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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태현 Aug 05. 2017

마이너리티 리포트 01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마이너리티 리포트 #01



창 16:7-14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은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일등만 기억하는 세상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유행어가 있었다. 한 개그맨이 샐러리맨 복장을 하고 나와 술에 취한 연기를 하며 연발하는 말이었다. “국가가 나한테 해 준 게 뭐가 있냐?”하고 말하면서 원망스럽게 외쳐대는 모습을 보며 웃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 말이 웃을 말은 아니다. 정말 세상은 일등만 기억하니 말이다. 요즘은 올림픽에서 선수들이 얻은 은메달 동메달도 어느 정도 귀하게 여기는 분위기이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은메달과 동메달을 얻은 선수들은 실패한 사람처럼 취급되었다. 사실 아직도 금메달 수로 국가의 순위를 매기는 이해 못 할 계산법이 당연한 듯 받아들여지고 있다. 아무리 체력이 국력이라지만, 그렇더라도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덕분에 똑같이 수고했어도 금메달을 얻은 선수들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어깨를 펴고 입국하지만 메달을 따지 못한 선수들은 고개를 숙이고 입국장을 조용히 빠져나와야 한다. 모두에게 같은 격려와 박수가 있으면 좋으련만, 세상이 그렇다. 무조건 이기는 것이 선이고 지는 것은 악하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어려서부터 동화 “토끼와 거북이”를 들으며 “어쨌든 이겨야 한다.”라고 배웠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내면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일등 지상주의”는 쉽사리 사라지기 어렵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모두가 일등이 될 수 없다는 데 있다. 공동체 안에서는 언제나 일등보다는 일등이 아닌 사람이 다수이다. 그러니 일등이 되어야만 기억되고, 일등이 되어야만 만족스러운 세상에서는 꽤나 많은 사람들이 불행할 수밖에 없다. 물론 교회 안에서도 그렇다. 교회에서 주로 간증을 하는 사람들은 “실패했다가 성공한 사람” 즉, “꼴찌였다가 일등이 된 사람들”이다. 교회 안에서도 일등만 박수를 받고, 주로 일등의 성공담이 은혜로운 간증이 된다. 그러다 보니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자신이 초라해져 보이는 때가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까? 하나님께서는 과연 일등만 좋아하실까? 하나님께서도 일등의 기도만 들어주시고 꼴등의 기도는 외면하실까? 우리를 일등으로 만들려고 안달이 난 학부모 같은 하나님이실까?     


성경은 이 질문에 “아니!”라고 대답한다. 꼭 일등이 아니라도 사랑하시고, 인정해 주시고, 그의 기도를 들어주신다. 그런 예는 성경에 많이 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오히려 일등이 아닌 꼴등을 들어 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만날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은 일종의 “마이너리티 리포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갈렙, 룻, 다윗,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 모두 다 소외당한 소수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에 주인공들이 된다. 아브라함은 자녀가 없이 타향을 유랑하는 유목민이었고, 이삭은 이루어놓은 성과물마다 빼앗기는 연약한 사람이었다. 야곱은 형을 피해 도망치는 도망자였고, 요셉은 형제가 팔아넘긴 노예였다.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천대받는 그나스사람 이방인이었고, 룻은 남편을 여읜 이방 여인이었다. 다윗은 아버지에게도 홀대받았던 아들이었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지배당하는 식민지인들이었다. 심지어 우리 예수님도 초라한 마구간 출신이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 받은 놀라운 사실을 보라!     


이뿐만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심지어 성경의 주연들이 아닌 조연들에게까지 세심하게 당신의 손길을 더하셨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사라의 여종 “하갈”이다.          


오늘 본문은 어떤 면에서는 참 이해하기 어렵다. 우리가 알기로 하갈은 약속의 딸이 아니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이스라엘이 아닌 이집트 여인이었고 약속을 받은 자유로운 여인이 아니라 유업을 받을 수 없는 종이었다. 심지어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여종의 아들을 내어 쫓으라’라고 까지 말하며 하갈을 천대한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통하여 그녀를 만나 주시고 약속까지 주셨다. 약속의 딸도 아니고 한낱 종인 하갈을, 더군다나 이방인인 이 여인을 하나님께서 만나주시고 그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는 사실은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 그것도 약속의 여주인인 사라보다 먼저 하나님을 만난 여인이 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이상하다. 그래서 나는 이 구절을 읽다가 하갈이라는 여인이 궁금해졌다. 어째서 하갈은 이방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열국의 어머니인 사라보다 먼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을까?               




사라의 여종 하갈


하갈은 이집트에서 태어난 여인이었다. 그런데 어찌어찌하여 히브리 사람의 노예가 되었다. 어찌 된 일로 세계 최강대국의 시민이 히브리인의 노예가 되었을지 궁금하다. 모세처럼 무슨 죄를 지어서 가나안 땅으로 도망쳤다가 아브라함의 은혜를 입었던 것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 궁금하지 않은가?     


물론 성경은 이 질문에는 아무런 답도 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성경을 읽다 보면 우리는 하갈의 신변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16장 1절을 보면 하갈은 아브라함의 종이 아니라 사라의 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창 16:1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그에게” 한 여종이 있다는 말은 바로 사라에게 한 여종이 있다는 말이다. 히브리어 원전에는 “그녀가 가지고 있다.”라는 의미의 여성형 소유격이 사용되고 있다. 하갈이 사라의 여종이라는 것은 누군가 하갈로 하여금 사라를 섬기도록 했다는 말이다. 이 사실에 착안해보면 확신할만한 추측 하나가 가능하다. ‘하갈은 아브라함이 이집트에 내려갔을 때, 이집트 왕 파라오가 사라에게 붙여 준 몸종이었을 것이다.’라는 추측이다.


어느 왕조를 보든지 왕의 후궁에게는 관례적으로 붙여주는 여종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지혜롭고 능력 있는 여인들이었다. 게다가 그녀들의 집안도 그 나라 안에서 상당히 명망 있는 가문이었다. 우리가 사극을 통해서도 가끔 볼 수 있지만, 왕궁에 시녀로 들어가는 여인들이 대충 뽑혀 들어가는 것은 아니잖은가? 늘 왕의 시야에 있고, 언제 선택되어 왕의 여인이 될지 모르기 때문에 유력한 가문마다 딸 하나는 왕실에 들여보냈다. 그러니 당연히 하갈도 그런 여인들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하갈은 이집트의 왕실에서 일하던 엘리트였다. 하갈은 한 가문의 대를 이을 만큼 아름답고 지혜로운 여인이었다. 그녀는 부푼 꿈을 안고 왕궁에 들어갔을 것이다.     


어느 날 이집트 왕이 그녀에게 한 아름다운 후궁을 섬기는 일을 맡겼다. 왕이 새로 맞은 후궁이니 한 참 동안은 사랑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것은 하갈에게도 큰 기회였다. 하갈은 기쁜 마음으로 이 일을 맡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후궁은 이미 결혼한 여인이었다. 그 사실이 밝혀지자 이 후궁은 궁전 밖으로 내쳐지게 되었다. 이 일은 하갈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었다. 하갈은 그렇게 아브라함의 가족들을 따라서 가나안 땅으로 가게 되었을 것이다.     


하갈의 입장에서 보면 억울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하갈은 자신에게 맡겨진 인생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해 살았다.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성실하게 일했던 모양이다. 위기 때마다 지혜가 빛이 났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여주인 사라의 총애를 받는 여종이 되었다. 사라가 그 수중에 여종이 여럿 있었을 텐데, 그중에는 분명 셈족 계열의 여인들이 있었을 텐데도, 굳이 인종이 다른 이방인인 이집트 여인 하갈을 통해 후사를 이으려고 했던 것만 보아도, 하갈이 얼마나 뛰어나고 믿을 만한 여인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마침내 하갈은 주인의 대를 이을 아이를 갖게 되었다. 인생역전의 기회가 왔던 것이다. 비록 왕의 여인은 아니지만 큰 부자인 아브라함의 대를 이을 여인이 되었다. 그러나 하갈에게는 이 임신이 복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큰 시련이었다. 하갈이 임신을 하자 여주인인 사라가 그녀를 미워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기를 보호해주어야 할 남편, 자신의 태중에 있는 아이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은 여주인 사라에게 마음대로 학대해도 좋다고 아주 친절히 허락까지 해 주었다. 억울하고 괴로운 학대를 견디다 못한 하갈은 큰 결심을 한다. 배가 불러 위태로움에도 불구하고 그 고통과 학대의 자리에서 탈출하기로 말이다. 이는 목숨을 건 위험한 탈출이었다. 고대에 종이 주인에게서 도망친다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욱이 이 탈출은 자신의 태중에 있는 아이의 목숨까지 위태롭게 하는 선택이었다.     


지금 하갈이 가려고 하는 곳은 자신의 고향인 이집트이다. 하갈은 지금 자기의 고향집을 향해 가고 있는 길이다. 그러나 이 길 또한 목숨을 내건 길이었다. 이집트로 가려면 가데스바네아를 지나 광야의 험한 길로 들어서야 한다. 여인의 몸으로 혼자서, 그것도 임신한 여인이 사막을 지난다고 하는 것은 정말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임신한 몸에 짐을 많이 들고 갈 수도 없었을 테니, 마시던 물주머니도 금방 동이 났을 것이다.     


목이 말라 한참을 헤매던 하갈은 다행히도 한 샘물을 만난다. 그런데 거기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곳에 한 남자가 하갈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남자는 하갈에게 묻는다.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처음부터 하갈은 이 사람이 범상치 않은 사람임을 알게 된다. 이미 자신의 이름과 자신의 처한 상황을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하갈이 대답했다. 그런데 이 대답은 반쪽짜리였다. 이 남자는 분명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묻는데 하갈은 도망쳐 나온 출발지만 말하지 행선지는 말하지 못하고 있다. 하갈은 자신이 갈 길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이집트의 자기 고향을 향해 가고 있기는 하지만 그곳에 가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또 자기 고향에 간다 하더라도 도망쳐 나온 종이라는 것을 다들 알 텐데, 사람들이 과연 보호해 주고 도와줄지, 게다가 혼혈아인 아이, 아버지도 없는 이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지…. 하갈은 도무지 그 행선지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때 그 남자는 하갈에게 행선지를 알려준다.     


“네가 도망쳐온 여주인 사라에게 돌아가서 그 아래 복종하라.”     


하갈은 탈출하는데 실패했다. 어디로 갈지 알지 못하는, 행선지를 전혀 알 수 없었던 그녀의 인생 탈출은 확실히 실패였다. 그녀는 다시 사라에게로, 고난의 자리로, 박해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하갈에게 믿음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니, 이전까지는 믿음이 없었더라도 이제 믿음이 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갈은 하나님의 말씀에 즉시로 순종한다. 말씀에 순종하여 고난의 자리로, 박해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당시 최강대국의 엘리트였던 여인 하갈이 한 낱 유목민의 아낙인 사라에게 돌아가 복종하며 천대를 참아낸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하갈은 다 알면서도 이미 도망쳐 나왔던 그 길로 되돌아갔다.     


하갈은 어떻게 그런 어려운 결정을 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이름을 지어주시는 대목에서 알 수 있다. 그 아들의 이름 “이스마엘”은 “하나님이 들으셨다.”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하나님께서 “하나님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라.”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니, 아마도 하갈이 하나님께 고통을 호소하며 부르짖었던 모양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들으셨던 것이다. 하갈은 예상치 못한 기도의 응답을 받고 너무 놀라, 너무 좋고 기뻐 이렇게 고백했다.     


“하나님께서 이 샘물가에서 나를 만나주셨습니다. 어떻게 저 같은 미천한 여종을 만나주십니까? 하나님께서는 나 같은 자도 감찰하시는 좋으신 분이라는 것을 제가 깨달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히브리인들만 지켜주는 수호신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만의 하나님이 아니셨다. 오히려 낮고 천하고 죽어가고 억눌려 있는 이들을 더 가까이 감찰하시는 그런 분이셨다. 그 사실에 감격한 하갈은 자신의 이 고백을 담아 샘물에 이름을 짓는다.     


“브엘라해로이! 살아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우물!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시고 나를 지켜보시는 분이라는 것을 내가 알았습니다.”     


하갈은 쉽지 않은 결정을 간단히 내릴 수 있었다. 하나님은 일등만 기억하시는 분이 아니시기에, 하나님 앞에 일등은 대단한 의미가 없기에, 오직 하나님은 부르짖는 자의 하나님이시기에, 하갈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몫을 마저 감당하려고, 주님의 손을 굳게 붙잡고서 자기 삶의 자리로 당당히 돌아갈 수 있었다.          




부르짖는 자의 하나님


하나님께서 특별히 응답하시는 사람들이 있을까? 물론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부르짖는 자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부르짖는 사람의 기도를 들으시겠다고 선포하신다.

     

출 22:22-23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     
출 22:26-27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그것이 유일한 옷이라 그것이 그의 알몸을 가릴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로운 자임이니라     
사 58:9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렘 29:12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눅 18:6-8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이 구절들을 읽고 있으면 한 그림이 내 마음속에 그려진다. 그 그림은 우리의 부르짖음을 기다리시며 손을 뻗고 계신 하나님의 모습이다. “빨리 내 손을 잡으라!”라고 애타게 부르시며 펼치신 주님의 손 말이다. 우리의 기도는 마치 그렇게 뻗고 계신 하나님의 손을 잡는 것과 같다.     


‘아이하트인텔리전스’라는 사이트에 게시된 글 중에서, 누군가와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몸과 마음에 좋은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우리가 누군가와 손을 잡을 때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이 감소된다는 연구결과가 있다고 한다. 이 코르티솔은 스트레스 호르몬일 뿐만 아니라 민감한 피부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누군가와 손을 잡고 있으면 코르티솔이 감소되어 스트레스가 해소되고 피부도 좋아진다.

     

또 코르티솔의 감소는 심리적인 안정과 진정효과를 가져다준다. 친구와 함께 인적이 드문 길을 걸어가다가 갑자기 나타난 물체에 깜짝 놀라는 경우 대개는 옆 사람의 손을 잡게 된다. 깜짝 놀랐다는 것은 큰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것이다.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이 갑자기 대량 분비되면 심장이 급격히 빨라지게 된다. 갑자기 빨라진 심장박동을 정상으로 되돌리기 위해 우리는 반사적으로 손을 잡는다는 것이다. 손을 잡는 것만으로 심리적인 안정을 얻을 수 있으며, 손을 잡는 것은 심장과 심혈관계, 뇌에도 좋은 영향을 준다. 따라서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더 건강해질 수 있다.

     

또한 우리가 손을 잡을 때,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이 감소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행복 호르몬인 옥시토신이 증가된다고 한다. 옥시토신이 뇌에서 많이 분비되면 손을 잡은 상대방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지고 좋은 관계가 형성될 뿐 아니라 행복한 마음을 얻을 수 있다. 게다가 손을 잡음으로써 우리는 극심한 고통을 감소시키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그렇기에 출산 직전의 임산부가 남편의 손을 잡고서 아기를 낳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행동이다. 심한 통증을 느낄 때, 이렇게 손을 잡으면, 유대감의 강화와 스트레스 감소, 안도감 형성... 이런 효과들이 결합되어 강한 통증도 이겨낼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물론 우리 큰아이를 낳을 때, 나는 전혀 이런 내용을 알지 못했고, 이런 기사를 접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체험적으로 알게 되었다. 첫 아이를 출산할 때, 아내는 매우 허약한 상태였다. 변변치 못한 살림에 잘 먹지 못했고, 여러 가지 고민과 스트레스로 쇠약해 있었다. 진통이 와서 병원에 갔는데 시설이 낙후된 동네 산부인과라서 무통분만도 하지 못했다. 분만실에서 한참 동안 사투를 벌이던 아내는 급기야 “살려주세요.”라는 나지막한 한마디를 뱉어냈다. 의사는 분만실 밖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고 있던 나를 급히 불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병원에서 분만실에 들어간 남편은 내가 처음이었다. 급히 분만실에 들어가 보니 아내는 거의 탈진상태였다. 몸을 축 늘어뜨린 안타까운 모습이었다. 의사는 “아기가 걸려있는 상태라 위험하다.”라고 했다. 그런 상태에서는 수술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의사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의사는 아내에게 “남편이 들어왔으니 힘을 내라.”라고 했다. 나는 아내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내가 아내의 손을 잡는 순간 아내는 눈을 떠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때, 아내의 눈빛이 번쩍 빛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는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다시 아기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때 나와 아내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감당할 수 없는, 능력 밖의 일이었는데, 결국 아내는 무사히 아기를 낳았다. 아내에게 남편이란 그런 존재다. 적어도 나는 내 아내에게 그런 존재다. 손만 잡아도 초능력을 낼 수 있는 존재. 내 아내는 단지 내 손을 잡고, 나와 눈을 마주쳤을 뿐인데 그런 힘을 낼 수 있었다. 아무런 능력이 없는 남편의 손을 잡았을 뿐인데도 깜짝 놀랄만한 일을 해낼 수 있었는데,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손을 잡는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인가? 두 말할 것도 없다.

     

지금 우리를 향해 뻗고 계시는 하나님의 손을 잡는 일은 우리의 일생에 가장 놀라운 기적을 만들 유일한 방법이다. 게다가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 우리가 계획하지 않았고, 생각하지 못했고,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은 보너스다. 그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부르짖었던 하갈의 기도에, 이스마엘을 통한 큰 민족의 계획까지 보여주신 하나님을 생각해보라. 우리가 부르짖는 기도의 제목이 작고 사소한 일이라 해도 어찌 응답해 주시지 않겠으며, 그로 인해 크고 놀라우신 주님의 계획을 어찌 보여주시지 않겠는가? 고민하고 앉아서 탄식하며 낙심하지만 말고 지금 당장 주님을 향해 부르짖으며 기도의 손을 들라. 오늘, 깜짝 놀랄만한 당신의 “브엘라해로이”를 만나게 될 것이다.     

     

렘 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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