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리티 리포트 #03
출 1:15-21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사람과 부아라 하는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해산을 도울 때에 그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 애굽 왕이 산파를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같이 남자 아기들을 살렸느냐 산파가 바로에게 대답하되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 하매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지니라 그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흥왕 하게 하신지라
하나님의 사람으로 산다는 것
이 복잡하고 생각 많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더욱이 믿음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때로는 사람들과 다른 박자로 산다는 것은 어떤 사람들에겐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능력이 있고 지위가 있다면 모를까? 하루하루 자신의 몫을 간신히 감당하면서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못할 일은 또한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물론 세상에 순응해서 평화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정죄의 잣대를 들이대자는 것은 아니다. 나 또한 목사이면서도 세상에 편승하여 살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러니 누가 잘했고 누가 못했는지를 따지려고 든다면, 무엇보다 나 스스로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알아야 할 것은, 그렇다고 세상을 거슬러 사는 것이 절대로 못할 일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한 번은 성재 형제가 나를 찾아왔다. 제약회사에 다니는 젊은 형제였다. 그 형제의 아내는 종희 자매였는데, 서울대학병원 응급실의 간호사였다. 그해에 결혼하여 신혼살림을 차렸고, 종희 자매는 아기를 임신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행복할 것 같은 성재 형제가 나를 찾아온 이유는 직장에서의 갈등 때문이었다. 사람 때문도 아니고 회사 때문도 아닌, 자기 스스로의 갈등 때문에 나를 찾아온 것이었다. 제약회사에서 영업사원으로 일하고 있는 그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병원과 의사들을 상대로 영업을 하는 일이었다. 그는 모태신앙으로 자라 술과 접대문화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런 접대문화에 죄책감이 들기 시작했다. 술로 시작해서 여성 접대 도우미까지 이어지는 영업이 신앙 양심에 거리꼈다. 그래서 그는 회사를 그만두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나는 성재 형제를 위로하고 그를 위해 기도했다. 그리고 그에게 술과 유흥접대를 하지 않고도 영업에 성공한 몇몇 사람들의 예를 들어주었다. 그랬더니 정말 기뻐하면서 돌아가서 자신만의 방법으로 영업을 하기 시작했다. 만일 직장의 상사들이 알았다면 분명 문제가 될 것이었지만, 그는 자신만의 방법대로 잘해 나갔다. 어떤 주에는 자신이 발명한 영업방법을 내게 자랑하기도 했고, 어떤 주에는 그달의 영업실적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다행히 매월 실적이 평균 수준 이상이 되어 어떤 상사도 그의 전혀 다른 영업방법에 대해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 일은 사내 회식자리에서 생겼다. 영업상무와 함께 하는 회식이라 말단직원인 그가 빠질 수도 없는 일이었다. 회식자리에서는 어떻게든 술을 먹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상무가 직접 수고했다고 따라주는 술을 마시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자신은 모태신앙이고 크리스천이라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술을 먹지 않으면 내일부터 회사에 나오지 말라!”며 상무가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는 그런 상황에서조차 잔을 받지 않을 수 없어 억지로 술잔을 들었다. 그러고는 상무에게 이렇게 말했다.
“상무님, 사실 저는 상무님이 두렵습니다. 이 술을 먹지 않으면 실직을 하게 되는 것도 두렵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하나님이 더 두렵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울면서 술을 한 잔 마셨다. 그러고 나서 잠시 후 갑자기 성재 형제는 호흡이 가빠지며 기절하고 말았다. 회식자리는 난장판이 되었다. 119를 불러 가까운 병원으로 그를 옮겼다. 우연의 일치로 회식자리에서 가장 가까운 병원이 성재 형제의 아내인 종희 자매가 일하는 서울대학병원이었다. 마침 그날 응급실에는 종희자매가 근무하고 있었다. 종희 자매는 자기 남편인 성재 형제가 응급실에 실려온 것을 보고 얼마나 놀랐을까? 임신해 배가 불러 있는, 자기 남편이 응급실에 실려온 것을 보며 놀라고 있는 종희 자매를 보며, 그 상무는 또 얼마나 놀랐을까? 백배사죄를 했다. 다행히도 몇 시간 후에 성재 형제는 의식을 되찾았다. 의식을 되찾은 그의 앞에는 그에게 강제로 술을 마시게 했던 상무가 앉아 있었다. 불신자였던 상무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가 실려 오는 동안 내내 하나님께 기도했어. 너만 살려주시면 내가 교회에 나가겠다고 말이야. 정말 미안해. 그리고 깨어나 줘서 고맙다.”라고 말이다.
그 상무가 교회에 나갔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그 주에 교회에 와서 간증하는 성재 형제를 보며 많은 청년들이 용기를 얻었다. 나 또한 용기를 얻었다. 세상을 거스르며 신앙생활을 하려는 청년들이 있다면 두려워하지 말라고 이야기해주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의도가 술을 마시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들려는 것은 아니다. 또한, 술을 마신다고 모두 죄인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당연히 죄로 이어질 어떤 일들에 대해서는 그저 변명으로 일관해서는 안 된다. 때로는 거센 물살이라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어야 신앙인이다. 거의 모든 경우에 우리는 질서와 흐름을 따라 살아야 하지만, 그러나 꼭 거슬러야 할, 신앙적으로 위험하고 의롭지 못한 질서와 흐름도 있다. 그런 일을 만났을 때, 신앙인이라면 자신의 상황과 처지에 상관없이 옳은 일을 위해 용기를 내어야 한다.
히브리 산파들
구약성경에는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한 없이 연약한 이들이었지만, 옳은 일을 위해 세계를 호령하는 제왕을 거슬렀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이집트의 히브리 산파들이었다.
출 1:15-16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사람과 부아라 하는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해산을 도울 때에 그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이집트 왕이 어느 날 히브리 산파들을 불렀다. 이들은 히브리인들을 위한 산파였다. 어떤 사람들은 이 여인들이 히브리사람들이었다고 말한다. 분명 성경에 “히브리 산파”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히브리 산파’라는 말은 물론 ‘히브리인 산파’라는 뜻도 될 수 있겠지만, 독일성서공회판 주석을 보면 ‘히브리인을 위한 산파’라고 해석하고 있다. 나는 이 해석이 참 좋다고 생각한다. 이 여인들이 히브리인 산파들이 아니라, 히브리 여인들을 위한 산파였다고 믿는다. 상식적으로 이집트 왕이 히브리 민족의 번성을 막으려고 할 때, 히브리인 산파들을 고용했을 리는 없지 않은가? 더욱이 이 여인들의 이름도 우리가 성경에서 읽을 수 있는 히브리인들의 이름과는 조금 다르다. 그녀들은 ‘십브라’와 ‘부아’였다. ‘십브라’라는 이름은 모세의 아내‘십보라’와 비슷하다. 십보라는 미디안 사람이니까, 이 산파도 미디안과 같은 가나안 족속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 ‘부아’라는 이름도 왜인지 모르게 디모데 후서에 나오는 ‘얀네’나 ‘얌브레’와 비슷한 묶음처럼 들린다. ‘얀네’와 ‘얌브레’는 모세를 대적했던 이집트의 주술사들이었다. 아무래도 두 산파의 이름은 히브리 여인의 이름과는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이집트인이나 이집트에 거주하는 히브리인이 아닌 다른 족속의 이름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16절은 다시 한번 그녀들을 ‘히브리인들을 위해 해산을 돕는’ 사람들이라고 확실히 짚어 둔다.
이집트의 파라오는 당시 천직이었던 산파들에게 끔찍한 명령을 내린다. 히브리인의 신생아 중에 남자 아기가 있거든 그 자리에서 죽이라는 명령이었다. 왕과 산파는 당시 사회적으로 엄청난 신분의 차이가 있었다. 말 그대로 죽으라고 하면 죽는시늉이라도 해야 하는 관계였다. 더욱이 노예들을 위한 산파들이니 이집트 왕에게는 그런 끔찍한 살인명령도 내리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왕은 추호도 이 천하고 천한 산파들이 자신의 명령을 어길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생명을 탄생시키는 일꾼들에게 생명을 죽이라니!’ 이 명령은 그녀들이 절대로 따를 수 없는 명령이었다. 그래서 그녀들은 바로의 명령에 정면으로 거슬렀다. 산파들의 목숨을 건 역행이 시작된 것이었다. 참 멋진 여인들이다. 자기 일에 이토록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니, 어느 세대나 쉽지 않은 일이 아닌가? 그런데 그녀들이 바로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던 이유가 꼭 자신들의 일에 대한 자부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훨씬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출 1:17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
성경에 의하면, 그녀들이 히브리인의 남자 아기들을 살렸던 이유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이 두려움은 그저 막연한 두려움이 아니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나,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었다. 그렇다. 믿음 때문이었다. 그녀들은 믿음 때문에 목숨을 걸고 아기들을 살려냈던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일이 있다. ‘어떻게 이방인인 산파들이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 그녀들에게는 분명 그녀들이 믿는 신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자신의 신을 버리고,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가족들과 민족들과 국가가 믿는 신들을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택하였는가 말이다. 참 궁금한 일이지만 전혀 그 과정을 알 수는 없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 과정은 말해주지 않는다. 다만, 그녀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였다고만 말한다.
사실 그럴 수 있다. 어떻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였는지는 모르지만, 그녀들은 히브리인들을 위한 산파들이 아니었는가? 그러니 히브리인들과 가까이하면서 분명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했을 것이다. 히브리인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 죽어버린 돌이나 나무에 새긴 신이 아닌, 형상은 없지만 진짜로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말이다. 성경은 그렇게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꽤나 많았다고 말한다.
출 12:38 수많은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가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
히브리인들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수없이 많은 이방인이 그들과 동행했다. 이들은 출애굽 후에 다른 곳으로 흩어지지 않고, 히브리인들 안에 섞여서 이스라엘의 일부가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그나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다. 갈렙은 이방족속인 그나스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유다지파의 두령이 되었다. 출애굽을 한 수많은 이방인들 중에는 이집트인들도 더러 있었다. 그러니 그들이 함께 이집트를 탈출한 이유는 압제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신앙을 위한 결단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그렇다면 이들은 진작부터 하나님을 믿고 함께 신앙을 공유하고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십브라와 부아는 그런 부류였다. 그녀들은, 비록 히브리인들이 지배당하는 노예의 신분이지만, 하나님의 백성에게 고통을 주는 일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런 이유로 그녀들은 왕의 지엄한 명령을 어기고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사내아기들을 살려주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이 일은 무모한 항거일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 결과가 명백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기를 죽이지 않으면 아기는 살게 된다. 남자 아기들이 살아 있으면 산파들은 왕의 명령을 어긴 것이다. 그러니 이처럼 무모한 명령불복종이 어디 있겠는가 말이다. 결국, 그녀들은 왕 앞에 끌려가게 된다.
출 1:18-19 애굽 왕이 산파를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같이 남자 아기들을 살렸느냐 산파가 바로에게 대답하되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 하매
파라오는 이미 산파들이 그 아이들을 살려주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찌 너희가 이기들을 살렸느냐?”라고 묻는다. 그녀들은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었다. 한낱 노예들을 위한 산파가 지엄한 왕의 명령을 어기다니 이는 죽어도 할 말이 없는 일이었다. 그 서릿발 같은 왕의 노여움에 그녀들은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내가 왕이라도 이 대답은 정답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냥 잘못했다고나 하지, 자기들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애들을 낳아버렸다니! 이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인가 말이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왕이 그 말을 믿었다는 것이다. 분명 그녀들은 풀려났다. 그러니 하나님의 축복으로 그들의 집안이 놀랍게 풍성해지지 않았겠는가? 만일 왕이 그들에게 벌을 내렸다면 그들의 집은 폭삭 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살아남았다. 게다가 큰 복까지 받았다. 도대체 왕은 그 말을 왜 곧이들었을까? 너무나 어리석은 왕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산파들의 말이 전부 거짓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들은 아기를 출산하기 전에 산모들에게 도착하여 남자 아기도 받았다. 그리고 그들을 살려 주었다. 그러나 히브리 여인들이 이집트의 여인들과 같지 않고 건장하여 아기를 잘 낳았던 것은 사실이었다.
이스라엘의 가족들이 몇 명이었는가? 칠십 명(창 46:27)이었다. 그런데 출애굽 한 사람이 무려 장정만 육십만(출 12:37) 명이었다. 아이들과 부녀자들까지 포함하면 어림잡아도 이백만 명 가까이 되는 인구였다. 도대체 사백 삼십 년 동안 칠십 명이 이백만 명이 되려면 얼마나 아이를 잘 낳아야 하는가 말이다. 불과 열 세대 만에 이런 놀라운 인구증가를 이루려면 많이 낳아야 할 뿐만 아니라, 태어나 건강하기까지 해야 한다. 하긴 그러니 이집트 왕이 히브리인들이 번성하는 것을 보면서 위기감을 느끼지 않았겠는가?
이미 왕은 그녀들의 말이 거짓말임을 짐작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히브리 여인들의 출산능력이 위대하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어리석은 변명 같았지만, 산파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축복에 기대어 배수의 진을 치고 들어간 것이었다. 왕은 자신보다 미천하다고 생각했을 이 산파들에게 보기 좋게 당하고 말았다.
산파들에겐 이런 믿음이 있었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놀라운 번성의 축복을 내리신 하나님, 그 생명의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생명도 보전해 주시리라는 믿음 말이다. 그녀들은 그 믿음을 붙잡고 왕의 명령에 불복했으며, 또한 왕의 심문 앞에서도 담대히 자신들의 믿음을 선포할 수 있었다. 산파들의 대답에는 이런 뜻이 숨겨져 있다.
“왕이여, 왕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억누르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같지 않아 놀라운 생명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생명을 주셨으니, 아무리 그 생명을 꺾으려 해도 결코 꺾이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달려가 죽이려 한들, 작은 아기 하나도 죽일 수 없을 것입니다.”
산파들은 감히 왕 앞에서 할 수 없는 말을 담대히 믿음으로 선포했다. 그리고 그녀들의 말이 옳음을 왕도 스스로 인정한 꼴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산파들의 무모한 항거를 통해 당신의 이름을 높이셨고 결과적으로 산파들의 목숨도 살려주셨다. 도무지 하나님께서 하시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출 1:20-21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지니라 그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흥왕 하게 하신지라
하나님의 축복에 기대어 지엄한 왕의 명령을 거슬렀던 산파들은 하나님께 큰 축복을 받았다. 그 집안이 흥왕 하였다. 이 ‘흥왕’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는 ‘아싸’라고 읽는데 우리말 그대로 “아싸!”다. 단어 안에 좋은 뜻이 엄청나게 많이 들어 있다. 온갖 좋은 것은 웬만하면 이 말 하나로 대신 쓸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하나님 편에 서라
어렸을 때 다녔던 교회에서 교인이 선거에 출마한 적이 있었다. 평소에는 교회에 발걸음을 안 하시던 분이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다. 부인이 교회에서 열심히 일하는 권사님이었다. 담임목사님은 그분을 전도할 목적으로 예배에서 공개적으로 축복을 했고, 당연히 교인들은 그분을 뽑아야 하는 그런 분위기였다. 지금은 선거법에 저촉되는 일이지만, 그때는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우연히 초등학교 앞을 지나다 선거 유세를 듣게 되었다. 다른 후보들은 모두 자신의 위대함과 소신을 밝히고 들어갔다. 그분의 차례가 되어 가만히 듣고 있는데, 유세가 끝날 무렵 동의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
“여러분, 하나님이 내 편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당선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때, 내 마음속에는 ‘아브라함 링컨은 하나님이 내 편이 되시는 게 아니라, 내가 하나님 편이 되겠다고 했다는데... 과연 하나님께서는 저분의 편을 들어주실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자 마음이 씁쓸해졌다. 기분도 나빠졌다. 어린 마음에도 ‘이건 아니다.’ 싶었던 모양이다.
그분은 결국 선거에 실패하고 오랫동안 마음의 상처를 감내해야 했다. 물론 나는 그분이 하나님께 벌을 받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하나님께서 편을 들어주시리라고 믿었던 마음 자체가 스스로에게 고통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비단 그분에게만 일어난 일은 아니다. 우리 주변에 흔한 권력자들에게 자주 일어나는 일 중 하나이다.
나는 정치에 뛰어들 생각은 전혀 없다. 하지만 정치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솔직히 말해서 정치보다는 정치하는 사람들에 대해 관심이 있다. 제발 그들이 정치를 잘해서 많은 사람들이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주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선거가 있으면 적극적으로 투표하고 관심을 갖는다. 물론 목사가 정치에 있어 어느 한 편을 드는 것은 성도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기에 나는 되도록 내 정치성향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확실히 나는 내가 좋아하는 정치가들이 있다. 그리고 선거가 되면 그들에게 나의 표와 마음과 기대를 걸어 준다. 그러면 어떤 때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당선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당선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결과가 있든, 선거가 끝나면 나는 언제나 같은 기도를 한다. ‘저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하고 말이다.
정치인들 중에는 하나님이 제 편인 줄 아는 사람들이 많다. 선거가 진행될 때도 그렇지만, 선거가 끝나면 더 그렇다. 특히 당선된 사람들은 하나님이 제 편일 뿐만 아니라 영원히 제 편일 줄 아는 것 같다. 그래서 제 맘대로 정치를 하곤 한다. 약속도 잊고, 두려움도 잊고, 경외함도 잊는다. 그러나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언제나 하나님 편인 사람만 있다. 무조건 사람 편인 하나님은 없다. 정말이지 그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그 사실을 잊는 순간 하나님의 편에 설 기회조차 잃고 만다.
우리는 힘 있는 사람, 권력 있는 사람, 세상의 주류에 두려움을 느낀다. 그들이 잘못되었어도 지적 한 번 하기 어렵다. 그저 그들이 하라는 대로, 살라는 대로,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게 편한 것처럼 말한다. 튀어나온 못이 망치에 맞는 법이라 한다. 모난 돌이 정 맞는 거라 한다. 그러니 제 말 잘 듣고 살라 한다. 하지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들의 편이 아니다. 그런 주류에 편승하시지 않으신다. 물론 하나님이 맹목적으로 약자의 편이라거나, 비주류의 편이라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의 편이 되어 주시는 일에는 힘이 있든지 없든지, 권력이 있든지 없든지, 주류이든 비주류이든 간에 그런 건 아무 상관이 없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의 편에 선 사람들의 편을 들어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편을 들어주시는 사람은 세상을 이긴다. 하나님은 다윗이 고백한 것처럼 천만인이 둘러 진을 치고 한 사람을 공격해도 한 사람이 승리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오직 우리가 하나님의 편이 되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우리를 통해 세상을 부끄럽게 하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편이 되기만 한다면 우리는 무적자가 된다. 세상도, 환란도, 기근도, 그 어떤 무기나 위험도, 천사나 사탄도, 사망이나 생명도, 과거나 현재나 미래까지도, 우리는 넉넉히 이기게 될 것이다. 그러니 어찌 앞을 가로막은 거대한 장애물 앞에서 내 손에 든 것과 입은 것만을 바라보며 좌절하고만 있을 것인가? 이제 일어나 이 모든 것 배후에 계신 더 크신 하나님의 편이 되자. 그리고 하나님을 거스르는 세상을 담대히 거슬러 올라가자.
롬 8: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