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리티 리포트 #02
창 24:34-51 그가 이르되 나는 아브라함의 종이니이다 여호와께서 나의 주인에게 크게 복을 주시어 창성하게 하시되 소와 양과 은금과 종들과 낙타와 나귀를 그에게 주셨고 나의 주인의 아내 사라가 노년에 나의 주인에게 아들을 낳으매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 아들에게 주었나이다 나의 주인이 나에게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너는 내 아들을 위하여 내가 사는 땅 가나안 족속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택하지 말고 내 아버지의 집,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하시기로 내가 내 주인에게 여쭈되 혹 여자가 나를 따르지 아니하면 어찌하리이까 한즉 주인이 내게 이르되 내가 섬기는 여호와께서 그의 사자를 너와 함께 보내어 네게 평탄한 길을 주시리니 너는 내 족속 중 내 아버지 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 것이니라 네가 내 족속에게 이를 때에는 네가 내 맹세와 상관이 없으리라 만일 그들이 네게 주지 아니할지라도 네가 내 맹세와 상관이 없으리라 하시기로 내가 오늘 우물에 이르러 말하기를 내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만일 내가 행하는 길에 형통함을 주실 진대 내가 이 우물 곁에 서 있다가 젊은 여자가 물을 길으러 오거든 내가 그에게 청하기를 너는 물동이의 물을 내게 조금 마시게 하라 하여 그의 대답이 당신은 마시라 내가 또 당신의 낙타를 위하여도 길으리라 하면 그 여자는 여호와께서 내 주인의 아들을 위하여 정하여 주신 자가 되리이다 하며 내가 마음속으로 말하기를 마치기도 전에 리브가가 물동이를 어깨에 메고 나와서 우물로 내려와 긷기로 내가 그에게 이르기를 청하건대 내게 마시게 하라 한즉 그가 급히 물동이를 어깨에서 내리며 이르되 마시라 내가 당신의 낙타에게도 마시게 하리라 하기로 내가 마시매 그가 또 낙타에게도 마시게 한지라 내가 그에게 묻기를 네가 뉘 딸이냐 한즉 이르되 밀가가 나홀에게서 낳은 브두엘의 딸이라 하기로 내가 코걸이를 그 코에 꿰고 손목 고리를 그 손에 끼우고 내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하사 나의 주인의 동생의 딸을 그의 아들을 위하여 택하게 하셨으므로 내가 머리를 숙여 그에게 경배하고 찬송하였나이다 이제 당신들이 인자함과 진실함으로 내 주인을 대접하려거든 내게 알게 해 주시고 그렇지 아니할지라도 내게 알게 해 주셔서 내가 우로든지 좌로든지 행하게 하소서 라반과 브두엘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 우리는 가부를 말할 수 없노라 리브가가 당신 앞에 있으니 데리고 가서 여호와의 명령대로 그를 당신의 주인의 아들의 아내가 되게 하라
익명의 신앙인들
인천에 가면 내리교회가 있다. 한국 기독교 역사와 설립연도를 나란히 하는 교회다. 감리교 최초의 선교사인 아펜젤러 선교사가 세운 교회이기 때문에 그렇다. 한국 최초의 어머니 교회 중 하나이기 때문에 교회 역사에 은혜로운 이야기들이 많다. 그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교회가 맨 처음 세워졌을 당시에는 교회당이 따로 없었고, 선교관에서 예배를 드렸다. 게다가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世不同席)”이라는 유교의 가치관 때문에 남녀가 따로 예배를 드렸다. 예배당 한가운데 휘장을 치고 남녀가 나누어 예배를 드리거나, 아예 “ㄱ”자형 등으로 예배당을 나누어 예배를 드리는 교회도 있었다. 그런데 내리교회 안에 점점 부인들이 늘어나면서 나누어 예배를 드리는 것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부인들이 예배당을 지을 결심을 하게 된다. 부인들은 바느질과 빨래 등 남의 집안일을 하여 건축헌금을 했다.
예배당 건축은 남편들이 맡았다. 부인들의 정성에 감동한 남편들이 직접 예배당을 건축해주겠다고 나섰다. 얼마 후 아름다운 예배당이 건축되었고, 이 예배당은 우리 한국교회가 자력으로 건축한 첫 번째 예배당이 되었다. 그리고 건축을 위해 함께 일하며 조직된 부인들의 모임이 한국교회 여선교회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이 예배당에서 한국 최초로 남녀가 함께 모여 휘장을 걷어내고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교회사를 공부하다 보면 많은 신앙의 위인들을 만나게 된다. 불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키고, 수많은 시련 중에서도 신앙을 드러낸 이야기들은 우리를 가슴 벅차게 만든다. 마치 이러한 신앙의 위인들이 교회를 세우고 이끌어왔다고 착각하기가 쉽다. 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 “착각”이다. 교회는 언제나 익명의 신앙인들을 통해 성장했고, 계승되었다. 초대교회의 위대한 지도자들이 물론 있었지만, 초대교회를 유지하고 부흥시켰던 이들은, 200년 동안 지하 굴속에서도 신앙을 지켰던 익명의 신앙인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일꾼들을 세워 리더로 삼으시지만 동시에, 이름 없는 더욱 위대한 사람들을 통해 당신의 사역을 일구어 가신다. 성경 안에서 우리는 그런 익명의 신앙인들을 발견할 수 있다. 비록 그들의 이름은 기억되지 않아도, 그들의 신앙은 꼼꼼히 기록되어 있다.
늙은 종 이야기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이러한 익명의 신앙인을 창세기의 위대한 족장들인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 한가운데서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이삭의 신부를 구하러 밧단아람으로 떠났던 아브라함의 늙은 종의 이야기이다.
어느 날 아브라함이 한 늙은 종을 부른다. 이 늙은 종을 어떤 성경학자들은 엘리에셀이라고 말한다. 아브라함은 한때 엘리에셀이라는 종을 자신의 후계자로 생각할 정도로 신뢰하고 있었다. 하지만 성경은 오늘 막중한 사명을 맡은 종의 이름을 생략한다. 비록 주역도 아니고 오히려 그 이름도 잊혔지만 너무나 귀중한 일을 한 한 사람, 늙은 종. 그가 엘리에셀인지 아닌지 성경은 아무런 해답도 우리에게 주지 않는다. 그로 인해 이 이야기는 위대한 익명의 신앙인을 기록한 이야기가 되었다. 나는 오히려 이 종의 이름이 드러나 있지 않은 것이 더 감동적이라고 생각한다.
늙은 종은 아브라함 앞에서 굳은 신앙의 맹세를 하고 머나먼 길을 떠나서, 고생 끝에 밧단아람에 도착했다. 하지만 큰 문제가 있었다. 당시 큰 도시였던 하란에서, 아브라함의 가족을 찾기란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 혹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였을 것이다. 며칠이 걸릴지 모르는 일이었고, 혹 그들이 이사라도 했으면 영영 찾지 못할 수도 있었다. 걱정할 만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늙은 종은 걱정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
“하나님 나의 주인 아브라함을 생각하셔서 이 일이 순조롭게 되도록 인도하소서. 이제 저녁 무렵이 되어 각 집안의 딸들이 물을 길으러 나올 텐데 그 처녀 중에서 물을 달라고 할 때 나에게도 물을 주고 함께 온 낙타에게도 물을 먹이면 그 여인이 하나님께서 만나게 하신 여인인 줄 알겠습니다.”
이 늙은 종은 이삭의 신붓감을 선택하는 이일을 하나님께서 순조롭게 해 주시기를 바라며, 한 편으로는 나름대로 자기 여주인의 조건을 제시한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전혀 엉뚱한 조건일 수도 있다. 어차피 자기 색시도 아닌데 아무나 간단한 조건에 대충 맞으면 데려가겠다는 심산이었을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늙은 종은 너무나 어려운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늙은 종에게 있어서 자신의 여주인은 그저 아브라함의 가족만이어서는 안 되었다. 그녀에게 꼭 필요한 것들이 있었다.
사람에게 물을 한 잔 주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늙은 종이 끌고 온 열 마리의 낙타에게 물을 먹이는 일은 결단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낙타는 사막에서도 며칠씩 물 없이 견딜 수 있는 짐승이다. 그래서 한 번 물을 마시면 최소 75L에서 최대 130L의 물을 단숨에 마신다. 열 마리의 낙타라면 여행을 한 후에 분명 750L에서 1300L 정도의 물을 마실 것이다. 1리터당 1킬로그램으로 환산하면 최소 750kg에서 1.3 ton이 되는 무게다. 이 많은 물을 우물에서 길어 올려 낙타에게 마시게 하려면 얼마나 힘이 들까? 엄두도 내기 어려운 일이었다.
늙은 종은 하나님께 이토록 어려운 문제를 냈다. 아마 그의 생각에 낯선 나그네와 말 못 하는 짐승들에게 이 정도로 헌신하는 사람이라면 많은 가축 무리와 일꾼들을 이끌어야 할 유목민의 여주인으로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런데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늙은 종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한 여인이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품위 있게 걸어 나왔다.
참으로 드라마 같은 일이 아닌가? 마치 희곡을 읽고 있는 것도 같다. 마치 지문 속에 ‘늙은 종의 대사가 끝나기 전에’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등장인물의 대사가 끝나기도 전에, 무대감독이 “다음 당신 차례야!”하고 다음 등장인물을 떠밀 듯이,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리브가를 등장시키셨다.
우물가로 나온 그녀는 심히 아름다웠다. 얼마나 예뻤으면 성경이 심히 아름다웠다고 했을까? 아름답기만 했는가? 아니다. 무척이나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각본대로 척척’이다. 물을 한 모금 달라고 했더니 “낙타에게도 물을 먹일게요.” 이러면서 우물에서 물을 긷기 시작했다. 무려 1 ton의 물을 퍼 올려 낙타를 먹였다. 대단하다.
늙은 종은 아마도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바라보고만 있었을 것이다. 그 놀라운 일이 끝난 뒤 “뉘 댁 규수시냐?”라고 묻는 늙은 종에게 그녀는 기가 막힌 대답을 들려주었다.
“저는 밀가가 나홀에게서 낳은 아들 브두엘의 딸입니다”
이게 얼마나 기가 막힌 대답인가? 늙은 종은 어느 때부터 아브라함과 함께했는지 알 수 없지만, 어찌 되었든 아브라함이 모르는 것을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날 때 나홀에게 브두엘이라는 아들이 있었는지 또 그 브두엘에게 딸이 있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만일 리브가가 질문에 간단히 “저는 브두엘의 딸입니다.”라고 대답했다면 늙은 종은 그녀가 아브라함의 조카손녀인지 전혀 알 수 없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이 대답이 기가 막힌 것이다. 그녀의 대답 안에 그녀가 아브라함의 조카손녀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쯤 되면 엎드러지지 않을 수 없다. 너무 놀라고 기가 막히고 당황스러워 늙은 종은 바로 바닥에 엎드렸다. 그러고는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찬양합니다. 이 모자란 사람도 이토록 놀랍게 사용하시다니요. 하나님께서 어찌나 성실하시고 좋으신 분인지 이 부족한 사람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내 주인의 동생 집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알고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것이었다. 감사의 기도를 마치고 리브가를 따라 들어간 늙은 종은 이렇게 이 가정에 기쁜 혼사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이후에 늙은 종이 그녀의 가족들에게 허락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읽었는데, 성경을 읽다 보면, 이 대목이 항상 혼란스러웠다. 24장의 전반부가 한 번 더 반복되기 때문이다. 아무 생각 없이 읽으면 매우 지루할 수 있는 말씀이다. 성경을 읽다 보면 잘 안 읽히는 부분이 있다. 출애굽기 후반부, 레위기, 시편 119편 등. 대부분 길거나 딱딱한 내용이 들어 있는 성경들이다. 그리고 나는 창세기 24장도 읽기 힘들었다. 굳이 똑같은 내용을 두 번 기록해야 했을까? 그냥 “늙은 종이 겪은 일을 그대로 이야기했더라.” 이러면 될 텐데, 왜? 지루하게 두 번 똑같은 일을 거의 토씨 하나 안 틀리게 기록해야 했을까? 참으로 궁금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대목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었다. 이 말씀은 읽으면 읽을수록 기가 막힌 말씀이다. 이 부분은 늙은 종의 고백이기 때문이다. 늙은 종의 말과 하나님께서 이루시고 운행하신 모든 과정이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정확히 들어맞고 있다. 놀랍지 않은가? 세상에 누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있는 그대로 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이 늙은 종은 지금 그렇게 하고 있다.
늙은 종은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과 뜻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브라함으로부터 명령을 받은 그때부터 브두엘의 집에 들어오기까지의 모든 과정에서 정확하게 하나님의 섭리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늙은 종의 시각을 통해서 자신을 나타내셨다. 늙은 종은 사실 이삭의 결혼을 위해 아무것도 한 일이 없었다. 다만 먼 길을 여행하며 하나님께서 다 준비하시고 계획하시고 놀랍도록 역사하신 이 기적의 사건을 그저 예민하게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는 마치 그 일을 자세히 기록하는 사관처럼, 관찰하고 그 마음에 기록만 하고 있었다.
늙은 종의 이야기를 다 들은 리브가의 가족들은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셨다는 것을 너무나 잘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한마디 이의도 없이 리브가를 이삭에게 시집보내겠다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전적인 주권으로 결정하신 일이 아니라면 어느 부모가 당장 자신의 딸을 남의 손에 맡겨 머나먼 타국으로 시집을 보내겠는가 말이다. 게다가 내일 당장 데려가겠다는데 그렇게 내버려 둘 가족이 어디 있단 말인가? 나도 딸을 키우고 있는 아빠이지만, 정말 이건 불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재리에 밝은 라반이 이런 큰 건수를 쉽게 포기할 리가 없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라반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늙은 종의 고백을 통해 하나님의 확실하신 계획을 알게 된 리브가의 가족들은 순순히 리브가를 늙은 종의 손에 맡겼다. 누가 보더라도 이 일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가족들은 이렇게 고백하며 리브가 데려가는 일을 허락했다.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 우리는 가부를 말할 수 없노라. 리브가가 당신 앞에 있으니 데리고 가서 여호와의 명령대로 그를 당신의 주인의 아들의 아내가 되게 하라”(50하-51)
가족들의 허락을 받은 후에, 늙은 종은 너무나 감격하여 아예 땅바닥에 엎드려 하나님께 절하였다. 보통은 이런 경우 가족들에게 먼저 감사의 말을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먼저 감사드리고 엎드렸다. 이것은 그들의 말대로 그들이 결정한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께서 결정하시고 이루신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늙은 종은 눈물을 펑펑 흘렸을지도 모른다. 그동안 자기 주인 아브라함에게만 나타나시고 이루시던 그 하나님의 역사에, 미천한 늙은 종인 자신을 도구로 사용하셨다는 것이 그저 놀랍고 기쁘고 감격하고 감사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
전에는 한동안 인터넷에 사진을 찍어 올렸었다. 한 때, 모 사이트의 두 가지 브랜드 갤러리에서는 꽤나 유명해졌었고, 여러 콘테스트에서 입상도 했었다. 몇몇 잡지에서는 목사가 아닌 사진가로 활동했고, 인터뷰를 하기도 했었다. 사진을 찍는 것이 그렇게나 좋았다. 하지만 이내 가장 큰 장벽에 도달하게 되었다. 내 소유의 제대로 된 카메라가 없는 것. 내게는 렌즈 교환식 카메라가 한 대도 없었다. 카메라도 고가일 뿐만 아니라 렌즈값도 만만치 않았기에, 가난한 목사의 형편에 선뜻 카메라를 살 수도 없었다. 그동안 빌린 카메라로 그만큼의 사진활동을 한 것이 기적이었다. 주로 교회 소유의 카메라들을 이용했는데, 아무래도 사용의 제한이 많았다. 좋은 풍경과 소재는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찾아오는데, 교회 비품을 항상 들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돈을 모으기로 결심을 했다. 5만 원씩 통장에 꼬박꼬박 모으기 시작했다. 5년을 작정했다. 그렇게만 모으면 나름대로 쓸 만한 카메라와 렌즈를 구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몇 개월을 모았을 때쯤, 갈등되는 일이 일어났다. 교회에서 교육관을 건축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때 나는 선교구 목사와 교육목사를 겸임하고 있었다. 청년부를 담당하면서 교회학교 전반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었기 때문에 교육관 건축은 내게 꽤나 중요한 일이었다. 이미 건축의 모든 부분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적지 않은 시간과 열정을 건축 준비에 빼앗겼다. 교육관을 건축하는데 교육목사로서 헌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질적인 부분도 마찬가지였다. 교인들은 모두 이 일을 위해 건축헌금을 하는데, 교육부서를 담당한 목사가 헌신하지 않는다면 그건 참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건축헌금 계획을 세우고 사례비의 일정 부분을 헌금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카메라를 사기 위해 모으고 있던 돈이었다. 마음속에서 자꾸만 갈등이 생겼다. 카메라를 사기 위해 돈을 모으던 것을 포기하고 이미 모아놓은 돈은 건축헌금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마음과, 이미 건축헌금은 일정 금액하고 있으니 카메라를 위한 저축은 계속 하자는 마음이 계속 부딪혔다.
그런 갈등을 한 참 하던 차에 한 집사님의 가정을 심방하게 되었다. 남편이 고위직 공무원이었는데 일찍 퇴직하여 사업을 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퇴직을 하고는 퇴직금과 재산을 모두 들여 사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 사업체가 얼마 안 되어 큰 부도를 맞았다. 결국 빈털터리가 되어 빚더미에 않게 되었다. 평생 고생을 모르고 살던 부부가 처음으로 인생의 된서리를 맞게 된 것이었다. 커다란 저택에서 쫓겨나 작은 셋방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고 이미 대학을 진학했던 큰 딸은 어찌어찌 학교를 졸업했지만, 아직 대학 진학을 앞두고 있었던 작은 딸은 성적이 아주 좋았음에도 진학을 포기하고 취업을 했다. 고위직으로 사람을 부리기만 했던 남편은 하루에 세 곳을 돌며 밤낮없이 일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집사님에게는 유방암 판정이 떨어졌다. 그냥 앉아서 듣기만 해도 입을 다물 수 없는 끔찍한 고난이었다.
수술을 하고 항암치료를 받는 모든 과정을 함께 했다. 마음이 여린 분이셔서 모든 과정을 너무나 두려워하셨다. 그래서 매번 수술과 항암을 앞두고 심방을 했었다. 심방이라고는 하지만 말씀 한 두 구절 읽고 둘이 같이 한 참을 울다가 간신히 기도하고 돌아오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다행히 하나님의 은혜로 무사히 투병을 마쳤다.
마지막 항암치료를 마치고 항암제의 부작용으로 고생하고 계실 때, 댁을 방문했다. 목욕할 때, 자신의 가슴을 보면 너무나 끔찍하고 속상해서 욕실에 거울을 모두 없애셨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난 주책없이 또 울었다. 내가 한 참 울고 있으니 오히려 집사님께서 나를 위로하셨다.
“목사님, 그래도 감사해요. 예전에 많은 것을 가지고 누렸을 때는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신 것을 몰랐었는데, 모두 잃고 육체의 고통까지 당하고 보니 하나님의 은혜를 알겠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지금이 더 행복해요.”
그 신앙의 고백에 나는 결국 큰 소리를 내며 엉엉 울고 말았다. 결국 그날은 내가 기도할 수 없어 함께 동행했던 교구장님께서 기도를 하셨다. 눈이 퉁퉁 부어 운전을 하고 돌아오면서 뒤에 앉아 계신 교구장 권사님께 카메라 때문에 고민했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이제는 하나님 한 분이면 만족합니다. 카메라 없어도 괜찮을 것 같아요. 그래서 카메라 사려고 모아놓은 것 모두 건축헌금하려고 해요.”
마침 그날이 금요일 심야기도회가 있었던 날이라, 모아두었던 돈을 모두 모아 헌금봉투에 넣어 주님 앞에 드렸다. 그러고는 또 한 번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그게 그렇게 감격스러울 수 없었다. 늘 가난했던 나는 가난이 축복이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목사니까 말로는 그럴 수도 있다고 했지만, 사실 내가 가난해서 행복하다는 생각은 더더욱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가 가난했기에 하나님을 만났고, 교회를 다녔고, 하나님께 붙어 있을 수 있었다. 집사님의 말씀대로 오히려 “가난하기에 행복한 나”였다.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는 주님의 말씀처럼 가난이 내게 복이었음을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우리 할아버지께서는 꽤나 부자셨다. 서울에서 버스회사를 7개나 경영하시던 사업가셨다. 내 고향에 있던 모든 기업, 세탁소로 시작해서 정미소, 양조장까지 모두 할아버지의 소유였다. 만일 할아버지께서 사업을 실패하지 않으셨고, 내가 낳던 해에 할머니께서 돌아가시지 않으셨다면 아마도 난 지금쯤 어느 절에서 불공을 드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우리 집안은 불교에 심취했었다. 우리 할머니의 부친은 정읍에 있는 가장 큰 절의 주지스님이셨다고 했다. 그런데 우리가 가난해졌기에 아버지는 엇나가기 시작하셨고, 어머니는 옷 장사를 하시기 위해 교회에 등록하셨다. 소녀시절에 교회를 다녔다고는 하지만 그 믿음은 잃은 지 오래였다. 어머니는 동대문에서 옷을 떼다가 교회의 부인들에게 파셨고 그 이후로 우리는 교회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러니 어찌 가난이 축복이 아니었겠는가 말이다. 극심한 고난 가운데 함께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더 행복함을 깨달은 집사님의 고백을 통해, 나 또한 평생의 걸림돌이라 생각했던 가난이 내게 축복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고난 중에도 하나님은 숨어계시고 우리 인생의 걸림돌을 디딤돌로 놓고 계시는 분이심을 알게 되었다.
그런 생각들을 하며 카메라가 내 인생의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 인생의 행복에 가장 중요한 분이시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러고 나니 마음이 한 결 가볍고 평안했다. 예배가 끝난 후 사무실에 앉아 그 평안은 혼자 음미하다가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마침 그날이 한국사진가협회와 대기업에서 주관하는 콘테스트 입상작을 발표하는 날이었다. 많은 사진대회가 있지만, 이 콘테스트는 그중에서도 제일 권위 있는 대회였다. 보통 이전에 이 콘테스트에서 나는 입선이나 가작 정도에 당선되었었다. 입상작들을 살펴보는데 좋은 작품들이 많았다. 보통 동상 이상의 상들은 정말 대단한 작품들이 수상하기 때문에 언감생심 생각도 못했다. 입선과 가작에 내 작품이 없어 ‘이번엔 떨어졌구나.’ 생각했다. 이번엔 어떤 좋은 작품들이 동상과 은상, 금상을 수상했는지 궁금했다. 훌륭한 작품들을 보는 것도 좋은 공부가 되기에 할 수 있으면 상위의 수상작들을 유심히 보는 편이었다. 동상과 은상 작품들을 감상하며 감탄을 하고 있었다. 맨 마지막 금상 작품을 보려고 페이지를 넘긴 순간 나는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어디서 많이 본 작품이었다. 바로 내 작품이었다. 한동안 꼼짝을 할 수 없었다. 너무나 신기하고 놀라웠다. 금상에 선정되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무엇보다 놀란 이유는 부상이 카메라와 렌즈였기 때문이었다.
불과 아침부터 저녁 사이에 일어난 일 때문에 나는 많은 것들을 깨달았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돈을 모아 카메라를 사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나의 열정과 정성은 주님을 위해 쏟아내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카메라는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기를 원하셨다. 나는 그때부터 하나님과 함께라면 광야의 길도 푸른 초장이며, 가난도 부요함인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과연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고 계시는가?”를 관찰하는 것에 큰 기쁨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을 관찰하라
우리가 고난 가운데 있다면 더더욱 하나님을 관찰해야 한다. 하나님은 무언가 숨겨두기를 좋아하신다. 때때로 그분은 깜짝쇼를 좋아하신다. 그런데 막상 하나님을 유심히 관찰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깜짝쇼를 놓쳐버리거나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실망하실까? 실패한 인생 가운데서도 행복할 수 있고, 스스로 가난해지면서도 부요한 마음이 될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비결은 그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관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정말 좋으신 분이시다. 하나님께서 만일 아브라함 같은 위대한 사람들만 사용하시는 분이라면 우리에게는 별로 소망이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들을 사용하고 계신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 즉 평범해 보이는 일들 중에, 우리가 예민하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면 이 작고 소박한 일들이 하나님의 놀랍고 크신 섭리 안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아브라함의 늙은 종이 한 일은 이스라엘이 민족을 이루는데 없어서는 안 될 위대한 일이었다. 이스라엘의 어머니 리브가, 아브라함의 믿음을 닮은 그 여인을 세우는 귀중한 일이었다. 이런 위대한 일을 아브라함이 한다거나 당사자인 이삭이 했어도 전혀 무방했을 것이다. 아니 세상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더 어울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위대한 일을 이름도 없는 한 늙은 종에게 맡기셨다.
늙은 종의 믿음을 보라. 그 아름다운 신앙의 고백을 보라. 오히려 아브라함, 야곱, 모세보다 더 아름답고 고귀하지 않은가? 하나님의 뜻을 구별 못하고 방황하고 실수했던 아브라함, 야곱, 모세를 이 늙은 종에 비교해 보면 오히려 이들은 훨씬 못난 사람들처럼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이렇듯 드러나지 않은 우리들을 통해 이 땅에 주님의 뜻을 이루신다. 우리들이 속해 있는 그 자리에서 묵묵히 주님께서 원하시는 그 일을 감당해 나갈 때, 사람들은 아무도 모른다 하나,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기억하시고, 성경에 늙은 종이 기록되었듯이 하나님의 손바닥에 우리를 새기실 것이다. 그리고 잊지 않으실 것이다.
지금부터 당신의 삶 가운데 숨어계시는 하나님을 관찰하라!
롬 5:3-4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