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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태현 May 10. 2019

바리새인과 나 14
신성모독

바리새인과 나 #14




눅 5:17-26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여 이르되 이 신성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오늘날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




우리는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작게든지 크게든지 영향을 받는다. 미디어가 발달한 현대에는 많은 사람에게 거대한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을 ‘인플루언서(Influencer)’라고 부른다. 각종 미디어에서는 이런 인플루언서들을 초청해서 프로그램을 만든다. 또한, 여러 사회단체에서 그들을 초청해 강연을 연다. 거기에 많은 관심이 집중되고 사람들이 몰려든다. 상류층의 사교계에서는 인플루언서들을 초청해서 호화로운 파티를 즐기는 행사들이 열린다. 그 파티에 초대된 인플루언서가 거기에 모인 사람들의 수준이 어떠한지를 알려주는 척도인 것처럼 여긴다.


2013년 뉴욕의 사교계에 화려하게 등장한 인물이 있었다. ‘애나 델비’라는 이십 대 후반의 여성이었다. 독일에서 태양광 사업을 하는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았다는 그녀는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일상을 살았다. 맨해튼의 최고급 호텔에 몇 달씩 머물렀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식당들을 누비며 식사를 했다. 한 시간에 수백 달러를 지불해야 하는 트레이너들과 함께 운동을 했고, 행사장마다 디자이너들이 만든 최고가의 옷과 액세서리를 두르고 나타났다. 그녀는 단숨에 뉴욕 사교계에서 최고의 스타로 떠올랐다. 패션과 예술계의 인사들이 그녀와 친분을 쌓기 위해 모여들었고, ‘애나 델비’는 뉴욕에서 만난 상류층의 친구들과 함께 고비용의 문화를 즐겼다.


그러나 2017년 10월 그녀의 화려한 삶이 끝나면서 세상이 깜짝 놀랄 진실이 밝혀졌다. 그녀의 이름은 ‘애나 델비’가 아니었다. 본명은 ‘애나 소로킨’, 재벌의 딸도 물론 아니었다. 대학을 중퇴하고 패션잡지사에서 인턴으로 일하던 평범한 청년이었다. 그녀는 패션잡지사에서 일하면서 상류층 사교계에 대해 알게 되었고, 스스로 가짜 인플루언서가 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애나 소로킨은 화려한 매력에 쉽게 유혹되는 상류층 사람들의 습성을 이용해서 뉴욕의 사교계를 장악했다. ‘애나 델비’로 이름을 바꾸고, 명품 옷과 액세서리로 온몸을 휘감고서 뉴욕 사교계에 나타난 그녀는, 애써 스스로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었다. 빌린 돈과 훔친 돈으로 화려한 생활을 하기만 했을 뿐인데, 사람들은 그녀를 거액의 유산을 상속받은 재벌 2세로 만들어 주었다. 소문은 소문을 낳고, 사람들은 그녀를 금세 스타로 만들어 주었다. 화려한 삶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애나 델비’는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인스타그램에 찍힌 그녀의 사진을 보며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같이 되기를 꿈꿨다. ‘애나 델비’는 그 자체로 대중의 콘텐츠가 되었다.


우스꽝스러운 일은, 애나 소로킨이 재판을 받는 동안에도 사람들의 관심이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2019년 3월 말, 그녀의 재판이 시작되었는데, 법원에 출석하면서 그녀가 입었던 옷과 연출한 스타일이 대중의 폭발적인 관심거리가 되었다. 소위 ‘블레임 룩(Blame Look)’이라고 불리는 이 패션이 할리우드 유명 스타일리스트의 작품이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는 ‘사회적으로 명망 있고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왜 이런 우스꽝스러운 실수를 저지를까?’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실제로 어처구니없는 이단 사상에 빠진 사람들 가운데 소위 상류층들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다수 있음을 보게 된다. 조금만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조악한 이론에 빠져서 잘못된 선택을 하는 지식인들이 종종 있다. 왜 그럴까?


자신이 우월하다고 느끼는 교만한 사람들일수록 자기 기준이 확실하다. 그런데 확실한 자기 기준이 때로는 스스로에게 올무가 되는 경우가 많다. 자기가 생각하는 기준에 맞으면 좋은 것이고 옳은 것이라는 착각에 빠질 수 있다. 오늘 말씀의 바리새인들이 그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율법 교사들 앞에서 중풍 병자를 고치셨다.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의 진짜 문제를 보셨다. 그에게는 중풍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죄의 문제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에게 죄 사함을 선포하신다. 이 상황을 바라보고 있던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은 예수님이 하기 쉬운 말로 신성모독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예수님의 대답으로 보건대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의 비판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죄는 하나님만 사하시는데 사람인 예수님이 중풍병자의 죄를 사해주신 것이 신성모독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중풍을 앓는 사람이 자기가 누웠던 자리를 가지고 일어나 걸어가게 하는 것보다, 죄를 용서한다는 말을 하는 것이 훨씬 쉬운 일이라는 것이다.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은 예수님을 신성모독 하는 사기꾼이라고 생각했다. 순진한 사람들은 속여 넘길 수 있지만, 자신들을 그렇게 속여 넘길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중풍병자를 앞에 두고 “죄 사함을 받았다.”라며 얼렁뚱땅 넘기는 것으로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의 예리한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것이 그들의 판단이고 비판이었다.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의 판단은 일면 그럴듯해 보인다. 상식에도 어긋나지 않는다. 매우 논리적이고 지적인 해석이 돋보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의 비판과 판단이 모두 틀렸다는 사실이다. 가장 중대한 오류가 하나 있는데, 그들이 판단하고 생각한 예수님은 그런 분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시기에, 당연히 그분은 죄를 사하는 권능을 소유하고 계셨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그러나 죄를 사하는 과정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하는 매우 고통스럽고 지극히 처절한 과정을 지나야 죄 사함에 이를 수 있는 것이었다. 죄 사함에 비하면 중풍병자를 고치는 일 정도는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매우 쉬운 일이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네 죄 사함을 받았다.”라고 짧게 말씀하셨지만, 이 말은 결코 쉬운 말이 아니었다.


안타까운 사실은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을 비롯해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끝까지 진실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중풍병자가 자기가 누웠던 자리를 들고일어나 걸어가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두려워하며 놀라워했다. 그런데 그들이 정말 영광을 돌리고, 두려워하고, 놀라워했어야 할 일은, 중풍병자가 일어나 걸어간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중풍병자를 고치신 하나님이 아니라, 죄 사함을 위해 이 땅에 그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두려워하고, 놀라워했어야 했다. 결국, 그들은 자기 기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중풍병자가 고침을 받는 기적을 보았지만, 예수님의 행적을 보며 이를 갈고 미워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이다. 그들이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과 함께 계신 것을 알았다면, 결코 그들은 예수님을 그렇게 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은 자신들의 기준인, 중풍병이 낫는 기적을 바라보다가, 하나님의 더 큰 역사인 죄 사함의 은혜를 무시하는 신성모독을 저지르게 되었다. 그러니 정작 신성모독은 예수님이 아니라 자신들이 하고 있었다.


‘인플루언서’라는 말이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할 때, 뉴욕을 발칵 뒤집은 인플루언서 ‘애나 델비’, 그녀는 사기꾼이었다.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이 사기꾼이라고 생각했던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신 진짜 인플루언서였다. 예수님께서 미치신 십자가와 부활의 영향력 때문에, 우리는 죄 사함을 받고 생명을 얻는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사람들은 허황하고 무가치한 사기꾼에게는 끝까지 주목하고, 진실하고 존귀한 가치를 지닌 예수님으로부터는 고개를 돌린다.


신앙은 참 어렵다. 아무리 능력 있고 똑똑해도 자기 올무에 빠져 불신앙을 저지르니 말이다. 신앙을 너무 쉽게 생각하면 안 된다. 신앙에는 늘 두려움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늘 두려움을 가지고 신앙생활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잃지 않아야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다. 그래서 신앙에는 늘 겸손이 필요하다. 교만해져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나의 기준 안에 구속할 때, 우리는 불신앙의 죄를 저지르게 된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크신 일을 인간의 좁디좁은 생각으로 재단하지 말아야 한다. 순종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기대하며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그 믿음으로부터 시작된다. 나의 경험과 지식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생각으로 가득 차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온전히 알아챌 수 없고, 오히려 하나님을 작은 분으로 만들어 버리는 신성모독의 죄를 짓게 된다.


신앙의 체험을 고백하는 것은 유익하다. 하지만 자기 경험을 신앙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위험하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많이 쌓는 것은 유익하다. 하지만 자기 지식을 기준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내 경험과 지식이 신앙의 기준이 될 때, 위대하신 하나님을 인간의 경험과 지식 안에 가두는 신성모독의 죄를 짓게 되기 때문이다.


오늘 나는 과연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겸손히 받아들이는 신앙인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내 틀 안에 가두는 신성모독자 바리새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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