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리티 리포트 #06
창 29:31-35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자녀가 없었더라 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레위라 하였으며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
우리가 추구해야 할 꿈
청소년 혹은 청년집회 강사로 초청될 일이 종종 있는데, 항상 제일 첫 집회에 그들에게 묻는 질문이 있다. 그것은 바로 “당신의 꿈은 무엇인가?”하는 것이다. 질문을 받은 젊은이들 중 많은 수가 조용히 고개를 숙인다. 그러나 그중에서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이들이 있다. 그들에게 다시 이 질문을 하면 그들은 내게 여러 가지 대답을 들려준다. 의사, 뮤지컬 배우, 사업가, 교사, 외교관, 대통령, 가수... 다른 생김새만큼이나 다른 꿈들을 이야기한다. 어떤 이들은 매우 세세하게 자신의 계획을 말해주기도 한다. 가령 연도별로 나누어서 앞으로 몇 년 동안은 무엇을 준비하고 그 후 몇 년 동안은 어떤 일을 할 것이며, 그리고 결국 무엇이 되겠다고 자신의 포부를 밝힌다. 그러면 나는 그들에게 충격적인 말을 해 준다. “그 꿈은 잘못되었다. 그것은 꿈이 아니다.”라고 말해준다. 때로는 어린 학생들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이 모질게 생각되어 마음이 아프지만, 사실은 사실이다. 그런 것들을 꿈을 꾸기에 얼마나 불행하게 사는 이들이 많은가 말이다.
꿈이란 내가 무엇이 되는 것이 아니다. 꿈이란 내가 무엇이 되지 못해도 그것만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어야 한다. 또한 동시에 꿈이란 내가 무엇을 얻는 것이 아니다. 내가 아무것도 얻지 못해도 그 일만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 그것이 참된 꿈이다.
자연의 이치가 그렇다. 우리가 굳이 성경을 보지 않더라도 길가에 있는 꽃과 나무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진리가 있다. 꽃과 나뭇잎은 열매를 위해 있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도 짧은 기간이 지나고 나면 시들어 바닥에 그 잎을 뿌린다. 나뭇잎은 더 오랜 사이를 지내지만 마찬가지로 떨어져 거름이 된다. 그렇게 시들어 스러지는 꽃과 잎은 열매를 남긴다. 자신의 일생을 다해 자신들이 거둘 수 없는 열매를 여는 것이다. 그렇다면 열매는 어떤가? 열매는 씨앗을 위해 있다. 꽃으로부터 태어나 잎이 주는 양분을 머금고 살을 찌워 제 안에 있는 씨앗의 먹을거리를 준비한다. 자신을 위해 무엇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씨앗을 위해 받아 쌓아두는 일만 하는 것이다. 씨앗도 마찬가지다. 씨앗은 새싹을 위해 있다. 제 몸을 깨뜨려 싹을 틔우고 열매를 썩혀 양분을 만들어준다. 오로지 새싹을 위해 자기의 몸을 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꽃과 나뭇잎, 열매와 씨앗은 모두 새로운 생명을 위해 있는 것이다. 자신들이 볼 수 없는 영광을 위해,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위해 스스로를 전제(奠祭)로 땅에 붓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연을 보며 사도바울의 기쁨을 알 수 있다. 사도바울도 꿈꾸는 자였지만,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하나님 나라를 위해 꿈꾸는 자였다. 새로운 생명들의 탄생을 위해 그는 이렇게 기도하고 소원했다.
빌립보서 2:17-18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사도바울은 빌립보교회를 향해 자신이 기름처럼 부어져 땅에 뿌려질지라도 기뻐할 것이라 했다. 정말 우리는 그런 일을 기뻐할 수 있는가? 자신이 제물로 드러나지 않아도, 또 자신의 섬김이 칭송받지 못해도 그저 그 일을 위해 이름 없이 스며들었더라도 기뻐할 수 있을까? 바로 여기에서부터 우리의 고민과 불행이 시작된다. 우리는 무엇이 되려 하고 무엇을 얻으려 한다. 그러니 진정한 꿈은 꿈에도 볼 수 없으며, 꿈을 이루었다 해도 기쁨이 넘치는 인생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산다. 보라! 의사들은 모두 행복하며, 뮤지컬 배우들은 다들 즐거운 인생을 사는가? 흔히 꿈을 이루었다는 사람들의 성공스토리를 들으면 하나같이 즐겁고 행복한 인생 같다. 그러나 그 곁에 가까이 다가가 보면 당혹스럽게도, 부족함으로 목말라하는 피곤하고 지친 영혼들을 만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어떤 꿈을 꾸어야 하고, 어떤 것을 바라야 하는가? 우리는 비극적인 시작에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은 위대한 민족의 어머니를 통해, 우리가 꿀 꿈과 우리가 바라야 할 것들을 생각해보자.
뒤바뀐 레아의 꿈
‘이스라엘’이라고 불리던 야곱에게는 네 명의 부인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둘은 자매였다. 그런데 얽히고설켜 동생이 본처가 되고, 언니는 첩이 되었다. 물론 누군가 ‘장자인 유다가 레아의 아들이니 본처는 레아가 아닌가?’하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자세히 읽어보면 결코 유다가 장자가 아니었음과, 라헬이 본처로서 대우받았음을 알 수 있다. 창세기 마지막 장면에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을 받는 아들들이 누구의 아들들인가? 바로 요셉의 아들인 에브라임과 므낫세이다. 그리고 출애굽을 할 때도 두 지파는 장자 지파로서 맨 앞에서 행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니 레아는 결코 본처도 아니었고, 유다는 아버지로부터 장자로 지목받은 아들도 아니었다. 그런데 결론적으로는 유다지파가 이스라엘의 장자 지파가 된다. 어떻게 된 이유에서인지 에브라임 므낫세는 역사 가운데 사라지고 유다만이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에 선택되는 은혜를 입는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어떤 일들이 그들에게 일어났던 것일까?
우리는 그 첫 번째로 동생의 작은댁이 되었던 언니 레아의 이야기를 살펴보아야 한다. 레아에게 일어났던 기적적인 변화가 우리의 궁금증을 해결해 줄 하나의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야곱에게 레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 이유가 시력이 나빠서 행동이 둔하고 지혜로워 보이지 않았는지, 아니면 눈매가 예쁘지 않았는지 모르겠지만(창 29:17) 어쨌든 야곱이 좋아할 만한 미모는 아니었다. 그에 비하면 동생인 라헬은 곱고 아름다웠다. 야곱은 참한 여인보다 예쁜 여인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라헬은 팜므파탈의 전형적인 인물이었지만, 라헬의 자태가 곱고 얼굴이 예쁘니, 그녀가 가진 질투, 욕심, 신경질적인 성격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외모에 매혹되어서 칠 년을 며칠같이 헌신하여 그녀를 얻었다. 물론 그것이 큰 문제는 아니었다. 처녀총각이 사랑에 빠지는 데는 그것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결혼하고 살아가면서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되고 하나씩 맞춰가는 것도 큰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기치 못했던 사건이 발생했다. 레아의 입장에서 보면 당혹스럽고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저 조용히 아버지 집에서 순종하며 살다가 괜찮은 청년 만나 시집가면 그만인데, 아버지의 욕심 때문에 사기결혼의 당사자가 되고 말았다.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여 혼례복을 입고 화장을 했지만 다음날 아침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고 분노에 떨며 문을 박차고 나가는 신랑을 보며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얼마나 비참하고, 얼마나 억울했을까 말이다.
라반과 야곱의 거래가 다시 성사되고 칠일 후 두 번째 결혼식이 진행되었다. 야곱은 첫 번째 신부였던 레아를 사랑하지 않고 두 번째 신부였던 라헬을 더 사랑하였다. 결혼은 언니인 레아가 먼저 했지만, 본처는 동생인 라헬이 되었다. 그로부터 사랑받지 못한 비극적인 레아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비록 레아는 남편에게는 사랑받지 못하는 여인이었지만, 하나님께는 사랑받는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레아를 측은하게 여기시고 그녀에게 아들을 주셨다.
창 29:31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자녀가 없었더라
야곱은 비록 레아를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남편으로서의 의무는 다했던 모양이다. 최소한 저녁이 되면 레아와 라헬의 장막에 번갈아 들어갔다. 두 자매가 경쟁적인 사랑전쟁을 벌였지만, 먼저 승리의 나팔을 분 쪽은 레아였다.
창 29:32 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레아는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고 지었다. ‘르우벤’은 ‘보라. 아들이다!’라는 뜻의 탄성이다. 이 외침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남편, 자신을 첩으로 대우했던 야곱에게 당당히 아내로서의 권리를 주장하는 선언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겠지.’하고 생각했다.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였겠지만 고대 근동 지방에서 아들을 낳는다고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레아가 먼저 아들을 낳았다는 것은 그녀가 동생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선점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레아의 생각이었을 뿐... 야곱의 사랑과 인정을 받을 수는 없었다. 아들을 통해 위로받으려고 했던 레아는 오히려 큰 상처를 받았음에 틀림없다. 아무리 아내로서의 권리를 주장해도 야곱은 들어주지 않았다. 이 일로 레아는 자신이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여인이라는 사실을 더욱 깨달았을 뿐이었다. 그런 이유로 둘째 아들인 시므온을 낳고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창 29:33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자신의 사랑받지 못함이 억울하다는 것은 하나님도 아시는 사실이었다. ‘시므온’의 뜻은 ‘들으심’이다. 하나님께서 레아의 억울함을 들으셨다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었다. 그녀는 ‘제발 남편이 이 사실을 깨닫고 나를 사랑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여보, 보세요.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을 하나님도 알고 계셔요. 마땅히 주어야 할 남편으로서의 사랑을 내게 주세요.”라며 자신의 권리를 다시 한번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두 번째 아들을 낳는 일도 헛수고였다. 최소한 그녀가 갖고 싶어 하는 것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창 29:34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레위라 하였으며
세 번째 아들 레위를 낳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3’이라는 숫자는 히브리인들에게는 거룩한 숫자 중 하나였다. 완전을 의미하는 숫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직 한 명의 아이도 낳지 못한 라헬을 생각하면 레아는 완전한 승리를 거머쥔 여인이었다. “이제는 당신도 더 이상 내 존재를 부정할 수 없겠죠? 이제부터는 내가 참으로 하나님께서 연합하게 하신 당신의 아내라고요.”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셋째 아들의 이름을 ‘연합’이라는 뜻의 ‘레위’라 지었다.
아들을 셋 낳았지만 레아에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쯤 되면 오히려 상처와 패배감만 쌓여갔을 것이다. 레아는 갖고 싶었던 남편의 사랑도 얻지 못했고, 되고 싶었던 야곱의 아내도 되지 못했다. 아들 셋을 낳으며 시도했던 모든 것이 실패로 돌아갔다. 완전한 패배였다. 그러고 보면 레아는 가장 자존감이 낮은 때를 경험하고 있었을 것이다. 더 이상 추락하려야 추락할 수 없는 밑바닥까지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그랬던 그녀에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
창 29:35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
도대체 셋째와 넷째를 낳는 사이에 레아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성경은 우리에게 아무런 이야기도 들려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에게 기적이 일어난 것은 사실이다. 제일 먼저 일어났던 기적은 그녀의 말에 ‘남편’이라는 단어가 사라졌다. 르우벤을 낳을 때부터 그녀의 관심은 오로지 남편이었다. 남편의 아내가 되고 싶었고, 남편의 사랑을 받고 싶었다. 그것이 그녀의 꿈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꿈이 사라졌다. 산산이 깨져 흩어져버린 것일까? 더 이상 ‘남편’은 그녀의 꿈이 아니다. 레아의 꿈이 완전히 바뀌고 말았다.
그녀의 꿈이 바뀐 이유가 궁금하다. 성경이 가르쳐 주지 않으니 그 이유를 한 번 추측해 보자. 내 추측은 이렇다. 아마도 그녀는 더 이상 추락할 수 없는 밑바닥의 좌절을 경험하며, 자신의 힘으로는 사랑받을 수도, 아내가 될 수도 없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최선을 다해 최고의 정점을 찍었음에도 불구하고, 세 아들을 낳았음에도 그녀는 참된 기쁨과 행복을 얻지 못했다. 모든 사람이 그녀의 세 아들을 보며 그녀를 ‘사랑받는 아내’로 생각했을지 모른다. 얼마나 그 일이 질투가 나는 일이었는지 라헬은 언니를 시기해서 야곱에게 “내게 자식을 낳게 하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고 협박을 했다.(창 30:1) 그러나 그런 성취를 이루었어도 레아에게 기쁨은 없었다. 어느 순간 레아는 깨달았을 것이다. ‘남편’이 꿈인 이상 결코 자신의 인생에 기쁨과 행복은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녀는 ‘꿈’을 바꾸기로 결심한다. 자신이 ‘얻을 것’, 자신이 ‘될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 ‘하실 일’을 꿈으로 삼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러고 나니 레아의 입에서 ‘남편’이라는 단어가 사라졌다. 그 결과 ‘불평의 말’이 사라지는 두 번째 기적이 일어났다. 레아의 이전 고백들을 살펴보면, 마치 자신이 승리했다는 선언 같지만, 그 말속에 남편을 향한 불평이 녹아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말속의 ‘뼈’가 사라졌다. 그 대신 감사와 찬송이 그 자리를 메웠다. 이것이야말로 놀라운 기적이 아닌가 말이다.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레아는 유다를 낳으면서 자신이 ‘얻을 것’이나 ‘이룰 것’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을 보게 되었을 것이다. 좌절 가운데 기도하다 알게 되었든, 넷째를 낳으며 사경을 헤매다가 보게 되었든, 그녀는 분명 하나님의 계획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와 유다의 자손을 통해서 이 민족의 놀라운 중흥을 이루시고(다윗), 결국 온 인류의 구원을 이루실(예수님) 것을 레아로 하여금 깨닫게 하셨다. 조금 비약이 지나친가? 하지만, 그렇다면 왜 하필 유다를 낳으면서 그 입술에서 ‘남편’이 사라지고 ‘불평’이 사라졌는가 말이다. 그리고 하필이면 그렇게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이름을 ‘찬송이’(유다의 이름은 찬송과 감사를 뜻한다.)라고 지은 유다가 결국 이스라엘 장자의 자리를 차지하는가 말이다.
물론 이런 추측을 하지 않아도 될 만한 확실한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레아가 원했던 아내, 사랑받는 이스라엘 민족의 여주인 자리는 사람이 주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리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레아에게 그 자리를 허락하셨다. 이것은 성경의 역사에 드러난 자명한 사실이다.
레아는 그토록 이스라엘 민족의 어머니, 야곱의 아내가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인간적인 성취의 정점에서도 그 일을 이룰 수는 없었다. 남편에게 그녀는 소외된 아내였고, 하나님의 약속과는 멀어진 어머니였다. 그런데 그 모든 인간적인 야망과 꿈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찬송하기로 결정했을 때, 레아는 비로소 이스라엘 장자의 어머니가 되었다. 그때 하나님의 선택은 레아를 향하게 되었음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보게 된다.
하나님의 선택
나는 아들과 함께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한다. 우리 아들이 특히 좋아하는 영화는 SF영화이다. 그중에서도 ‘영웅들’이 나오는 영화를 특히 좋아한다. 우리는 둘 다 스파이더맨을 참 좋아한다. 특히 토비 맥과이어가 주연한 영화를 좋아하는데, 그중에서도 3탄을 보면, 소위 ‘영웅’이라고 하는 이들도 항상 선택의 기로에 서 있음을 보여준다. 외계 생명체에 마음을 빼앗겨 검은 옷을 입었던 스파이더맨이 자신의 검은 옷을 뜯어내는 장면을 보면서, 우리는 선택의 중요성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면 그 어떤 비극도 좋은 결말로 바꿀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하나님은 참으로 좋은 분이시다. 좋으신 하나님께서 누군가의 인생을 계획하실 때, 추하고 슬픈 결말로 준비하시리라는 것이 상상이 되는가? 나는 결코 그런 일을 인정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우리 모두의 인생을 기쁘고 아름답게 설계하셨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의 선택이다.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있다. 이 선택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위대한 선물인 ‘자유의지’로부터 왔다.
성경공부를 하다 보면 간혹 “하나님께서 왜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만드셔서 사람을 타락하게 하셨나요? 그런 건 만들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 아닙니까?”하고 질문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하나님을 비난한다. 좋지 않은 것을 만들어 넣고 사람을 통해 놀이를 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하나님은 좋은 분이시다. 결코 우리를 대상으로 장난을 치시는 분이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선악과나무’는 결코 우리를 낚기 위한 ‘미끼’가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자유의지의 위대한 선언’이었다. 한 시인의 말처럼 ‘사랑한다는 것으로 새의 날개를 꺾어 둥지에 두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죄를 지을 자유’와 ‘죄를 짓지 않을 자유’를 모두 주셨다. 인간의 타락 이후, 모든 인간에게서 ‘죄를 짓지 않을 자유’가 박탈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후, 우리 모두에게는 이 ‘자유’가 모두 회복되었다. 우리에게는 놀라운 ‘자유’가 있다. 이야말로 ‘천사도 흠모하는 아름다운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선택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선택하셨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하기만 하면, 언제나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당신의 놀라운 일들을 실행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비극 가운데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찬송하기로 선택하면, 하나님께 감사하기로 선택하면, 하나님의 일을 하기로 선택하면, 우리의 인생은 놀라운 ‘해피엔딩’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하나님을 선택하는 자가 하나님께 선택받은 자이다.”
우리 삶의 목적을 선택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세상적인 ‘꿈’이 아닌 진정한 ‘꿈’되시는 하나님을 선택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회복된 자유를 누려야 한다. 그리고 그 자유를 우리의 욕심을 위해 사용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선택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 거기에 주님께서 베풀어 두신 우리 인생의 참된 성취가 있기 때문이다.
수 24:14-15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