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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태현 Aug 26. 2017

마이너리티 리포트 04
세상의 유행에 굴하지 말라!

마이너리티 리포트 #04




유행을 따라 사는 사람들


요즘은 청소년들의 연령대를 알아맞히기가 쉽지 않다. 영양이 충분한, 아니 넘치기까지 하는 음식문화 때문에 성장과 발육이 좋아졌기 때문이다. 가끔은 내가 마주하고 있는 이 사람이 성인인지 청소년인지, 아니면 어린이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운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발육이 좋아 성인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청소년들을 알아보는 방법이 있다. 옷을 보면 된다. 신고 있는 신발을 보면 알 수 있다. 확실하다고는 말하기 어렵지만, 거의 구분할 수 있다. 가령 특정 브랜드의 등산복을 입고 있다거나, 한참 학생들에게 유행하고 있는 브랜드의 신발을 신고 있으면서, 한 무리를 지어 다니고 있으면 대부분 청소년기의 학생들이다. 조금만 관심이 있으면 옷의 배색이나 모델을 보고 몇 학년인지도 구별해낼 수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이 구별방법은 도시나 시골이나 일반이라는 것이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옷들과 신발들, 교복을 수선하는 방법들이 한 가지로 닮아 있다. 언젠가 자신들이 어른이 되면 그 모습들이 민망할 텐데도 꼭 그렇게 하지 않으면 큰 일이라도 나는 듯 똑같은 모습들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게 어디 청소년들만의 일인가? 어린이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TV의 히어로들이나 만화 주인공들을 따라 하고 그 상징이 새겨진 물건들을 지니기를 원한다. 어른들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는 작게는 집에서 쓰는 컵의 디자인에서부터 자동차, 가방, 모자, 옷, 스포츠, 여가생활, 성형수술, 연애 패턴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모든 분야, 모든 측면에서 유행이라는 것을 무시할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옆집 부인이 어느 나라 어느 브랜드의 그릇세트를 사용한다고 하면, 나도 그 그릇으로 밥을 먹어야 한다. 회사의 동료가 어떤 로고가 새겨진 명품가방을 남자 친구에게 선물 받았다고 하면, 내 남자 친구도 그 가방을 사 줘야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고등학교 동창이 골프를 친다고 하면, 나도 골프를 쳐 줘야 사회생활을 잘 하는 것이 된다. 심지어 서울의 모 지역에 가면 거리를 지나는 젊은 여성들의 얼굴이 한결같다. 눈이며 코, 얼굴 윤곽, 턱 모양, 점의 위치까지 똑같은 경우도 있다.


우리는 유행을 따라 산다. 처음에는 아마도 좋은 의미에서 유행이 생겨났을지 모르겠다. 인간이 사회를 구성하고 살면서 구성원들 사이에 동질감과 유대감을 위해 서로 비슷한 모양으로 살지 않았을까? 그런 유행들이 문화가 되고 그 문화가 그 사회의 특별한 무엇이 되었을 것이다. 유행에 뒤처지는 사람은 그 사회에서 뒤처지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 무언가 보조를 잘 맞추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촌스럽다.’는 한 마디로 평가된다. 반면에 유행을 선도하는 사람들은 추앙을 받고, 유행을 잘 따르는 사람들은 ‘감각 있는 사람들’로 칭찬을 받는다. 대부분 그런 사람들은 성공한 사람들이다. 세상에 유행하는 그런 좋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렇다. 세상은 그런 사람들을 좋아하고 칭찬한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과 함께 있어야 즐겁고 유쾌해진다. 왜인지 우리도 ‘감각 있는’, 그리고 성공한, 그런 부류가 된 것 같아 으쓱해진다. 그런데 하나님은 좀 다르셨다. 아주 ‘촌스러운’ 사람들을 칭찬하신다. 온 세상을 디자인하신 최고의 디자이너이신데, 성공이라면 당연히 가장 성공하신 분이실 텐데, 하나님은 오히려 ‘촌스러운’ 사람들을 칭찬하셨다. 참 혼란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엉뚱한 명령


온 유대 땅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어 바벨론 왕을 통해 심판하시던 그때,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엉뚱한 명령을 내리신다. 초원의 유목민인 이방 족속 레갑 사람들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불러 포도주를 먹이라는 명령이었다.


렘 35:1-2 유다의 요시야 왕의 아들 여호야김 때에 여호와께로부터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레갑 사람들의 집에 가서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을 여호와의 집 한 방으로 데려다가 포도주를 마시게 하라 하시니라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명령인가? 촌티 나는 사람 정도가 아니다. 아예 유대인들이 상종하지 않는 이방인들을, 그것도 하나님의 성전에 들여 거룩한 곳에서는 먹을 수 없는 포도주를 먹게 하라니. 사도바울은 이방인을 성전에 들였다는 이유로, 사실 헛소문이었는데, 사람들에게 맞아 죽을 뻔하지 않았던가?(행전 21장) 하나님께서는, 아론의 아들들이 경쟁적으로 잘못된 분향을 하다가 심판을 받은 후로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음주를 일절 금하지 않으셨던가?(레 10"9)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이런 이해하기 어려운 일을 지금 시키고 계시는가 말이다. 그것도 하필이면 성전에서 제일 곤란한 장소로 그들을 이끄셨다.

 

렘 35:3-4 이에 내가 하바시냐의 손자요 예레미야의 아들인 야아사냐와 그의 형제와 그의 모든 아들과 모든 레갑 사람들을 데리고 여호와의 집에 이르러 익다랴의 아들 하나님의 사람 하난의 아들들의 방에 들였는데 그 방은 고관들의 방 곁이요 문을 지키는 살룸의 아들 마아세아의 방 위더라


하필이면 고관들의 방 곁에서 그들에게 포도주를 마시라고 하셨다. 이 시대에 무슨 방음장치가 있었을까? 이들이 하는 말들은 고스란히 옆방의 고관들에게 들렸을 것이다. 그러니 예레미야와 레갑 사람들은 큰 모험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레갑 사람들은 포도주를 거절한다.


렘 35:5-11 내가 레갑 사람들의 후손들에 포도주가 가득한 종지와 잔을 놓고 마시라 권하매 그들이 이르되 우리는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겠노라 레갑의 아들 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와 너희 자손은 영원히 포도주를 마시지 말며 너희가 집도 짓지 말며 파종도 하지 말며 포도원을 소유하지도 말고 너희는 평생 동안 장막에 살아라 그리하면 너희가 머물러 사는 땅에서 너희 생명이 길리라 하였으므로 우리가 레갑의 아들 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령한 모든 말을 순종하여 우리와 우리 아내와 자녀가 평생 동안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살 집도 짓지 아니하며 포도원이나 밭이나 종자도 가지지 않고 장막에 살면서 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령한 대로 다 지켜 행하였노라 그러나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이 땅에 올라왔을 때에 우리가 말하기를 갈대아인의 군대와 수리아인의 군대를 피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자 하고 우리가 예루살렘에 살았노라


예레미야가 포도주를 권하니, 레갑 사람들은 전혀 포도주를 마시지 않는다고 말했다. 자기들의 선조인 요나답이 술을 마시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이 레갑 사람들은 지독하게도 유행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선조가 술을 마시지 말라고 했다고 입에 대지도 않다니! 그뿐만 아니다. 집도 짓지 말고 농사도 짓지 말라고 해서 불편하고 괴로운 유목민의 삶을 살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유목민이 아니었던가? 유목민의 대표 격인 유대인들도 모두 정착하고 농사를 짓고 도시를 세웠는데, 도대체 이 사람들은 시대를 몰라도 너무나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예루살렘으로 공격해 오는 바벨론 왕을 피해 예루살렘으로 피신을 했다고? 이런 바보스러운 사람들이 어디 있는가 말이다. 전혀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응답이었다. 이 촌스럽고 세상 물정 모르는 바보들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시는 것이었다.


렘 35:18-19 예레미야가 레갑 사람의 가문에게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너희 선조 요나답의 명령을 순종하여 그의 모든 규율을 지키며 그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행하였도다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하시니라 레갑의 아들 요나답에게서 내 앞에 설 사람이 영원히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들을 칭찬하실 뿐만 아니라 놀라운 축복의 말씀, “이들 가운데 하나님 앞에 설 자가 끊이지 않으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들려주셨다. 하나님의 백성도 아닌, 약속의 자손도 아닌 이 겐 족속에 속하는 이방인들에게 이런 큰 축복을 내리셨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필이면 유대 고관들이 모여 있는 방 옆에서 말이다. 바벨론 왕이 쳐들어와 유대의 고관들이 성전으로 피신했을 때, 그 방안에 가득한 고관들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봐라! 유대의 고관들아! 너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시온에서 내가 너희를 지킬 것이라고 호언장담하지만, 나는 너희를 책망하고 오히려 이런 촌티 나고 유행을 모르는 이방인들을 칭찬한다. 내 앞에 영원히 설 자들은 너희가 아니라 바로 이 이방인과 같은 사람들이다!”


유대 고관들이 들으면 분노할 만한 그런 말씀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하나님은 왜 그러셨을까? 도대체 이 레갑 사람들이 누구이기에 이렇게 하셨을까?





레갑 사람들 이야기


레갑 사람들은 겐 족속에 속하는 이방인들이었다. 이 겐 족속은 모세의 장인이었던 이드로가 속해있던 부족이었다. 이들은 모두 떠돌아다니는 유목민이었고, 오래전부터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이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하나님의 산 시내에 이르렀을 때, 모세에게 찾아와 사역의 조언자가 되었던 사람이 바로 모세의 장인 이드로다. 그는 미디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제사장이었다. 겐 족속은 참으로 좋은 신앙인들이었다. 그들의 후손들 중에서도 특히 레갑 사람들이 신실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아합과 이세벨은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다. 그런 이유로 엘리야와 하나님의 사람들을 핍박하고 하나님 앞에 더러운 죄악을 범했다. 그때, 예후가 나타나 그 죄악으로 가득한 나라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개혁했다. 그런데 이 예후가 북왕국의 왕이 될 때, 함께 힘을 모아 그를 도운 사람이 바로 레갑 사람들의 조상인 요나답이었다. 열왕기하 10장에 예후가 자신의 개혁이 하나님 앞에 신실했음을 인정받으려고 요나답을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요나답에게 인정을 받으면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만큼 요나답은 하나님 앞에 신실한 사람이었다.


바로 이 믿음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 요나답이 자기 자녀들에게 포도주를 마시지 말고, 집도 짓지 말고, 농사도 짓지 말고, 유목민이 되어 끝없이 유랑하라고 가르친 장본인이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 앞에 올바로 사는 법이라고 말이다.


요나답은 왜 그렇게 가르쳤을까? 또 하나님은 왜 그 가르침을 그토록 기뻐하셨을까?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의 길과 요나답의 결정이 전혀 반대였기 때문이었다. 유랑하는 백성이었던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면서 그들은 점점 타락하기 시작했다. 농경문화로부터 음주문화, 유흥문화가 시작되었다. 서로 더 가지기 위해 땅과 인력을 더 많이 소유하려는 경쟁이 시작되었다. 비록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법칙이 있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요나답은 그렇게 타락하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보며, 그 안에 일어나는 음모와 혈투들을 바라보며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렘 35:14 레갑의 아들 요나답이 그의 자손에게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 한 그 명령은 실행되도다 그들은 그 선조의 명령을 순종하여 오늘까지 마시지 아니하거늘 내가 너희에게 말하고 끊임없이 말하여도 너희는 내게 순종하지 아니하도다


하나님은 순종하지 않았던 유대민족들과 순종함으로 실행되었던 요나답의 명령을 비교하셨다. 여기서 ‘실행되도다’라는 말은 히브리어의 ‘쿰’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일어나다’, ‘서다’라는 뜻으로 쓰이는데 ‘일어서는 행동’을 가리키거나 혹은 ‘어떤 일을 결단하였다’라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여기서는 ‘요나답과 그의 가족들이 결단하였다’는 의미로 쓰였다. 유대 백성은 세상의 유행을 받아들이고 그 유행을 따라 죄를 짓고 살았지만, 요나답과 그의 가족들은 세상의 풍조에 편승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불편함을 선택하였다. 결코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사람들이 되기로 했다. 그리고 무려 그 후로 240년이 지난 후에도 그 선택은 계속 진행 중이었다. 어떤 학자들에 의하면 시리아 지역과 아라비아 지역에 지금도 ‘레갑’이라는 이름의 사람들이 요나답의 신앙을 지키며 유목민으로 살고 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특별히 사랑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레갑 사람들은 약속의 자손도 아니었다. 역사의 주역도 아니었다. 지금도 세계의 한 귀퉁이에서 이름도 없이, 문명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유목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순수하고 거룩한 신앙의 삶이 있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약속의 백성이자 역사의 주역이었던 유대인들보다 이들을 더 칭찬하셨던 것이다.


요즘은 나를 돌아본다. 주위를 둘러보면 신앙인들이라고 하면서 더 세상 사람처럼 사는 이들이 있다. 세상의 유행을 따라가는 것이 가장 잘 하는 일이고, 세속적인 삶을 잘 사는 것이 성공인 양 말하는 가짜 신앙인들이 너무 많다. 그런데 나는 어떤가? 나도 가짜 신앙인은 아닌가 말이다. 예수님께서 왜 바리새인들에게 “세리와 창녀가 너희보다 먼저 천국에 들어가리라!”라고 말씀하셨을까?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전혀 예외가 아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먼저 알고, 먼저 믿은 자라며 우쭐하고 교만하다면, 그러면서도 전혀 성결하지 않고 순수하지 않고 거룩하지도 않다면, 세상의 유행을 따라 거기에 편승하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과 전혀 다른 길을 간다면, 하나님은 여지없이 우리에게도 말씀하실 것이다.


“저 세상에 있는 사람들, 너희가 지옥에 갈 거라고 비웃는 그들이 너희보다 먼저 천국에 들어가게 되리라!”





유행보다 믿음을 따르라!


나는 유행에 많이 뒤처지는 사람이었다. 어려서부터 속칭 ‘메이커’라는 브랜드 제품들을 많이 가져보지 못했다. 항상 옷도 어머니께서 사 주시는 대로 입었고, 신발도 사 주시는 대로 신었다. 항상 시장에서 산 옷, 시장에서 산 신발을 신었다. 내 물건들은 거의 대부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회사들의 제품이었고, 때로는 유명 제품들을 흉내 낸, 조잡하고 우스운 것들도 있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에는 친구들에게 속칭 ‘짝퉁’을 입고 신었다고 놀림을 받았던 적도 있었다.


내가 중학생이 되고 나서 얼마 후, 공장을 다니시던 어머니는 내게 국산 브랜드의 소위 ‘메이커’ 운동화를 사 주셨다. 나는 처음으로 텔레비전에 광고가 나오는 회사의 신발을 신어봤다. 그 운동화는 외국제품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어머니 월급의 5분의 1에 달하는 비싼 물건이었다. 신발을 사면 항상 검은 비닐봉지에 넣어 왔는데, 처음으로 종이봉투 안에, 그것도 튼튼한 종이상자에 든 신발을 받아 본 것이었다. 그날은 세상이 다 내 것 같았다.


나는 첫날 그 운동화를 신어보고 또 신어보고, 결국 끌어안고 이부자리에 들어갔다. 아침에 학교에 신고 가서는 하루 종일 조심조심 다녔다. 저녁에 들어와서는 제일 먼저 욕실에 들어가 신발 바닥의 흙을 닦아 방 안에 들여놓았다. 그렇게 그 운동화를 며칠 동안 신었다.


얼마 후 집에 도둑이 들었다. 너무 더워서 거실에 나와 자고 있던 나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어머니께서 “도둑이야!”하며 소리를 지르시는 바람에 놀라 깨어보니 이미 도둑은 사라지고 없었다. 어머니께서는 화장실을 가시려다가 누가 서 있는 걸 보시고 나인 줄 아셨다고 했다. “물 먹으려고?”하고 묻는데 갑자기 멈칫하는 모습을 보고 거실 바닥을 보니 내가 누워 자고 있었던 것이다. 놀라서 소리를 지르니 도둑이 그 길로 줄행랑을 친 것이었다.


다행히 사람은 아무도 다치지 않았고, 잃어버린 물건도 없었다. 하긴 그때 우리 집에는 훔쳐갈 물건도 없었다. 딱 하나만 빼고 말이다. 바로 내 운동화. 우리 집에서 가장 비싼 신발. 그것만 없어졌다. 도둑은 아마도 내 또래의 학생이었던 모양이다. 어쩌면 내가 새로 산 신발을 보고 계획적으로 들어온 학교나 동네의 친구였을지도 모른다. 이 추리가 맞는다면 나 때문에 친구 하나가 도둑이 되었다.


사실은 친구들의 신발을 보며 어머니께 투정을 했었다. 다들 좋은 신발을 신고 다니는데 나만 시장에서 산 신발을 신는다고 한마디 했는데, 그렇게 한마디 하고 나는 잊어버렸는데, 어머니는 아들의 말을 잊지 않으셨던 것이다. 나중에 어머니께 그날의 이야기를 들었다. 월급을 탔다고 공장의 아주머니들과 누나들이 모두 근처의 시내로 놀러 나갔다고 했다. 같이 가자고 해서 그러겠다고 하셨는데, 어느덧 신발을 사서 끌어안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에 앉아 있었다고 했다. 차라리 공장 사람들과 신나게 놀고 왔으면 스트레스라도 해소되었을 텐데, 그 일은 허튼 일이 되었다. 쓸 데 없이 비싼 신발만 사 오신 것이다. 결국 그 도둑은 어머니의 헌신을 훔쳐가고 말았다.


나는 꽤나 오랫동안 그 운동화 때문에 실의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나는 별로 비싼 물건에 관심을 갖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소위 명품이라는 것에 대해 크게 관심 갖지 않는다. 그때 이후로 변하지 않는 생각이 하나 있다면, 돋보이는 명품의 이면에 있는 그림자를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유행을 좋아한다. 그래서 모두 유행을 따라 살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그 이면에 있는 그림자는 잘 알지 못한다. 그 유행과 풍속의 조류에 편승하는 순간, 휩쓸려 돌이킬 수 없는 결과에 도착하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좋은 것이 좋은 게 아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요나답의 눈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결단이 필요하다. 옳은 일을 위해서는 불편함을 감수할 수 있는 사람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사용하신다. 세상의 지도자들이나 주류세력들이 아닌, 흔히들 말하는 성공한 사람들도 아닌, 오직 믿음을 위해 불편함도 감수할 줄 아는, 그런 결단력 있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계신다. 세상의 권세를 잡은 이들 앞에서 크게 칭찬하시려고 말이다.





엡 4: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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