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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태현 Jan 02. 2023

그리스도인의 인격 01 용기

용기 있는 그리스도인 되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7-8)


신앙은 수식이 아니라 이다.     


어린 남매가 대화를 하고 있다. 무슨 일인지 단단히 화가 난 남동생이 엉엉 울며 누나에게 소리를 질렀다.

“누나, 아빠는 나쁜 놈이야!”

깜짝 놀란 누나는 어린 동생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빠한테 나쁜 놈이라고 하면 안 돼! 아빠는 나쁜 놈이 아니야!”

그러자 동생이 물었다.

“그럼 아빠는 뭔데?”

동생이 눈물을 닦으며 묻자 그제야 누나는 여유롭게 대답을 해주었다.

“응, 아빠는 좋은 놈이야.”     

아빠를 나쁜 놈이라고 부르는 건 잘못됐다. 그런데 그건 수식의 문제가 아니고 격의 문제다. 아빠를 좋은지 나쁜지 무엇으로 꾸몄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아빠를 ‘놈’이라는 격에 둔 것 자체가 잘못이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신앙인에게는 무엇보다 격이 중요하다. 그가 무슨 일을 했고, 어떤 사람인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성령께서 우리를 조명하실 때, 우리가 입고 있는 옷과 경력들과 성과들은 모두 불타 없어질 것이다. 주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신다. 그러니 우리의 신앙을 꾸미고 있는 수식들은 그리 대단한 것이 되지 못한다. 다만 그 신앙의 격이 어떠냐가 훨씬 중요하다.     

신앙은 항상 제격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제격인 신앙은 무엇일까? 그것은 인격적인 신앙이다. 하나님이 인격적인 분이시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기에, 우리의 신앙도 당연히 인격적이어야 한다. 그런 신앙이 바로 제격인 신앙이다.


이제 여섯 번에 걸쳐 우리는 제격인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갖추어야 할 인격에 대한 말씀을 나누는 동안에 우리의 인격이 조금 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변해갔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그리스도인과 용기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흔히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용기가 없는 나약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자기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어서 하나님을 만들어 놓고 그 만들어진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스스로 살아갈 용기가 없는 나약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매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살아갈 용기가 없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 연약하고 나약한 존재인지를 시인하는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자기가 부족하다고 인정하기는 또 얼마나 어려운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용기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은 스스로의 상태를 똑바로 볼 수 있는 용기, 자신의 상태를 그대로 솔직하게 인정할 수 있는 용기가 있느냐고 말이다.

     

어렸을 때, 방학이 그렇게 좋았다. 학교를 안 가도 되고, 공부를 안 해도 되고, 숙제를 안 해도 되니 이 얼마나 천국 같은 일인가 말이다. 아! 하나는 아니다. 숙제는 했어야 했다. 방학숙제가 꽤나 많았다. 그런데 사실상 숙제는 잘 안 했다. 한 달도 넘는 시간 동안 방학을 하니 나중에 해도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학이 가까워지면 두려워진다. 숙제는 생각보다 많고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지나가게 된다. 그렇게 걱정만 하다가 방학을 다 보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꽤나 있을 거다. 개학을 하고 보면 개학식 날에 방학숙제를 모두 제출하는 친구는 몇 명 안 됐다. 나도 사실 방학숙제 중에 한두 가지를 빼먹은 적이 여러 번 있다.

선생님께서 왜 숙제를 안 해왔느냐고 물으면 대부분 이렇게 대답한다.     

“방학숙제를 꼭 다 하려고 했는데요. 이번에 시골 할머니 댁에 3주나 놀러 갔다가 왔거든요. 할머니 댁에서 일기를 쓰려고 했는데 그만 일기장을 안 가져간 거예요. 집에 돌아와서 일주일만이라도 일기를 쓰려고 보니까 글쎄 이번에는 문구점에 일기장이 다 떨어진 거예요. 그래서 일기는 하나도 못 썼어요.”     

보통 이런 식이다. 다음과 같이 말하는 사람은 없다.     

“여름방학이 기니까 처음부터 숙제를 하고 싶지 않았어요. 일기는 나중에 일주일 남겨놓고 한꺼번에 한 달 치를 몰아 쓰려고 했는데, 하루 이틀 미루다 보니까 개학 전날인데 하나도 안 썼더라고요. 개학 전날 한 달 치를 쓴다는 게 너무 귀찮아서 ‘될 대로 돼라!’하고 안 썼어요.”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전자는 그럴듯하지만 핑계일 가능성이 많다. 거짓말인 경우가 많다는 말이다. 경험상 후자가 진짜다. 그런데 왜 우리는 진실을 말하려고 하지 않을까? 그건 진실을 말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자신의 잘못을 드러내는 것이 너무나 두려운 일이기에 우리는 자주 그럴듯한 핑계로 진실을 가린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을 때, 바로 그렇게 그럴듯한 핑계로 진실을 가렸다. 사실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 그 열매를 먹었으면서, 아담은 “하나님께서 내게 보내주신 저 여자 때문에 먹었다.”면서 하와와 하나님이 원인제공자라고 핑계를 댄다. 하와는 “하나님이 만드신 뱀 때문에 먹었다.”면서 뱀과 뱀을 만드신 하나님께 잘못을 돌린다. 그럴듯한 핑계로 진실을 가린 것이다. 사실대로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어요. 제가 잘못했어요.”라고 말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어떤가? 자기 스스로가 죄인이라고 고백해야만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의 죄를 고백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의 말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스스로 살아갈 용기가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죄악 된 상태를 정확히 보고 잘못을 인정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용기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큰 용기가 필요하다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데에는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말하는 신앙의 가치에 별로 관심이 없다. 사랑받는 건 좋아하지만 사랑하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서비스를 받는 것은 좋아하지만 봉사하는 일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남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일을 옳다고 믿으며 할 수 있으려면 정말 큰 용기가 필요하다. 사람들이 “너 바보야? 왜 바보짓을 해?”하고 말한다면 더더욱 그건 어려운 일이다. 오른뺨을 때리면 왼 뺨을 돌려 대고, 겉옷을 달라는 사람에게 속옷을 내주는 일은, 그것이 옳다고 믿어도 용기 없이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다.          



관계를 이어가는 용기     


그리스도인이 되는데도 용기가 필요하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데도 용기가 필요한데, 이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한 건 예수님의 가족이 되는 일이다. 예수님의 가족 구성원이 되어 하나님 나라를 이룬다고 하는 것은 공동체적인 의미가 있다. 우리가 예수님의 가족이 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공동체가 된다고 하는 것에는 ‘관계를 이어가는 용기’라는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관계를 이어가려고 할 때, 때로는 서로 섭섭한 일이 생길 수도 있다. 때로는 서로 얄미울 때도 있다. 때로는 서로에게 상처받을 일이 생기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관계를 계속 이어나가는 것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 용기가 없다면 반쪽짜리 신앙, 아니 하나님 나라가 없는 반쪽도 안 되는 신앙일 뿐이다. 하나님 나라는 혼자 들어가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는 두 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임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의 가정 안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부부의 관계를 이어가는 용기가 필요하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이어가는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 교회 안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려면 목회자와 목회자, 목회자와 교인들, 교인들과 교인들 사이에 관계를 비틀어버리거나 깨뜨리지 않고, 그 관계를 이어가는 용기가 필요하다.     

관계를 이어나가려면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 하지만 내가 먼저 손 내밀면 왜인지 지는 것 같고, 크게 손해 보는 것 같은 마음이 들 것이다. 분명히 거기에는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용기는 두려움을 모르는 게 아니다. 두려움에 맞서는 것이다. 두려움을 극복한 사람은 반드시 성장한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용기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막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 일이다. 집에서 학교를 가려면 한 참이 걸렸다. 잘 닦여진 도로로 가면 15분 정도가 걸렸다. 산을 넘어가면 그 절반의 시간이 걸린다. 아침에 등교할 때는 전혀 문제가 없다. 우리 동네에 사는 대부분의 중학생들이 산을 넘어 등교하기 때문이다. 오후에도 문제가 없다.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드문드문 아이들이 산을 넘어 집으로 가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공부하고 놀다가 컴컴해진 후가 문제다. 그때는 아무도 산을 넘어 집에 가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친구들과 함께 여럿이 산을 넘으면 그렇게 무섭지 않다. 중간중간에 산소가 몇 개 있는데도 친구들과 재잘거리면서 가면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하지만 혼자는 언감생심 넘을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건이 있었다. 친구들과 늦게까지 놀다가 어두워졌는데, 잠깐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에 친구들이 먼저 집으로 떠났다. 나는 부지런히 친구들을 쫓아갔다. 그때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는데, 당연히 친구들이 산을 넘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리나케 산길을 달렸다. 그런데 아뿔싸! 진퇴양난에 빠졌다. 이만큼 달려왔으면 친구들이 보여야 하는데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니 두려움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산을 반쯤 넘었는데, 올 때는 허겁지겁 달려오느라 무서운 줄 모르고 왔는데, 다시 돌아가자니 돌아가는 길도 무서워졌다. 어차피 절반을 넘어왔으니 나머지 절반도 넘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그때부터 두려움이 몰려왔다. 오금이 저려올 정도로, 이가 달그락거리며 소리를 낼 정도로 무서웠다. 산소를 지날 때마다 하얀 소복을 입고 머리를 늘어뜨린 처녀귀신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나는 덜덜 떨면서이기는 했지만 결국, 집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다음부터는 산을 넘는 게 조금 덜 무서워졌다. 나중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혼자 산을 넘어 집으로 올 수 있게 되었다.     


진정한 용기는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다. 예수님도 두려움 없이 십자가를 지신 게 아니다. 예수님도 우리처럼 십자가 처형의 두려움 앞에 치를 떠셨다. 얼마나 긴장하셨는지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끔찍한 두려움에 눈물이 흘러서,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핏방울 같은 것이 되어 떨어졌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두려움에 직면하셨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진정한 용기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셨다. 그러니 용기 없이 어떻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겠는가? 용기야말로 신앙인에게는 제격인 그리스도의 인격이다.          



용기 있는 사람 되기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마지막 유언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라.’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용기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는 말씀이다.     


예전에 나도 한 사람에게 상처받았다. 누가 보더라도 나는 그 사람에게 은인이다. 그 사람은 내게 신세를 크게 졌다. 그런데 물에 빠진 사람 건져줬더니 봇짐을 내놓으라는 형국이 되었다. 자존심이 상하고,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바보가 되어버릴 것 같고, 계속 무시당할 것 같은 두려움에 빠졌다. 처음에는 몹시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서 이 관계를 틀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가 내게 한 대로 돌려주고 싶었다. 사실은 곧바로 그렇게 할 수도 있었다. 그가 내 왼뺨을 때린 것보다 내가 그의 왼뺨을 훨씬 더 아프게 때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참았다. 인내했다. 용납해 주었다. 오른뺨을 돌려 댔다. 속옷까지 벗어주었다. 그런데, 그러면 질 것 같았는데, 오히려 그랬더니 하나님 나라가 찾아왔다. 그 사람이 내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만 주실 수 있는 그 승리가 임했다. 하나님께서 그 작은 일을 크게 보람 있게 해 주셨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세상 사람들이 꺼려하는 신앙의 가치들이 참된 것임을 믿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는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십자가를 지면 영영 패배자가 되는 것 같지만, 자기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면 스스로가 너무나 초라하고 비참해질 것 같지만, 먼저 손을 내밀면 우습고 비루한 인생이 될 것 같지만, 그 두려움에 맞서야 한다. 우리에겐 그 용기가 필요하고 하나님은 우리가 그런 용기를 지닌 사람이 되기를 바라신다. 우리 예수님께서 두려움에 맞서셨던 것과 같이 우리도 두려움에 타협해서는 안 된다. 두려움 앞에서 물러서는 것은 신앙인의 격이 아니다. 그 두려움에 맞서서, 십자가를 넘어 부활의 영광을 맛보는 것이야말로 진짜 용기이고,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인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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