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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태현 Sep 02. 2017

마이너리티 리포트 05
일등이 아니라도 가슴을 펴라

마이너리티 리포트 #05




개천에서 용 난다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같은 수석합격자의 웃지 못할 대답을 들은 지 오래되었다. 어느 학원 원장의 말을 빌자면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고 한다. 부촌에 사는 사람들을 조금 알게 되면서 정말 그런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든 적도 있었다. 조금 더 절망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돈이 사람을 만든다. 우리는 지금 그런 세상을 살고 있다. 똑같이 뮤지컬 배우가 되고 싶어도, 시골에 살고 있는 가난한 학생에게는 이루기 힘든 꿈이다. 하지만 부촌에 살고 있는 어떤 학생에게는 그저 선택일 뿐이다. 부촌의 학생들은 결정이 되기만 하면 그때부터 부모가 나선다. 돈이 나서고 인맥이 나서기 시작한다. 유명한 학원에서 연기지도를 받고, 때때로 이름난 배우나 교수들에게도 지도를 받는다. 이미 준비가 다 되어 있었던 것 마냥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된다. 화가가 되고 싶다면? 그도 마찬가지다. 의사가 되고 싶다면? 배우나 교수들이 아닌 유명한 과외선생이 붙게 될 것이다. 그 말고는 마찬가지다. 물론 그렇게 준비한 모두가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게 되진 않는다. 학교가 바뀔 수 있고, 때로는 진로의 방향이 바뀌기도 한다. 그러나 의지만 있다면 그저 과정일 뿐이지 거의 모두 그렇게 된다. 실제로 나는 그런 사람들을 보았고 여럿 알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고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매우 교만한 말이다. 사람이 무엇이 되는 일, 사람이 무엇을 만들어 내고 성취하는 일이 오직 사람의 능력에만 달린 일인가 말이다. 하나님께서 손을 대시면 개천도 바다가 될 판에 어찌 그 안에서 용이 나지 못한다 할 수 있을까?


개천에서 용 나는 게 뭐 대수인가? 용 될 것이 개천에 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그리고 또 용이 아니면 어떤가? 이 세상은 용이 아니라도 할 일이 너무나 많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용”이 아니라도 말이다. 하나님은 개천에서 용 나게 하시는 분이시며, 또 용이 아니더라도 그를 통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일들을 하실 수 있다.


내게는 청소년이나 청년들을 위한 집회에 설교를 할 일이 자주 있는데, 그럴 때면 나는 꼭 이 사람을 소개한다. 룰라 다 실바(Luiz Inacio Lula da Silva), 브라질의 35대 대통령이었던 사나이다. 만약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이 사람에 대해 아직 모르고 있다면, 빨리 인터넷을 검색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의 일생을 10분 동안만 따라가 보라. 당신은 새로운 희망을 보게 될 것이다. EBS에서 만든 “눈물의 룰라”라는 짧은 두 편의 동영상만 보더라도 당신은 분명 크게 감동하게 될 것이다.


룰라는 가난한 가정에 태어나 이미 일곱 살에 가계를 위해 땅콩 팔이, 오렌지 장사, 구두닦이 등을 해야 했다. 열네 살에는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채 선반 노동자로 최저 임금을 받으며 노동을 시작했다. 열여덟 살에 새끼손가락 하나를 잃고는 실업자가 되었다. 도무지 희망이 없는 그, 가난하게 태어났고, 배우지 못했으며, 더 이상 향상되기 어려웠던 그였지만 그가 세계 최악의 빈부격차를 가진 나라에 대통령이 되었다.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그에게 대통령이 되어 받았던 증서가 자신이 받은 첫 번째 증서라고 했다.


그가 이룬 업적은 참으로 위대하다. 그는 브라질을 세계 8위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시켰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걸고 그들에게 생활비 지원과 함께 아이들의 교육을 장려하는 ‘볼사 파밀리아’라는 구제금융정책이 주효했다. 그로 인해 빈민층이 중산층으로 올라오면서 경기가 활성화되고 국가경제가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물론 그의 이런 업적이 위대하지만 무엇보다도 위대한 것은 그의 마음과 정신이다. 권세를 쥐고도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눈물을 흘릴 수 있었던 그의 마음, 정책이나 자본이 아니라 사람에 희망을 걸 수 있었던 그의 정신, 자신의 임기를 마칠 때 모든 업적을 가난한 국민에게 돌리고 미련 없이 권력을 내려놓았던 그 겸손함이 룰라의 참된 위대함이었다.


이 이야기를 들어도 사람들은 먼 나라의 이야기이기에 현실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곤 한다. 브라질이니 가능하다는 그런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항상 이렇게 묻는다. “브라질이 세계 최대의 빈부격차를 가진 나라였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렇다 빈부격차가 세계 최고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그만큼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인정받기 어렵다는 말이 아닌가? 우리나라도 부촌과 빈촌의 차이가 엄청난데, 아무리 극복하려고 해도 극복하기 어려운 벽이 존재하는데, 브라질은 그보다 더했다는 말이다. 브라질에도 인재들은 많다. 인구를 따져보라. 브라질이 어디 인구 몇 만 명으로 이루어진 나라인가? 브라질을 모르겠거든 지금 세계지도를 펴고 우리나라랑 브라질의 영토를 비교해보라. 그 큰 나라 브라질에 인재가 없어서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으며, 또 세계가 깜짝 놀랄만한 업적을 이루었겠는가?


만일 한 사람도 그런 사람이 없다면,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다. 그렇지만 최소한 한 명이 있지 않은가? 아니 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가만히 주위를 돌아보면 아직도 개천에서 용이 나고 있다.


예로부터도 개천에서 용이 많이 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개천에서 용 났다.’는 말이 생겨난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가 끝났다는 말은 제발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절대로 그렇지 않으니 말이다. 지금도 개천에서 용 난다. 분명히 그렇다. 만일 무언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한다면 그는 자신의 오만을 고쳐야 할 것이고, 전혀 가진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한다면 그는 자신의 비겁함을 고쳐야 할 것이다. 개천에서 용 난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용이 안 되면 어떤가? 그렇다고 가슴을 움츠리고 있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지 않은가? 용이 아니더라도 세상에는 우리가 할 일이 너무나 많고,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아름답고 거룩한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그러니 가슴을 펴고 당당히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의 계획 속으로 힘차게 돌진하라!






게네사렛 마을 사람들 이야기     


이쯤에서 마태복음의 한 구절을 읽어보았으면 좋겠다.


마 14:34-36 그들이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니 그곳 사람들이 예수이신 줄을 알고 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모든 병든 자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다만 예수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니라


게네사렛이라는 이름이 그렇게 귀에 쏙 들어오는 지명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게네사렛 호수’라는 지명을 기억할 것이다. 신약성경을 읽다 보면 나오는 호수의 이름이다. 그런데 사실 이 게네사렛 호수는 두 개의 다름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 하나는 ‘갈릴리 호수’이고 다른 하나는 ‘디베랴 바다’이다. 그렇다. 게네사렛 호수가 바로 갈릴리 호수이고 디베랴 바다이다. 이 호수는 이름이 셋이나 된다.


우리는 흔히 갈릴리 호수라고 부르는데 이 명칭은 구약시대에는 없었던 것이다. 원래의 이름은 ‘긴네렛’, 즉 ‘게네사렛’이다. 이 이름은 ‘열 개의 동산’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데 아마도 호수를 둘러싼 여러 개의 산들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듯싶다.


신약시대에 와서 ‘갈릴리’라는 이름이 생겨났는데, 이 ‘갈릴리’는 ‘주변, 지역, 변두리’라는 의미로 쓰인다. 이 지역은 이스라엘 북부에 위치한 땅인데, 소아시아와 유럽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이주해 들어와 살았다. 이방인들이 유대 땅에 많이 유입되면서 예루살렘 주변의 유대인들은 이 갈릴리 지역에 사는 유대인들을 무시하고 하찮게 여겼다. 그도 그럴 것이 워낙 많은 이방인들이 그곳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 사는 유대인들은 율법 조항들을 지키기에 버거웠다. 유대인이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도 부정해지고, 식사를 같이 해도 부정해질 뿐만 아니라 심지어 악수를 해도 부정해지니 율법적인 정결함을 지키기에 이 지역은 도무지 불가능한 곳이었다.


그 덕분에 갈릴리 사람들은 소위 거룩하다는 유대인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받고 ‘무식한 사람들, 주변인, 촌놈’이라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일단 갈릴리 출신이라면 좋은 대접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나다나엘이 처음에 예수님께서 나사렛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며 무시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사렛도 갈릴리 지역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갈릴리의 유대인들은 같은 동족에게 천대를 당하는 사람들이었다. 거기에 더해 그들은 열등감과 박탈감에도 시달려야 했다. 이 지역의 이름 중에 ‘디베랴’라는 이름이 있다는 것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디베랴’라는 이름은 로마 황제인 ‘티베리우스’를 일컫는다. 헤롯 안티파스가 그리스 문화를 너무나 동경한 나머지 도시를 세우고 그 도시를 로마 황제에게 바쳤던 것이다. 그 도시에는 이두메 사람들인 헤롯의 일족들과 로마의 귀족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은 광활한 평지에서 너무나 윤택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에 비해 그곳에 사는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그토록 멸시하는 이방인들보다 훨씬 비참한 삶을 살고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이 가난한 어부들이었고, 헤롯과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쳐야 하는 고달픈 인생을 살고 있었다.


이런 이유들로 이 지역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동네 이름을 ‘게네사렛’이라고 불렀다. 결코 ‘갈릴리’나 ‘디베랴’라고 부르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갈릴리’라고 부르자니 스스로를 ‘촌놈’이라고 부르는 것이 되니 동족들에게 당하는 멸시가 기분 나빴을 테고, ‘디베랴’라고 부르자니 부자에 권력을 가진 이방인들에 대한 열등감에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자신들이 자신들의 고향을 부를 때는 꼭 ‘게네사렛’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그래서 이 아름다운 이야기에서도 이 땅을 ‘갈릴리’나 ‘디베랴’가 아닌 ‘게네사렛’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게네사렛에’ 예수님께서 찾아오셨다. 예수님은 이미 게네사렛 지역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며칠 전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었다. 사람들은 아마 예수님께서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이 보인다.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시자마자 진풍경이 벌어진다. 사람들이 새까맣게 몰려왔던 것이다. 누군가 “예수시다!”라고 확인을 해서 외치니 그 몰렸던 사람들이 예수이신 것을 확인하고 모두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몰려올 때는 언제고 갑자기 한꺼번에 어디론가 흩어져 달려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해보자. 얼마나 특별한 광경인가 말이다.


아마도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게 도대체 뭔 일이냐?”며 어안이 벙벙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윽고 다시 사람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나기 시작한다.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몰려나온 모양이다. 흩어졌던 사람들이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사람이란 사람은 다 끌고 나오는데 그중에는 심지어 환자를 누인 침대를 들고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후로 이 지역에서는 예수님께서 계시다는 말만 들으면 온 동네 사람들이 몰려나왔고, 심지어 제발 옷 가에 손만이라도 대게 해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믿음이 좋은 사람이 한 둘 있으면 간증거리가 된다. 세속적인 말로 상품성이 있다 하겠다. 그런데 이 지역에서는 웬만한 믿음으로는 명함도 내밀기 힘들다. 열두 해 혈루증을 앓던 여인을 기억하는가?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기만 해도 낫겠다는 믿음을 가졌던 여인. 그래서 예수님께서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라!”라며 믿음을 칭찬하셨다. 그런데 게네사렛에는 이런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다. 어디를 가든 그런 사람들 투성이었다. 그 사람들이 모두 다 고침을 받았다는 것이다.


지붕을 뚫고 침상을 내려 중풍병자를 구원받게 한 친구들을 기억하는가? 그들의 헌신도 성경은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 큰 믿음으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 동네에는 그런 믿음 좋은 친구들이 한 둘이 아니다. 자기 일도 아닌데 너도나도 남의 침대를 메고 몰려나왔다. 예수님에 대한 신뢰가 기가 막힌 동네였다.


나는 이런 공동체에 속하고 싶다. 이런 마을이 있다면 당장 이사를 가고 싶을 정도다. 세계의 역사를 바꿔놓은 교회가 어디로부터 시작되었는가? 바로 이 ‘촌놈’들이 모인 게네사렛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비주류였던 멸시당하고 천대받고 열등감에 억눌려 있던 이 게네사렛 사람들로부터 초대교회는 시작되었다. 예수님의 제자 중 열한 명이 바로 이 게네사렛 출신들이었고,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았던 120명의 성도들 대부분이 바로 이 게네사렛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자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걸었고, 오히려 자기들을 죽이려는 사람들을 향해 천국을 나누어주었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일등이 아니라도 가슴을 펴라


처음에 이 시리즈를 시작할 때, 하갈의 이야기 앞에 한 코미디언의 우스운 절규를 이야기했었다.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세상이 어떻게 더러울 수 있는가? 쓰레기가 가득하면 더러운 것인가? 물론 그런 세상도 더러운 세상이겠다. 하지만 우리가 ‘더러운 세상’이라고 말할 때, 그런 뜻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내가 신학대학교에 다닐 때, 농촌목회를 하시는 한 목사님으로부터 ‘더럽다’라는 말의 뜻을 배웠다. ‘더럽다’는 말은 ‘덜’과 ‘없다’가 붙어 생긴 말이라는 것이다. ‘덜’은 ‘덜다’라는 뜻이기에 ‘더럽다’는 말은 ‘덜어냄이 없다’라는 뜻이 된다. 전혀 나누지 않는 세상. 한쪽으로만 쌓여 도무지 흐르지 않는 세상은 ‘더러운 세상’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하루 종일 오물을 뒤집어쓰고 일하는 환경미화원이 더러운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깨끗한 옷을 입고 명품가방을 들었어도 나눔이 없이 혼자만 배 불리는 사람은 ‘더러운 사람’이다.


‘더러운 신앙인’도 있을까? 자기 혼자만 영적인 혜택을 누리면서 신앙생활하는 사람들, 도무지 복음이나 은혜를 나누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을 이 공식에 넣어 보면, 그들은 ‘더러운 신앙인’ 임에 분명하다.


우리는 게네사렛 사람들에게서 배워야 한다. 아무런 상관없는 이들에게까지 스스로 낮아져 복음을 전해주었던 천대받고 가난했던 게네사렛의 사람들처럼 우리도 우리의 더러움, ‘덞이 없음’을 벗고 기쁘게 뛰어다니며 사람들에게 천국을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개천에서 용 나지 않는 세상은 없다. 지금도 개천에서 용이 난다. 하지만, 꼭 용이어야 하는가? 꼭 일등이어야 하느냐 말이다. 일등이 아니어도 ‘더러운 인생’이 아니면 충분하지 않은가? 우리에게 무언가 나누어줄 것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지금 나누고 있다면, 우리는 일등보다 행복한 사람들이다. 세상이 말하는 ‘용’, 세상이 좋아하는 ‘일등’은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나님은 결코 일등만 사용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일등이 아닌 사람들, 특별히 꼴등인 사람들을 즐겨 사용하셨다. 하나님의 즐겨찾기에는 우리들의 주소가 들어있다. 기를 쓰고 일등이 되려고 하는 사람 말고, 일등이 아니더라도 가슴을 펴고 당당히 자신 앞에 펼쳐진 삶으로 돌진할 수 있는 사람들, 일등이 목적이 아니라 나눔이 목적이고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도와주기 위해 사는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아름다운 이야기들의 주인공이 되기에 더욱 적절하다.


그러니 일등이 아니라고 움츠리지 말고, 가슴을 펴라! 당당히 당신 앞에 펼쳐진 세상을 향해 주님을 신뢰함으로, 믿음으로 돌진하라!




고후 4:8-10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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