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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태현 Jun 26. 2021

예수님의 가족 05
눈물로 씨를 뿌려라

예수님의 가족 #05



나의 연애기


스물여덟 살,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 사역하던 교회의 청년이었다. 처음 전도사로 사역을 시작했을 때, 중창단을 하던 자매들과 문제가 생겼다. 나는 중학시절부터 대학시절까지 합창단 활동을 했었다. 그런 이유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이야기만 해달라고 말해줬는데, 아마도 그런 말 자체가 그 자매들에게 언짢았던 모양이다. 사소한 일 몇 가지로 시비를 걸어 나를 괴롭혔다. 사역자이니 그에 대한 예의를 기대했는데, 그런 조촐한 기대도 여지없이 무너졌다. 그렇게 몇 가지 사건이 지나가고 또,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그들과 함께 청년수련회를 다녀왔다. 강원도 태백에서 열린 “해비타트-사랑의 집짓기”봉사였다. 모두 땀을 흘리며 열심히 봉사했다. 일과가 끝나면 작은 교회에서 숙박을 했다. 마지막 날 저녁 모두 돌아가며 서로에 대해 이야기하고 기도해주는 시간을 가졌다. 한 사람씩 돌아가며 만나는데, 한 예쁜 자매 차례가 되었다.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대뜸 “전도사님 정말 죄송했어요.”라는 말로 운을 떼었다. 난 처음에 이 자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한 참을 듣다 보니 자기들이 나를 일부러 괴롭혔던 것들을 고백하며 사과를 하는 것이었다. 여러 자매들이 있었지만 공식적으로 나에게 사과를 했던 사람은 이 자매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나이도 어린 자매가 진중했다. 사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호감이 있어, 몇 번이나 함께 밥을 먹자고 했었는데, 번번이 퇴짜를 놓은 자매였다. 그런데 얼굴만 예쁜 게 아니라 속 사람도 “된 사람”이었다. 그 이후로 이 자매를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


얼마 후 고백을 했다. 좋아하게 되었다고. 진지하게 교제해도 되겠느냐고 말이다. 보통은 그런 이야기를 사역자들이 하면, 상처 받지 않도록 “며칠만 기도할 시간을 달라.”라고 말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이 자매는 일언지하에 거절을 했다. “전도사님은 제 스타일이 아니에요.”하고 말이다. 사실 내가 자기 스타일인 여자가 몇이나 있겠는가? 뚱뚱한 데다가 패션은 늘 아저씨 패션이고, 가난하고 능력 없는 남자를 말이다. 사실 나는 아내를 만나고 지금은 정말 엄청난 매력남이 되었다. 그 시절에 비하면 말이다.


하지만 내게는 장점이 하나 있다. 어지간해서는 포기를 잘 모른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어렸을 때는 정말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꼭 하고야 마는 성격이었다. 무려 1년 6개월을 따라다녔다. 그렇다고 스토커처럼 그녀를 괴롭게 한 건 아니다. 가끔 몇 장씩 손으로 편지를 써서 우편으로 보내고, 아침마다 음악으로 전화 알람 선물을 했다. 거리를 걷다가 예쁜 화분이나 꽃들이 있으면 그녀의 집 계단 아래에 숨겨놓고 문자를 보냈다. 특별히 전화를 하거나, 만나자고 하지 않았다. 당장 나랑 연애하자고 하지도 않았다. 그냥 그렇게 나 혼자 짝사랑, 연애를 했다.


2001년 8월 20일 월요일. 난 그날을 잊지 못한다. 내 생애 최고의 날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오후 4시쯤 “언제쯤 마음을 열어줄래요?”라고 문자를 보냈는데, 잠시 후 그녀에게서 문자가 하나 날아왔다. “이제부터 조금씩 마음을 열어보려고요.”하고 말이다. 영화 같은 데 보면 남자 주인공이 신이 나서 춤을 추거나 펄쩍펄쩍 뛴다. 솔직히 말해 나는 거의 괴성을 지르면서 한 십분 간을 뛰어다녔다. 그렇게 우리는 연애를 시작했고, 한 달이 지나 우리의 첫 번째 기념일이 돌아왔다. 그녀의 생일이었다.


처음 맞는 기념일이니만큼 최선을 다해 준비했다. 미리 그녀가 근무하는 유치원으로 꽃 배달을 시켜놓았다. 그녀가 좋아하는 캐릭터 브랜드의 잠옷을 한 벌 구입했고, 예쁜 생일 케이크도 준비했다. 계획은 이랬다. 유치원에 들러 그녀를 차에 태우고 근처 시화방조제로 달린다. 방조제 중간쯤에서 케이크로 생일 축하를 한 다음, 대부도 초입에 있는 커피숍에서 차를 마신 후 돌아오는 계획이었다. 계획은 완벽했다. 심지어 방조제 바람에 촛불이 꺼질 것을 대비해, 생일 양초 대신 반짝이며 타들어가는 폭죽을 준비했다.


일은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이미 꽃다발이 배달되어 생일을 알게 된 동료 선생님들의 배웅을 받으며 그녀가 밖으로 나왔다. 나는 12인승 교회 승합차에 그녀를 태우고 시화방조제로 달려갔다. 마침 썰물이라 방조제 아래 작은 백사장이 생겨있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방조제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고는 불을 붙이려고 케이크를 꺼냈다. 그런데 아뿔싸! 전도사에게 없는 것 한 가지! 라이터! 그렇다. 전도사들에겐 라이터가 없다. 나는 왜 그 사실을 몰랐을까? 케이크 가게에서 초를 안 받아오는 바람에 성냥이 들어있지 않았다. 당황해하며 방법을 궁리하다가, 자동차의 서랍에 굴러다니는 전기라이터 생각이 났다. 그렇다 자동차에는 원래 전기라이터가 있다. 문제는 ‘그 라이터로 폭죽에 불을 붙일 수 있는가?’였지만, 그래도 시도를 해보기로 했다.


그녀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한 뒤 폭죽이 꽂힌 케이크를 들고 자동차 있는 곳으로 올라갔다. 라이터를 찾아서는 불을 붙였다. 입으로 호호 부니 폭죽에 불이 붙었다. 꽂혀 있는 폭죽에 불을 다 붙이고서는 재빨리 방조제를 내려왔다. 혹시 누군가 나처럼 폭죽을 활용한 생일 케이크를 선물하려 한다면 나는 결사반대다. 생각보다 폭죽이 빨리 꺼진다. 폭죽은 내가 방조제를 중간쯤 내려왔을 때, 이미 다 꺼져버렸다. 게다가 폭죽에서 시커먼 재가 떨어져 케이크는 전혀 먹을 수 없게 되었고, 보기 흉하게 되어버렸다. 땀을 뻘뻘 흘리며 뒤뚱뒤뚱 내려온 남자 친구, 게다가 엉망이 되어버린 생일 케이크. 그녀는 얼굴이 빨개지도록 웃었고, 나는 그녀보다 더 얼굴이 빨개져서 손톱으로 살짝 찌르면 볼에서 피가 나올 것만 같았다. 얼마나 얼굴이 달아오르고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그로부터 1년 3개월 뒤 우리는 결혼을 했다. 우여곡절이 없지는 않았지만, 한 가정을 이루고 잘 살고 있다. 결혼한 후 3년쯤 흐른 뒤, 우연히 나는 그 시절 이야기를 아내에게 이야기했다. 그때, 그 생일 축하는 정말 부끄러운 기억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아내의 대답이 뜻밖이었다. 아내는 “난 기분이 나쁘지 않았는데. 사랑받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 참 좋았어요.”하고 말해주었다.     


사람에게 가장 좋은 기억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사랑받은 기억일 것이다. 누군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 만일 누군가 우리의 가능성을 알아봐 주고 신뢰해준다면 우리는 어떤 어려움이라도 극복해낼 수 있을 것이다. 마태는 예수님으로부터 신뢰받은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그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믿어주시며 자기에게 원하신 삶을 살기 위해 애를 썼다. 그 결과물이 바로 마태복음이다. 마태는 예수님의 가족 이야기를 시작하며 제일 먼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적어놓았다. 이 비유에는 예수님의 가족 된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하며, 아름다운 결실을 맺는 삶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일체의 지혜가 들어 있다.               




씨 뿌리는 사람과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     


마 13:3-9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천국에 관한 비유가 아니다. 이 비유 안에는 천국이라는 말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 비유는 천국이 어떠한지 알려주는 비유가 아니며, 씨 뿌리는 사람이 하나님 아버지는 더더욱 아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씨를 뿌리는 자는 누굴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비유에 관해 설명을 해주신다.     


마 13:18-23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 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의 해설을 보고는 씨 뿌리는 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오직 네 가지 땅에 대한 해설만 있다. 그렇다면 이 네 가지 땅은 누구인가? 바로 천국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다. 이건 참 쉽다. 천국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 네 부류인데, 어떤 사람들은 듣고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어떤 사람들은 즉시 기쁨으로 받는다. 하지만 어려움이 생기면 말씀대로 살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어려움도 잘 이겨내지만, 결국 자기 욕심을 넘어서지 못하여 결실을 맺지 못한다. 그러나 그중에서 결실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은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풍성한 결실을 맺는다. 그러니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결단과 태도에 따라 열매를 맺기도 하고 맺지 못하기도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듣는 사람들을 위해 이 비유를 베푸셨을까? 아니다. 어차피 네 가지 땅은 정해져 있다. 이 말씀이 돌을 골라내고 가시덤불을 뽑아내고 밭을 기경해 옥토로 만들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원래 그렇다는 말이다.


이스라엘 땅에서 농사를 짓는 법을 알면 우리는 금방 이 비유를 이해할 수 있다. 간혹 어떤 이들은 땅을 옥토로 만들어 백배의 결실을 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하기도 하는데,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의 농토 상황을 안다면 전혀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이스라엘은 농토에 석회암 암반지대가 많다. 그냥 돌밭이 아니고 바위 밭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좋은 농토 같지만 손으로 조금만 파보면 금방 바위가 나온다. 이 바위는 암반이라 사람이 골라낼 수 없는 돌이다. 그러니 돌밭을 기경할 수 없는 노릇이다. 전에 말했지만 나무도 여기저기에 있다. 이 나무들도 다 쓸모가 있어서 심어 놓은 것들이다. 그곳에 밀알이 튀어 들어갔다고 나무를 뽑아버리면 사람은 어디서 쉰단 말인가? 게다가 사람이 걸어 다니며 씨앗을 뿌리는 흩뿌리기 농법을 사용하기 때문에 자주 밟는 곳은 딱딱한 길이 되어버린다. 이곳을 기경하면 사람은 어디로 다니며 농사를 짓는가 말이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길이나 돌밭, 가시나무 아래로 튀어 들어가는 씨앗은 포기할 수밖에 없다.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이 비유는 네 가지 땅을 위한 비유가 아니라 천국복음을 듣는 사람들을 위한 비유로 해석할 수 있다.


이 비유를 “씨 뿌리는 사람을 위한 설명서”로 놓고 보면, 지금은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사람”이시다. 왜냐하면 천국 말씀을 밭에 뿌리고 계시니 말이다. 그러나 조만간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 중에 “씨 뿌리는 사람”이 생겨날 것이다. 물론 마태는 이 말씀을 자기에게 들려주시는 사역 설명서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도 “씨 뿌리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고 보면 이 비유는 제자들이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비유였다. 제자들은 그 당시 이 말씀을 못 알아들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아직 “씨 뿌리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 13:10-17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이 비유의 말씀은 오직 예수님의 가족 된 이들, 예수님의 제자들, 씨 뿌리는 사람들에게만 깨달아지는 신비한 말씀이다. 말씀을 듣고 그냥 흩어져버리는 군중들은 결코 이 비유들을 이해할 수 없다. 오직 예수님을 따라나선 제자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예수님의 가족들, 천국의 복음을 전하는 씨 뿌리는 사람들만이 이 비유의 의미를 온전히 알 수 있다. 이것은 정말 복음 중의 복음이다. 왜냐하면 많은 선지자와 의인들이 보고 들으려 했지만, 결코 보지도 듣지도 얻을 수 없었던 삶이기 때문이다.     


이 비유를 해설해 보면 이렇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얘들아, 예수의 가족이 된다는 것은 마치 씨를 뿌리는 사람이 되는 것과 같단다. 밭에 나가 씨를 뿌려보면 때론 길가에 떨어지는 경우가 있지 않니? 너희가 나의 가족으로 살면서 천국의 복음을 전하다 보면 이런 경우가 많을 거야. 뿌리자마자 없어지는 경우 말이야. 애써 뿌렸는데 들은 척도 안 하는 사람들을 보며 크게 실망하겠지? 또 이런 경우도 있을 거야. 돌밭에 떨어지는 경우 말이야. 뿌려놓았더니 싹은 났는데, 눈물의 회개가 없어서 조금만 어려우면 포기하는 경우 말이야. 그런 이들을 보면서도 실망하겠지? 게다가 이런 경우도 있을 거야. 마치 가시나무에 뿌려진 것 같은 경우이지. 잘 자라서 잎이 무성한 사람들 말이야. 그래서 열매를 기대했는데, 나무에 양분을 따 빼앗겨 버린 것처럼, 결국 자신의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자기의 길로 가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보면 얼마나 실망이 되겠니? 하지만 그럴 때에도 결코 실망하지 마라. 반드시 좋은 땅과 같은 사람들이 있으니 말이야. 그런 사람들은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열매를 맺는단다. 그러니 실망하지 말고 뿌려야 하는 거야. 예수의 가족이라면, 너희가 내 제자라면, 울더라도 뿌려야 한단다. 눈물을 흘리며 뿌리는 사람들에게는 백배의 열매가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야.”     


처음 안수를 받고 서울에서 목회를 할 때였다. 토요일 저녁에 청년모임이 있었는데, 처음 부임하여 나가 보니 4명이 모였다. 보통은 7명이 모이는데 사정들이 있어 이렇게 적게 모였다고 했다. 예배를 드리고 교제를 나누는데 상당히 불량한 청년이 하나 있었다. K형제였다. 군대에 갔다 와서 복학을 기다리는 학생이었는데, 부모님께서는 채소장사를 하셨다. 처음에는 태도가 상당히 불량했는데 나의 성장과정을 간증하는 동안 태도가 바뀌었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이 청년의 상황이 나랑 참 비슷했다. 알코올 중독인 아버지를 대신해 고생하시는 어머니, 학교에 복학할지조차 불투명한 가정형편, 이런 가정이 부담스러워 가출한 형... K형제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그 형제 안에 있는 불안과 분노를 보니 나의 그것과 닮아 함께 울 수밖에 없었다. K형제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청년들이 아픈 가정사를 가지고 있었다. 이혼, 상처, 폭력에 노출된 그들의 삶에 해답은 오직 신앙뿐이었다.


주일에는 청년회장인 M자매를 교회 계단에서 만났는데 술 냄새가 심하게 났다. 물론 다른 사람은 눈치를 못 챘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특히 알코올 중독인 아버지 때문에 고통스러운 청소년기를 보냈기에 술 냄새에는 전문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놓고 “술 마시지 마라!”라고 할 수도 없고, 오죽하면 저 자매가 저렇게 술을 마시고도 교회에 올까 싶어 “M자매, 그렇게 살면 힘들어.”하고 조용히 말해주었다. 나중에 M자매는 “도대체 이 목사가 뭘 안다고 나한테 이렇게 말하는 거야?”하고 생각하며 나를 미워했었다고 고백했다. 내가 생각했던 대로 이 자매는 힘겨운 삶을 살고 있었다. 이혼한 부모님, 알코올 중독인 아버지, 가출한 여동생, 소아 당뇨를 앓고 있는 남동생... 가족을 부양해야 하기에 아르바이트를 하며 근근이 살고 있었는데, 감당이 되지 않아 토요일만 되면 클럽에 가서 술을 진탕 마시며 놀곤 했었다는 것이다.


그런 친구들과 함께 새벽에 모여 공부를 시작했다. 무려 8주 동안 매일 새벽에 모여 함께 책을 읽고, 삶을 나누고, 기도했다. 아내가 준비해 준 빵과 시리얼, 우유 등으로 아침을 함께 먹고 각자 학교와 직장으로 흩어졌다. 그 8주 동안 기적이 일어났다. 집을 나갔던 K형제의 형인 J형제가 집으로 돌아왔다. M자매의 여동생도 집으로 돌아왔다. K형제와 J형제는 기쁜 마음으로 채소가게를 돕기 시작했고, 기울어 가던 가세가 회복되면서 부모님은 미국으로 취업을 하셨다. 더 기쁜 소식은 미국으로 가신 부모님께서 교회에 등록하셨고, 아버지가 술을 끊었다는 것이었다. M자매는 이혼했던 어머니가 근처로 이사를 오셔서 도움이 필요한 막내 남동생을 돌보기 시작했고, M자매는 다시 대학에 편입해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J형제는 교회로 돌아와 찬양인도 사역을 시작했고, 취업해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청년들의 태도와 삶의 자세가 바뀌니 삶 자체가 바뀌기 시작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청년들은 부흥하기 시작했고 조금씩 교회 안에서 청년들의 움직이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교회 안에 청년들이 들썩이니 어른들도 상당히 좋아하셨다. 그럴 때쯤 큰 문제가 하나 생겼다.


청년들이 부흥하면서 여러 개의 소그룹이 생겨났다. 소그룹마다 청년리더들을 세웠는데 청년리더 중에 한 형제가 두 명의 자매와 삼각관계의 연애를 했던 것이다. 참 신뢰하고 사랑했는데 그 형제가 그렇게 우유부단하게 자매들에게 상처를 주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괴로웠다. 하루는 새벽기도회에 나가 하나님께 떼를 썼다. “청년들이 한 참 부흥하고 있는데, 이런 문제로 상처 입을 청년들을 어떻게 합니까? 그동안 이 친구를 어떻게 양육하고 세웠는데 이 정도 밖에는 안 되는 겁니까?” 처음에는 점잖게 시작했는데, 그 형제에 대한 섭섭한 마음이 들면서 기도는 점점 항변하는 조로 바뀌어 갔다. 한 참을 그렇게 기도하다가 더 이상 힘이 빠져 고개만 숙이고 앉아 있는데, 마음속에 조용히 음성이 들려왔다. “네 열매냐?” 그 음성이 들리니 부끄러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네 열매냐? 내 열 매지. 내 열매인데 네가 왜 분노하고 있니?” 아마도 나는 그 열매가 내 열매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계획대로 만들어 가시는데, 내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고 두려워하고 분노하며 하나님께 떼를 쓰고 있었으니, 부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것은 열매가 아니었다. 열매는 오직 하나님의 몫이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사랑을 원하셨다. 오직 사랑으로 씨앗을 뿌리고 사랑으로 가꾸는 일이 내게 맡겨진 사명이었다. 나는 오직 그들을 사랑해 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마 13: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짝을 이루는 것은 바로 이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의 비유”이다. 이 비유는 참으로 뜻을 알기 어려운 비유 중 하나다. 이 비유 하나만 보면 전혀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 앞에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보고,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연결해 보면 그 뜻이 명쾌해진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하고 물으신다. 제자들의 대답이 주목할 만하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그러하오이다.”하고 대답한다. 알아들었다는 이야기다. 이 말은 “이제 씨 뿌리는 사람의 마음을 안다.”는 이야기이며, “예수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라는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가족이며 씨 뿌리는 제자들은 “새것”과 “옛것”을 마치 예수님처럼 꺼내어 사람들에게 베풀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새것은 무엇이며 옛것은 무엇인가?


전통적으로 새것은 새 언약의 복음을 의미하며, 옛것은 율법의 말씀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한다. 새것은 새롭게 지금 깨닫고 있는 은혜, 옛것은 전에 내게 베푸셨던 감사할 만한 은혜들이라고 말이다. 사실 이 이야기는 내가 사역하는 교구의 한 리더가 묵상한 내용인데, 꽤나 맞는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섬겨야 할 사람들, 복음을 베풀고 양육해야 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들을 간증할 때, 우리의 지난 은혜의 기억과 새롭게 받고 있는 은혜의 체험들은 참 중요한 양식이 된다. 예수님의 가족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옛 곡식과 새 곡식이 풍성하다. 때를 따라 필요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곡식을 내어 주는 예수님의 가족들은 당연히 주인이신 예수님의 대리인들이다. 이것을 아는 것이야말로 예수님의 가족의 필수조건이며 씨 뿌리는 천국의 서기관이 되는 길이다.          



     

너의 봄날엔 눈물로 씨를 뿌려라     


나는 참 모자란 사역자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전에는 더욱 그랬다. 사역하던 교회에서 한 청년 회장과 관계의 문제가 있었다. 진학과 취업 등 여러 가지 일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자매였는데, 구역회를 준비하며 청년부 결산을 해야 했다. 구역회 자료를 만드는 중 계속 청년부 결산에 실수가 있었다. 구역회가 있기 전날까지 실수는 계속되었다. 그런 이유로 언쟁이 생겼다. 나는 나대로 심기가 불편했지만, 그 자매는 상당히 상처를 받은 모양이었다. 일이 거기서 끝났다면 좋았을 것인데, 이 일은 그 자매의 부모님과 친구들에게까지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내게 참 잘해주셨던 어머니 권사님은 그 일로 많이 섭섭해하셨고, 그 친구들은 그 이후로 나를 투명인간으로 취급했다. 참으로 괴로운 일이었다. 두세 명이 한 사람을 맘먹고 괴롭히면 금방 지옥을 맛보게 된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너무 화가 나고 자존심이 상해 “하나님, 저 친구들을 혼내주세요!”하고 기도할 지경에 이르렀다.


얼마 후 지방의 청년들이 연합하는 큰 수련회가 있었다. 나는 그 수련회의 찬양집회를 맡았고, 그 자매는 수련회의 집행위원을 맡았다. 한 교회의 전도사와 청년회장이 다투고 있다는 것을 들키기 싫어 사람들 앞에서는 친근한 체하며 수련회를 진행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일을 책망하셨다.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책망하시는 음성이 계속 들렸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어른스럽지 못한 지를 깨닫게 되었다.


첫날 저녁 집회를 시작하기 전에 사과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찬양을 시작하기 전에 사람들 앞에서 고백을 했다.


“사실 저는 지금 찬양을 인도할 만한 상태가 못 됩니다. 얼마 전까지 내 안에는 미워하는 마음이 가득했고, 마땅히 사랑하고 품어주어야 할 한 사람을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내 잘못을 시인하기 싫었고, 나는 잘못이 없다고 우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말해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00 자매 미안해. 내가 어른스럽지 못했어.”


그 말이 끝나자, 그 자매가 뒤에 서 있다가 앞으로 걸어 나왔고, 눈물을 흘리며 나를 안아주었다. 그러고는 내게 “전도사님 마음 아프게 해 드려 죄송해요.”하고 사과를 했다. 물론 그 이후로 나는 마음껏 찬양할 수 있었고, 집회는 뜨거웠다. 심지어 집회를 통해 비전을 발견하고 환상을 보게 된 청년들도 있었다. 마지막 날은 밤새도록 찬양을 했고, 우리는 새벽이 밝기까지 뛰어다녔다.          


운전을 하다 내 앞에서 갑자기 신호등이 바뀌면 참 난감하다. 정말 오래 기다려야 한다. 다른 신호등에 초록불이 다 들어오고 나서야 내 신호에 초록불이 들어온다. 내가 가는 길에서 만큼은 모든 신호등이 초록불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아예 사거리에 초록 불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정말 그러면 좋겠는가? 아니다 그것은 혼돈이요 심각한 괴로움일 것이다. 초록불은 한길에 한 번씩 돌아가며 들어오는 것이 가장 좋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인생의 네 번 중 세 번은 실패와 절망, 괴로운 일들이다. 그렇지만 기대하시라! 초록불은 반드시 들어온다. 이미 세 번의 시도가 실패했더라도 성공하는 한 번이 돌아온다. 그때는 예수님의 약속대로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열매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울더라도 뿌려야 한다. 아니 우리의 봄날에, 우리가 아직 씨를 뿌릴 수 있을 때, 눈물로 씨를 뿌려야 한다.     


우리의 인생에는 얼마나 많은 어려움들이 있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 많은 어려움에 굴복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가족이 아니다. 절망에 넘어지는 것도, 의기소침하여 자신을 상처 주는 일도, 심지어 분노에 삼키우는 것도 예수님의 가족으로서 마땅하지 않다. 오직 예수님의 가족이라면 울더라도 뿌려야 한다. 그렇게 할 수 없는 순간에도, 실패를 눈앞에 뻔히 보더라도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씨앗을 뿌려야 한다. 그러면 반드시 예수께서 계획하신 때에, 그분이 내게 계획하신 방법대로 백배의 열매를 거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너의 봄날엔 눈물로 씨를 뿌려라!”          


시 126:5-6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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