다. 내 마음만 천국이면 곧 내 밭에도 황금물결의 풍년이 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가족들은 가라지는 내버려 두고 자신의 그물을 천국으로 채워, 다시금 주님께서 맡겨주신 우리의 밭을 풍요롭게 하는 사람들이다.                         



롬 5:1-6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한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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