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리티 리포트 #08
수 14:6-15 그때에 유다 자손이 길갈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나아오고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와 당신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 이르신 일을 당신이 아시는 바라 내 나이 사십 세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를 보내어 이 땅을 정탐하게 하였으므로 내가 성실한 마음으로 그에게 보고하였고 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으나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으므로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이르되 네가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황한 이 사십오 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하게 하셨나이다 오늘 내가 팔십오 세로되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내 힘이 그 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으니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하니 여호수아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을 위하여 축복하고 헤브론을 그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매 헤브론이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 오늘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음이라 헤브론의 옛 이름은 기럇 아르바라 아르바는 아낙 사람 가운데에서 가장 큰 사람이었더라 그리고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
입고 있는 것보다 중요한 것
예전에 있었던 일이다. 교회 집사님 중 한 분이 불의의 사고를 당해서 무릎인대를 이식받았다. 곧 수술실로 들어간다는 소식을 듣고는 밖에 있다가 미처 양복을 갈아입지 못하고 티셔츠에 면바지 차림으로 병원에 도착했다. 그렇게 서둘렀지만, 수술시간에 늦게 도착했다. 입원실에 있던 환자들에게 자초지종을 물으니 벌써 10분 전에 수술실로 갔다고 했다. 늦게 도착한 일도 황당한데 그보다 더 황당한 일은 그곳에 있던 세 명의 남자들이 모두 나를 하대하며 반말을 했다는 것이다. 목사가 된 이후로는 반말로 하대당할 일이 별로 없었다. 매우 당황한 순간, 내가 입은 옷이 양복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아! 이분들이 나를 동네 총각으로 보셨구나!’ 생각이 거기에 미치니 웃으며 인사를 하고 나올 수 있었다. 오히려 어리게 봐주셔서 감사하기까지 했다.
다음날 다시 병원으로 심방을 갔다. 이번에는 양복에 넥타이를 맸다. 성경을 한 손에 들고 찾아가 예배를 드리고 왔다. 물론 병실에 있던 다른 분들에게도 인사를 했다. 하나같이 내게 존대를 했다. 전날과 바뀐 것은 옷밖에 없는데, 사람들은 나를 전혀 다른 사람으로 취급했다.
때로는 ‘입고 있는 것의 힘’을 경험할 때가 있다. 사람을 평가할 때, 제일 먼저 보게 되는 것이 입고 있는 옷이다. 그 사람의 경력이다. 그 사람의 옷과 경력은 많은 경우에 첫인상을 좌우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가 겪어온 모든 면접이 그 사람의 경력과 외모를 살피는 것으로 이루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그 사람의 내면을 알 수 있겠는가? 그 사람의 됨됨이는 같이 오랜 시간 겪어봐야 아는 것이다. 면접을 통해서는 그저 그 사람의 실력과 됨됨이의 일부만 볼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선택할 때 대부분 이런 식의 면접을 통해서 선택한다. 외모가 좋으면 면접에 유리하다. 학력이나 경력이 좋으면 면접에 좋은 점수를 얻게 된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자신의 외모를 꾸민다. 자신의 경력을 쌓는다. 자격증을 취득하고, 학위를 얻기 위해 공부한다. 자격증을 위해서는 주일을 범하는 것도 당연하고, 학위를 얻기 위해서는 잠시 신앙생활을 보류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세상적인 성취와 신앙의 태도는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정말로 외모나 경력이 그 사람의 실력과 능력을 100퍼센트 보장해주는 것일까? 하나님과의 관계, 신앙의 가치가 성공하는 인생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적어도 신앙인에게는 세상의 기준에 맞는 배경과 외모를 만드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기준에 맞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전혀 우리의 기준과는 다른 기준을 가진 분이시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들어 쓰시는 사람이 결국 위대한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기준을 알려준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것이나 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를 보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삼상 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하나님께는 그 사람의 됨됨이가 중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와 배경을 중요하게 생각지 않으신다. 심지어 그가 당신이 선택한 민족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분은 그 사람의 중심을 보시고 들어 쓰신다. 그런 예는 성경에 많이 있다. 그런 사람 중 하나를 소개하자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 가운데 사용된 위대한 사람, 갈렙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니스 혹은 그나스 사람 갈렙
입고 있는 것, 가지고 있는 배경이 중요치 않다고 이야기하는데 왜 하필 갈렙을 선택했을까? 갈렙은 유다지파의 두령이고 성경에 엄연히 그 가문까지 기록되어 있는 명망 있는 집안의 자제가 아닌가?
놀랍게도 전혀 그렇지 않다. 어찌 보면 갈렙은 유다지파의 소위 뼈대 있는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으로 생각될 수도 있다. 갈렙은 '그니스' 혹은 '그나스' 족속의 ‘여분네’라는 사람의 아들이다. 갈렙을 설명할 때, 이 두 족속의 이름이 혼동되어 쓰인다. 성경이 가문과 아버지의 이름을 명시적으로 기록하고 있으니 갈렙의 가문은 꽤나 이름난 가문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그니스' 혹은 '그나스' 족속은 그런 사람들이 아니다.
창 15:18-21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그에게 가나안 땅의 열 족속들을 소개하신다. 그니스 족속은 가나안의 족속들 중에서도 두 번째 자리를 차지하는, 말 그대로 이방인 중의 이방인이었다. 갈렙이 그니스 족속의 후손이라는 말은 그가 속한 가문으로서는 도저히 하나님께로부터 인정받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실 때, 분명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는 때가 ‘죄악이 관영한 가나안 족속들의 심판의 때’라고 말씀하셨다. 갈렙은 심판받아 마땅한 이방인이라는 말이다. 이런 갈렙이 이스라엘의 영웅이라니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십분 양보하여 갈렙이 ‘그나스’ 족속이라도 별로 달라질 건 없다. 그나스 족속도 이방인이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창 36:15에서 자손 중 족장은 이러하니라 에서의 장자 엘리바스의 자손으로 데만 족장, 오말 족장, 스보 족장, 그나스 족장과
그나스 족속은 야곱의 형이었던 에서의 후손들이었다. 이들을 성경은 ‘에돔’이라고도 부른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길을 비켜주지 않아 원수가 된 족속이 바로 이 에돔 족속이다. 물론 이스라엘과 에돔이 가까운 친척지간인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갈렙이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에돔은 그저 이방인들 중 하나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떤 경우라도 갈렙은 이스라엘 공동체에 받아들여지기는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하필이면 출애굽 하여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에 들어간 단 두 명중 한 사람이 되었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스라엘 지파의 정통성이 있는 가문의 자녀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당시 이스라엘의 장자 지파였던 요셉 지파(에브라임, 므낫세)에는 인재가 없었는가? 제사장으로 선택받은 레위지파는 어떤가? 그들에게는 내세울 만한 자녀들이 없었는가 말이다. 도대체 왜 이 이방인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위대한 자’가 되었는가?
민 13:1-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보내어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되 그들의 조상의 가문 각 지파 중에서 지휘관 된 자 한 사람씩 보내라 모세가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바란 광야에서 그들을 보냈으니 그들은 다 이스라엘 자손의 수령 된 사람이라
민 13:6 유다 지파에서는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요
민수기에 기록된 갈렙을 보면 하나님께서 친히 그를 정탐꾼으로 선택하셨음을 알 수 있다. 중요한 또 한 가지의 사실은, 갈렙은 이미 유다지파의 수령이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방인인 갈렙이 유다지파에 소속이 되었는지 성경은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는다. 혹시라도 갈렙의 어머니가 유다지파 여인이었는지, 아니면 갈렙의 아내가 유다지파의 여인이었는지, 추측은 할 수 있지만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이방인인 갈렙이 유다지파의 수령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집트에서 함께 이스라엘 백성들과 동고동락하며 어찌어찌하여 이스라엘 공동체에 받아들여졌고, 또 그들에게 칭찬받는 대표가 되었다.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없어서 이해하기는 참 어려운 일이지만, 그것이 결과적인 사실이다.
그러면 어떻게 갈렙을 선택하신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것은 오히려 간단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시는 사람’이 ‘갈렙과 같은 사람’이라는 전제를 두고, 갈렙이 다른 사람들과 달랐던 점이 무엇인지 살펴보면 되는 일이다. 그런 기준으로 성경을 읽어보면 우리는 갈렙의 행적을 보고 그가 이스라엘 유다지파의 대표가 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현실'과 '사실' 너머의 진실
갈렙은 자신의 진정한 배경을 가문이나 자신의 외모에 둔 사람은 아니었다. 심지어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정당성도 자신 안의 신앙과 관련이 있었다.
민 13:30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
민 14:6-10 그 땅을 정탐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자기들의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하는데 그때에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나타나시니라
가나안 땅을 직접 돌아본 열 명의 수령들이 가나안 정복에 관해 비관적인 의견을 제시했다. 이 의견은 매우 강력한 설득력을 갖고 있었다. 그 땅은 광야에서 40년을 돌며 꿈에도 그렸던 것처럼 좋은 땅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 땅에는 자웅을 겨룰 수조차 없는 거인들이 살고 있었다. 백성들의 소망은 산산이 흩어졌다. 이것이 다수의 의견이었고 ‘현실’이자 ‘사실’이었다. 그러나 갈렙의 의견은 달랐다. 그것이 ‘현실’이고 ‘사실’ 일지는 모르지만 ‘진실’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갈렙은 자신들이 연약하다는 ‘현실’과 그 땅에는 거인들이 살고 있고, 그들이 목숨을 걸 만큼 훌륭한 땅도 아니라는 ‘사실’ 사이에서 잃어버린 한 가지 ‘진실’을 발견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 땅을 자신들에게 맡겼으니 그것만으로도 이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 투쟁하여 얻을만한 가치가 충분한 땅이라는 믿음이었다. 게다가 자신들은 연약하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일이라면 오히려 이 전쟁을 두려워해야 할 사람들은 자신들이 아니라 그 거인들이라는 믿음이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현실’과 ‘사실’ 사이에서 잃어버린 ‘진실’이었다.
그러나 갈렙이 발견한 이 ‘진실’은 그 당시에는 증명되지 못했다. 결국 전쟁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때로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이런 답답함이 있다. 믿음으로 결단하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는 ‘진실’. 그것은 도저히 미동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증명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우리가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파악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혹시 지금 우리는 ‘현실’과 ‘사실’에 꽁꽁 묶여 있지는 않은가?‘ 질문해야 한다.
청년사역을 12년 동안 하면서 여러 청년들을 만나보았다. 어떤 이들과는 놀라운 기적을 경험했고, 어떤 이들과는 참담한 패배를 경험했다. 청년사역을 했던 네 교회 중에서 두 교회에서는 기적을 경험했지만 두 교회에서는 실패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별로 큰 성과가 없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나는 자괴감을 느꼈다. 물론 사역을 했던 나의 문제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 평가를 해보면 내게는 언제나 똑같은 열정이 있었다. 다만 리더가 가진 열정을 대하는 구성원들의 태도는 사뭇 달랐다. 사역을 하면서 먼저 한번 실패를 경험하고 다음번에는 기적을 경험했다. 그다음에는 커다란 벽을 경험하고 후에는 한계가 없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했다. 그런 경험을 하고 나니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 구성원들의 태도는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는 그들 스스로가 ‘교회 주인’이라고 여기는 특성이 있었다. 교회의 터줏대감이 되어 자신들의 요구와 맞지 않으면 제아무리 훌륭한 목사라도 용납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구성원들과의 분쟁을 싫어한다. 그래서 그런 상황에 맞닥뜨리면 에둘러 가게 된다. 그러니 그런 공동체에서 무언가를 하려면 지루하고 긴 시간이 걸린다. 어떤 교회에서 피아노를 옮기는데 1mm씩 옮겨서 몇 년이 걸렸다는 우스갯소리처럼 말이다. 40년을 에둘러 갔던 가나안의 여정이 그랬다. 물론 그렇게 돌아가도 가나안에는 도착한다. 누군가 올바른 방향을 견지하기만 하면 말이다. 마치 갈렙이 ‘현실’과 ‘사실’ 너머에서 찾은 ‘진실’이 증명되는 것처럼 말이다.
수 14:6-15 그때에 유다 자손이 길갈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나아오고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와 당신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 이르신 일을 당신이 아시는 바라 내 나이 사십 세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를 보내어 이 땅을 정탐하게 하였으므로 내가 성실한 마음으로 그에게 보고하였고 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으나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으므로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이르되 네가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황한 이 사십오 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하게 하셨나이다 오늘 내가 팔십오 세로되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내 힘이 그 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으니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하니 여호수아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을 위하여 축복하고 헤브론을 그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매 헤브론이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 오늘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음이라 헤브론의 옛 이름은 기럇 아르바라 아르바는 아낙 사람 가운데에서 가장 큰 사람이었더라 그리고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
갈렙의 ‘진실’이 증명될 기회가 왔다. 갈렙이 무려 85세가 되던 해에 말이다. 어찌 보면 너무 늦은 것 같지만, 갈렙의 ‘진실’이 증명되기에는 너무나 시기적절했다. 어차피 갈렙의 ‘진실’은 ‘우리는 연약하고 적은 강대하고 땅은 쓸모없다’는 ‘현실’과 ‘사실’ 너머에 있는 것이었지 않은가? 이스라엘 백성은 여전히 연약했다. 그리고 헤브론의 주인은 그 땅에서 가장 악명 높고 거대한 아낙 자손의 왕 ‘아르바’였다. 갈렙이 처한 ‘현실’은 부지깽이를 들고 철병거와 맞서는 것이었다. 게다가 지금 갈렙이 얻으려는 헤브론은 산지였다. 이곳이 천혜의 요새라고는 하나, 산적질을 하는 강도 떼에게는 훌륭한 성이었지만, 목축을 하고 농사를 지어야 하는 이들에게는 그저 거칠고 척박한 산지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것이 갈렙이 해결해야 할 ‘사실’이었다.
아마도 여호수아는 갈렙의 이 결정이 못내 아쉬웠을 것이다. 갈렙이 말한 대로 이미 하나님께서는 갈렙에게 ‘선택하는 모든 땅을 주신다.’는 약속을 하셨다. 이제 그들 중에 80이 넘은 노인은 여호수아와 갈렙 둘 밖에 없다. 둘은 그 땅을 정탐할 때부터 친구였다. 같은 꿈과 신념을 가진 동지였다. 말 그대로 둘도 없는 친구였다. 그들 외에는 모두 최소한 45세 이상 차이가 나는 애송이들뿐이었다. 여호수아가 그런 둘도 없는 친구를 가장 척박하고 정복하기 어려운 땅에 보내고 싶었을까? 85세가 되어 백발이 성성한 갈렙에게는 큰 수고 없이 얻을 수 있는, 게다가 목축이나 농사짓기 적당한 이미 정복된 땅을 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여호수아에게 갈렙은 제일 껄끄러운 땅을 자기 소유로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 갈렙이 여호수아를 찾아왔을 때, 여호수아는 직감적으로 갈렙이 헤브론을 요구하리라는 것을 예감했을지 모른다. 말 그대로 죽마고우, 평생지기 친구가 서로의 마음을 알지 못할 리가 없다. 그리고 여호수아도 그 성품이 갈렙과 많이 다르지 않은 사람이었다. 갈렙이 아니면 여호수아가 헤브론 전쟁을 감수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두 말없이 갈렙에게 헤브론 전쟁을 허락한다.
갈렙에게는 ‘진실’을 증명할 기회가 왔다. 갈렙이 이 땅, 헤브론을 자신의 진실을 증명할 땅으로 선택한 이유를 15절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땅의 전쟁으로 가나안 정복전쟁의 대미가 장식되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헤브론이 가장 강력하여 아직 아무도 건드리지 못한 거인 족속의 우두머리 ‘아르바’의 성읍이었다는 말이 아닌가? ‘현실’과 ‘사실’ 사이에 숨어 있는 ‘진실’을 증명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기회였다. 갈렙은 드디어 40년을 기다렸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함께 하신다면 오히려 저들이 우리를 두려워할 일’이라는 그 ‘진실’을 증명해낸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증명된다.
수 21:13 제사장 아론의 자손에게 준 것은 살인자의 도피성 헤브론과 그 목초지이요 또 립나와 그 목초지와
쓸모없는 땅 헤브론.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었다. 목초지도 아니고 경작하기에도 적당하지 않은 땅이었다. 그러니 목축업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필요 없는 땅이었다. 그런데 그 땅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가장 중요한 ‘거룩한 성읍’이 된다. 쓸모없던 헤브론이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 아론의 자손이 머물 땅, 억울한 살인자들의 도피성, 죽어 마땅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은 증거인 교회의 상징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시니, 거민을 삼키는 악한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생명의 땅으로 변했다. 또 하나의 ‘현실’과 ‘사실’ 사이에 놀라운 ‘진실’이 증명된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갈렙은 유다지파를 장자의 반열에 오르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갈렙이 차지한 헤브론 땅이 바로 아브라함 가족의 묘지가 있는 마므레였기 때문이다.
창 23:19 그 후에 아브라함이 그 아내 사라를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더라 (마므레는 곧 헤브론이라)
어쩌면 갈렙이 정복하기 어려운 땅인 헤브론에 소망을 둔 것은 이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갈렙이 이 헤브론을 차지함으로써 유다지파에 있어 가장 자랑스러운 다윗 왕조를 여는 초석을 마련하게 되었다. 다윗이 오랜 방황을 마치고 바로 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기 때문이다.
삼하 2:11 다윗이 헤브론에서 유다 족속의 왕이 된 날 수는 칠 년 육 개월이더라
갈렙이 정복한 헤브론에서 다윗 왕조가 시작되고, 그리고 그 다윗 왕조는 온 세상을 구원한 영원한 왕이신 그리스도께까지 이어진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을 담으라!
중고등부 학생들을 담당했던 때, 한 고3 여학생의 엄마가 내게 면담을 신청했다. 마주 앉은자리에서 내게 “제발 설교를 그렇게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을 했다. 고3이고 명문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딸이, 한 시도 아까운데, 토요일 오후가 되면 자율학습이나 학원을 모두 끊고 교회에 나온다는 것이었다. 꽤나 공부도 잘 하는 친구였기에 부모의 기대도 그만큼 컸다. 다른 경쟁자들은 모두 토요일에 밤늦게까지 공부를 하는데, 자신의 딸만 교회에 가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으니 얼마나 속이 탔을까? 그런데 그 친구가 그렇게 결단했던 원인이 내가 했던 한 번의 설교 때문이었다. 하나님 앞에 시간을 구별하는 것이 훨씬 우리의 인생에 유익하다는 그런 설교를 들은 후, 이 친구가 결단을 했던 것이다.
제발 자신의 딸을 설득해달라는 엄마의 부탁에 내가 어떻게 했겠는가? 오히려 나는 그 엄마를 설득했다. 이미 그 딸은 자신의 시간을 주님께 드렸다. 그 시간에 공부를 덜 하면 비슷한 친구들과의 경쟁에서 뒤처지는 것도 알고 있었다. 똑똑한 친구니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단한 일이었다. 그 엄마가 집사님이 아니었다면 설득할 수 없는 일이었을지 모른다. 다행히도 그날 그 엄마는 내게 설득을 당했다. 그리고 결국 그 친구는 자신의 최대 실력보다 한 수준 낮은 학교를 지원했다. 심지어 그 학교는 불교학교였다. 그것도 부모에게는 큰 근심거리였지만, 결국 그곳에서도 믿음을 지키며 공부를 잘 마쳤고, 유학을 다녀와서 지금은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위해 누구보다 훌륭하게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고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자신의 배경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소위 스펙을 많이 쌓고, 포트폴리오를 화려하게 만들어 가는데 자신들의 열정을 쏟는다. 현실은 그런 것들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런 것들이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현실과 사실보다 더 중요한 진실이 있다. 우리의 배경이나 겉으로 꾸며진 그 무엇보다 더 사람을 힘 있게 하고 능력 있게 하는 것은 그 안에 담긴 열정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겉모습이 아닌 그 중심, 그 사람의 열정을 보신다. 하나님은 그 속에 그런 열정을 담은 사람을 선택하신다. 이방인인 갈렙을 들어 쓰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선택하시는 비밀, 유다지파가 하나님의 장자로 선택받은 그 아름다운 역사의 징검다리 한 돌이 바로 갈렙의 ‘진실’, 바로 갈렙 안에 담긴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었다.
고후 4:7-10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