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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태현 Sep 23. 2017

마이너리티 리포트 07
사랑이 전부다

마이너리티 리포트 #07




창 45:1-5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리니 그때에 그와 함께 한 다른 사람이 없었더라 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대답하지 못하더라     






성자가 된 사기꾼


철원에서 목회를 할 때, 기자 출신의 한 장로님으로부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철원 땅에 홍천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다. ‘뭐 그럴 수도 있겠지.’하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거기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다. 철원에 이주해 온 홍천 사람들 중 대다수가 사기를 당한 사람들이었다. 6·25 전쟁이 끝나고 난 후, 한 사기꾼이 홍천에서 사람들을 속이기를 “지금 철원에 가서 말뚝만 꽂으면 모두 자기 땅이 된다. 철원으로 이주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고 했단다.


순진한 홍천 사람들이 그 말에 속아 사기꾼에게 돈을 주고 철원으로 이주를 했다. 그 모집비용이 당시에는 거금이었던 모양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활터전을 정리하고 이주비용을 마련했고, 거금을 챙긴 사기꾼은 차에 홍천 사람들을 싣고 철원 군청 앞에 모두 내려주었다. 사람들이 웅성웅성하는 사이에 사기꾼은 그 길로 줄행랑을 쳤다.


웬 사람들이 군청 앞에 모여들자 군청 직원들이 무슨 이유인지 알기 위해 군청 앞마당 나와 사람들을 만났고, 자초지종을 듣고는 놀라 당황해하며 군수에게 보고를 했다. 군수는 홍천 사람들에게 “당신들이 사기를 당했다.”고 알려주었고, 자기들의 전 재산을 잃은 홍천 사람들은 자리에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갈 곳 없는 그들은 그냥 거기서 꼼짝도 않고 농성을 시작했다. 이 일이 당시에는 큰 사회적 이슈가 되어서, 심지어 내무부장관이 철원을 방문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어찌어찌하여 부족하나마 홍천 사람들은 철원 땅에서 살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를 받았다.


실의에 빠질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실망하거나 낙심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삶을 개척하기로 결심했다. 타향살이가 시작된 홍천 사람들은 다른 이들보다 더 우직하게 열심히 일했다. 그 결과 홍천 사람들의 대부분이 부농이 되었고, 거의 모두가 철원의 유지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야기를 듣다가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그 사기꾼이 한 말이 거짓이었는가?’ 물론 당시에는 그 말이 터무니없는 사기였지만 결국 그 사기꾼의 말이 진실이 되지 않았는가 말이다. 사기꾼의 말대로 홍천 사람들은 자기 땅을 얻었고, 부자들이 되었다. 어찌 보면 이 사기꾼은 우습게도 선지자 노릇을 한 꼴이 되고 말았다.


물론 이 사기꾼이 거룩한 선지자가 될 수는 없다. 그의 말을 순수하게 믿고 고향을 떠났던 홍천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을 개척하고 부자가 되었지만, 그 사기꾼은 거짓과 죄악을 일삼는 악인일 뿐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그 사기꾼은 결코 선지자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이런 사기꾼이 성자가 된 예가 있다. 그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이다. 패역하고 망나니였던 유다가 어떻게 ‘성자’가 되었으며, 이스라엘의 장자가 될 수 있었을까? 우리는 유다의 이야기를 통해 사람을 선택하시는 하나님의 신비를 조금 엿볼 수 있다.






사기꾼, 망나니 아들 유다


요셉은 나머지 형들이 미워하는 동생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엄연히 열한 번째, 동생임에도 장자의 대우를 받는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형들 중에서도 특히 레아의 아들들에게 극심한 분노가 있었을 것이다. 동생이 장자의 대우를 받는 것보다 자신들의 어머니가 하대당하는 일이 더 억울했을지도 모른다. 요셉의 존재만으로도 화가 치미는데, 이 녀석은 잘난 체하는 녀석이었다. 가끔은 자신들의 허물을 들추어 아버지께 고자질하는 눈엣가시였다.


채색옷을 입은 귀하신 그 요셉이, 누추한 옷을 입고 양을 치는 자기들을 찾아 먼 곳까지 온 것이다. 그들은 ‘또 무언가 아버지께 고자질할 것을 염탐하러 오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순간의 분노가 그들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끝을 모르고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익명성이 보장된 공간이 만났다. 그 결과 그들은 요셉을 잡아서 죽이고는 구덩이에 던져버리기로 결심했다.


가까스로 르우벤이 그들을 진정시키고 요셉을 구덩이에 산 채로 가두어 두는 것으로 협상을 했다. 르우벤은 아버지 야곱에게 잘 보여야 할 일이 있었다. 이미 한 차례 아버지에게 큰 실수를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맏이로서의 책임감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르우벤은 요셉을 살리려고 했다. 성경은 그 사실을 친절히 일러준다.


르우벤의 시도는 일단 성공하는 듯했다. 요셉은 르우벤의 기지로 위험을 모면했다. 그러나 그 모든 수고를 엎어버린 사람은 다름 아닌 르우벤의 동생, 레아의 넷째 아들 유다였다.


유다는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서도 유독 야곱을 빼닮은 아들이었다.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였던 사기꾼 야곱의 기질을 그대로 닮았다. 잇속에 밝아 라반에게서 재물을 얻었던 야곱처럼 심지어 자신의 동생까지 팔아넘기는 사기꾼이었다.


창 37:26-27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덮어둔들 무엇이 유익할까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고 그에게 우리 손을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혈육이니라 하매 그의 형들이 청종하였더라


유다는 죄질이 나빴다. 다른 형제들은 우발적으로 이 상황까지 왔다. 하지만 유다는 매우 계획적이었다. 분노 때문이 아니라 분노를 가장하여 자신의 잇속을 챙기려는 저질스러운 목적을 갖고 있었다. 그는 몇 푼의 돈을 위해 형들을 설득하여 동생을 팔아넘긴 사기꾼이었다.






책임지는 사랑과 상처의 치유


우리는 요셉과 형들의 화해 장면을 잘 알고 있다. 결국 요셉은 형들을 모두 용서하고 자신을 팔았던 유다까지도 용서한다. 어떤 이들은 그 장면을 통해 십자가의 예수님을 상상하기도 한다.


창 45:1-5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리니 그때에 그와 함께 한 다른 사람이 없었더라 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대답하지 못하더라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자기를 죽이려 했던, 심지어 용돈벌이로 팔아버렸던 형들을 용서하며 “하나님께서 이때를 위하여, 우리 가족을 구원하기 위해 나를 먼저 애굽으로 보낸 것이니 형님들은 미안해하지 마세요.”라고 말하는 요셉의 모습은 마치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말씀하시던 예수님의 모습과 닮았다. 정말 용서의 화신이다. 어떻게 그렇게 착할 수 있을까? 그러면 정말 요셉이 용서의 화신일까?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구약판일까?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요셉은 용서 못하는 우리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요셉이 한 일을 가만히 생각해보라. 온 근동에 흉년이 들어 형들이 곡물을 사러 왔을 때, 곡물을 사러 온 형들을 정탐꾼이라고 몰아붙여 결국 레아의 아들인 시므온을 감옥에 붙잡아 두고 자기의 동생인 베냐민을 데려오게 한다. 그리고 베냐민을 안 데려올 수 없도록 곡식 자루에 그들이 치른 곡식 값을 그대로 넣어 보냈다. 곡식이 또 떨어져 형들이 애굽으로 다시 돌아올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형들이 다시 올 때는 꿈에도 그리던 자신의 동생 베냐민을 볼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을 것이다. 두 번째 형들이 왔을 때, 동생 얼굴만 보고도 복받쳐 울던 요셉의 모습을 보면 베냐민이 이 모든 속임수의 이유였던 것이 확실하다.


또, 베냐민을 데리고 왔던 형들에게 요셉이 어떻게 했는가? 모두 풀어주고 돌려보내는 척하면서 이번에는 곡식 값뿐만 아니라 자신의 은잔까지 곡식 자루에 넣어놓고서 형들을 모함했다. 그러고는 결국 자기 동생을 포로로 놓아두고 가라고 명령한다.


요셉의 이 행동은 다분히 계획적인 행동이다. 자기 형들로부터 자기 동생을 떼어놓으려는 계획이 그 안에 있었다. 아버지가 사랑했던 어머니 라헬의 마지막 남은 아들 베냐민을 형들이 분명 자기에게 했던 것처럼 해코지하지 않겠느냐는 계산에서였을 것이다. 그래서 갖은 방법으로 모함을 해 형들에게서 베냐민을 떼어놓고 자신이 보호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 다음 요셉은 분명 형들을 보내 놓고 뒤를 따라가 형들을 모조리 요절을 냈거나, 십분 양보해서 생각해도, 집으로 찾아가 아버지께 형들을 모두 고발하고, 형들이 그 가뭄에 굶어 죽든 말든 버려두고서, 아버지만 모시고 돌아오는 것이 요셉의 계획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세울 필요가 없었다. 그렇지 않은가? 이건 도무지 용서가 아니다. 처절한 복수요 응징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철저히 세웠던 요셉의 계획이 어디서 무너졌는가? 바로 유다, 자신을 애굽에 종으로 팔아 용돈벌이를 했던 그 철천지원수, 유다형의 말에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말았다. 창세기 44장 후반부에 나오는 유다의 말을 요약하면 이렇다.


“우리 아버지께는 사랑하는 아내에게서 낳은 아들이 둘 있는데, 하나는 이미 어떻게 되었는지 생사를 모르겠고, 이 베냐민 하나만 남았는데, 아버지께서 신신당부하시기로 ‘이 아들 없으면 나 죽는다.’하셔서 내가 목숨을 걸고 이 아이를 지키기로 하였으니 이 아이를 붙잡으시려거든 대신 나를 붙잡으소서. 내가 이 아이 대신 잡히겠나이다. 우리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는 모습을 내가 어떻게 보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요셉은 너무나! 너무나! 충격을 받았다.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불량배 형, 죽이느니 용돈이나 벌자며 노예로 팔았던 그 유다가 자신의 동생을 대신해 끔찍한 죄수가 되겠다니! 자 여기서 다시 한번 질문해보자. 요셉이 예수님을 닮았는가? 아니면 유다가 예수님을 닮았는가? 자신을 팔았던 형들을 응징하려고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는 요셉이 예수님을 닮았는가? 아니면 자신의 동생 대신 죄수의 몸이 되어 고난을 받겠다는 유다가 예수님을 닮았는가 말이다.


유다의 변화된 모습에 요셉은 너무나 놀랐을 것이다. 또한 자신의 동생을 보호하는 형 유다의 모습이 마치 자기를 보호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을까? 사랑받으려고 형들을 졸졸 귀찮게 따라다니다 오히려 형들에게 버림받았던 자신의 깊은 상처가 일순간에 눈물과 함께 왈칵 쏟아져 나오면서, 다 치유되는 놀라운 기적을 지금 요셉은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유다의 용기 있는 행동은 요셉을 감동시켰다. 뿐만 아니라 요셉을 치유하는 능력이 있었다. 사실 유다의 말을 처음부터 읽어보면 유다는 “아버지의 아내는 라헬 하나였고, 아버지에게 아들은 요셉과 베냐민 둘 뿐이었다.”라고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이쯤 되면 우리는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의 자존심을 깎아내리면서, 자기의 그 힘겨웠던 상처를 덮어놓고서라도 이 동생 베냐민을 대신해 죄수가 되겠다는 그의 용기와 사랑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상처와 함께 성숙한 유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창세기 38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유다의 이야기가 요셉의 이야기 전에 나와도 되고, 후에 에피소드처럼 나와도 되는데, 굳이 요셉의 이야기 중간에 유다의 이야기가 끼워있다. 분명히 창세기 38장이 지금 우리가 나누고 있는 요셉의 ‘대용서의 사건’에 중요한 단초라는 증거다. 유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성경을 읽어보면 요셉의 이야기(창 37-41장) 중간에 유다의 이야기(38장)가 슬쩍 끼어들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성경의 이 부분을 읽어보면 유다는 사기꾼일 뿐만 아니라 망나니 아들이었다. 그것이 아버지인 야곱의 편애 때문이었는지, 둘째 부인의 자식으로 태어난 열등감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아버지에게 반항하는 못된 아들이었다. 유다는 증조할아버지 아브라함으로부터 내려오는 가문의 규칙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창 38:1-5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 하니라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데리고 동침하니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유다가 그의 이름을 엘이라 하니라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오난이라 하고 그가 또다시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셀라라 하니라 그가 셀라를 낳을 때에 유다는 거십에 있었더라


형제들을 떠나 이방인들 속으로 들어갔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가나안 여인에게서 세 아들을 낳았다. 그는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하지도 않았다. 성경은 분명 결혼했다고 하지 않고, 동침했다는 말로서 그의 타락하고 문란함을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이렇듯 사기꾼에 망나니였던 유다에게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변해도 놀라울 만치 변한 그를 우리는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꽁꽁 엉켜버린 실뭉치와도 같은 가족관계를 풀어내는 놀라운 기적이 그를 통해 일어났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사기꾼에 망나니였던 유다에게 ‘엘’과 ‘오난’, ‘셀라’라고 하는 아들 셋이 생겼다. 가문의 규율에 정면으로 도전했던 못된 아들, 이방인과 함께 살려고 이방인들의 땅으로 내려가서 문란하게 살았던 그런 천둥벌거숭이 같은 유다에게도, 이 세 아들은 너무나 소중한 아이들이었다. 그런데 그 아들들이 차례로 죽는 사건이 일어난다. 먼저 ‘엘’이 죽고 둘째인 ‘오난’도 죽었다. 유다는 아마도 자신의 두 아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그때에야 비로소 요셉을 잃고 목 놓아 울었던 아버지 야곱의 깊은 슬픔을 이해했을 것이다.


유다는 남아있는 셋째인 ‘셀라’라도 살려야 했다. 혹시라도 원인이 될지 모르는 며느리 다말과 격리시켜야 했다. 그래서 다말을 멀리 고향으로 쫓아낸다. 그런데 결국 그것이 원인이 되어 자기 아들의 대를 자신이 잇는 수치를 당하고 말았다. 며느리를 쫓아 보냈던 곳에서 창녀인 줄 알고 자신의 며느리와 동침을 하고 만다. 다말이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돌로 쳐 죽이려고 단걸음에 달려갔던 그 장막에서 다말의 아이가 또한 자신의 아이임을 확인했다.


며느리가 낳은 자신의 아들 쌍둥이를 보며 유다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유다는 이렇게 말했다. “며느리야, 네가 옳다. 나는 틀렸고, 네가 옳다!” 유다는 그곳에서 자신의 모든 정당성을 포기했다. 자신과 자신의 어머니가 억울하다고 생각했던 그 이면에는 자신의 정당성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 누구도 정당할 수 없다. 유다는 그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이윽고 다말이 출산을 하게 되고, 유다는 쌍둥이 중에 둘째였던 베레스가 반대로 장자가 되는 모습을 보았다. 유다는 그때에야 사람을 선택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다. 그는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요셉을 자신의 임의대로 팔았던 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 깨달았을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을 생각해보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서는 요셉을 준비하셨지만 이토록 놀라운 화해와 용서의 사건을 위해서는 유다를 준비하고 계셨던 것이다. 유다는 자신의 상처를 통해 사랑의 사람으로, 희생의 사람으로 성숙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사랑이 전부다


목회를 하다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안타까운 것은 이단에 빠져드는 사람들을 보는 것이다. 때로는 이단에 빠지는 사람들에게 따져 묻기도 한다. “왜 뻔히 잘못된 줄 알면서도 그 길로 가느냐?”라고 말이다. 한 번은 이단에 빠졌다가 돌아온 형제에게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이단인 줄 알지만, 사람들이 너무 좋아서.”라는 대답이었다. 그렇게 잘 해주고 사랑해 주었다고 했다. 친 형제보다 더, 오래된 친구보다 더 자신을 아껴주었다고 말이다. 물론 그 사랑은 거짓 사랑이었다. 유혹하고 미혹하기 위한 꾸며진 ‘가짜 사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거짓 사랑을 믿고 싶어 한다고 말이다.


이렇듯 사람은 사랑받는다는 사실, 누군가로부터 이해받고 있다는 사실에 끌린다. 설령 그것이 잘못된 선택이라도, 때때로 그 잘못된 선택을 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믿음의 사람들에게 사랑은 정말 중요하다. 우리가 사랑이 없으면, 그 사랑없음 때문에 귀중한 생명들을 마귀에게 빼앗길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이해에서부터 출발한다. 사람을 생각하는 데서부터 사랑은 시작된다. 원래 우리말의 ‘사랑’은 ‘생각’이라는 뜻이 아니었던가 말이다. 그러니 그 사람을 생각하고 이해하고 배려하려는 시도로부터 사랑은 시작됨에 틀림없다.


르우벤은 첫 번째 아들이었지만, 그래서 말 그대로 ‘장자’였지만, 그저 아버지에게 점수를 따려 했을 뿐, 동생인 요셉에 대한 사랑이나, 아버지에 대한 이해는 없었다. 그리고 그는 변화하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이 첫째라는 배경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코 장자는 될 수 없었다.


요셉은 능력 있는 아들이었다. 야곱은 그를 가장 사랑했고, 그의 지파에게 장자 지파의 축복을 아낌없이 부어주었다. 그런 요셉이었지만, 그에게도 한 가지 부족한 점이 있었다. 그것은 자기를 희생하는 사랑이었다. 아버지를 사랑했지만,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고, 자기의 상처를 넘어 모두를 끌어안을 용기가 없었다. 가장 근접했지만,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장자로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는 못했다.


유다는 사기꾼에 망나니였다. 그로 인해 많은 시련을 겪었다. 야곱이 고난을 많이 겪었다고는 하나, 유다만큼 파란만장했을까? 그는 사랑하는 아들 둘을 잃는 고통을 겪었고, 며느리를 통해 자기 아들의 대를 잇는 수치를 겪었다. 자신이 정당하다고 여기던 모든 일에서 좌절을 맛보았다. 그 일을 통해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고, 또한 모든 선택이 하나님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기에 보잘것없고 하찮게 보이던 막냇동생, 베냐민을 대신해 죄수가 되는 데까지 자신을 낮출 수 있었다. 그래서 유다는 장자로부터 가장 거리가 먼 듯했지만,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 그 하나만으로 이스라엘의 장자가 되었다.




사랑이 전부다. 사랑은 모든 것을 초월한다. 사랑을 넘어서는 그 어떤 가치도 없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께는 사랑하는 자가 최고의 대우를 받는다. 우리는 이미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사랑’ 앞에 정말 우리는 정당한가? 그것을 묻고 싶다. 우리는 지금 르우벤처럼 배경에서 정당성을 찾고 있지는 않은가? 요셉처럼 능력에서 정당성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정말 사랑 하나만으로 정당하다고 믿고 있는가? 유다가 사랑 하나만으로 장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당신은 ‘진실로 진실로’ 믿을 수 있는가 말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당연히 ‘사랑’이 배경이나 능력보다 위대함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배경이나 능력 있는 사람보다 사랑 있는 사람을 선택하시기 때문이다.



고전 13:1-3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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