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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태현 Apr 26. 2019

바리새인과 나 13
천국을 거부한 진영론

바리새인과 나 #13




요 9:24~34 이에 그들이 맹인이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그들이 이르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그들이 욕하여 이르되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갈등은 때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성장의 도구가 된다. 개인 간의 갈등이나 공동체 간의 갈등이나 모두가 성장하는데 주요한 요인이 된다.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인격이 더욱 성숙하고 사회의 질서가 더 확고해질 수 있다. 하지만 갈등이 모두 이렇게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갈등이 공동체 전체를 몇 개의 집단으로 나누어 놓기도 하는데, 서로 다른 이해관계나 견해의 차이로 세력화된 여러 개의 집단이 자기 집단의 이익을 위해 경쟁하기 시작한다. 정치학에서는 이것을 ‘균열(cleavage) 구조’라고 부른다.


우리는 불과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대립하는 ‘냉전 시대’를 살아왔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사회와 소련연방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가 자본과 군사력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서로 경쟁하는 것을 보았다. 한반도도 여기서 예외는 아니었다. 오랜 시간을 남북으로 나뉘어, 아직도 세상에 마지막 남은 분단국가로 정치이념이 낳은 균열 구조의 폐단을 그대로 안고 있다.


우리나라는 오랜 시간 지역적인 균열 구조의 틀 안에 있었다. 남과 북으로 나뉜 것은 이념 때문이라 하더라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등 지역과 인물을 중심으로 갈라져 있었다. 그러다가 현대에 와서는 보수정당을 중심으로 안보를 중요시하는 소위 보수세력과 영남지역 등이 결집하여 보수진영을 만들어냈고, 반대로 진보정당들을 중심으로 민주화 세력과 노동자 집단, 호남지역 등이 결집하여 진보진영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양자 대결의 구도 속에서 계속되는 정치공방은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마치 다른 논리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진보나 보수가 모든 선악의 기준인 것처럼,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하고, 둘 중 하나를 위해 싸워야 한다. 양쪽 진영이 모두 자기들만의 기득권을 차지하고서 도무지 그것들을 나누려 하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의 정치 현실이다.


이는 정치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교회 안에도 얼마든지 비슷한 것들이 있다. 교단마다 균열 구조가 있고, 진영이 나누어져 있다. 그리고 그들 각각의 기득권을 가지고서 상대 진영을 공격함으로써 자기 진영을 정당화하고 기득권을 쌓아가고 있다.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도 이런 진영에 관한 일화가 있다. 나면서부터 시각장애인이었던 한 청년의 이야기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길을 걷다가 태어날 때부터 시각을 갖지 못한 한 청년을 보게 된다. 제자들이 “누구의 죄 때문에 저 청년이 시각장애인이 되었습니까?”하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해서라고 대답하셨다. 그리고 그 청년을 고쳐 주셨다.


눈을 뜨게 된 청년을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에게 데려갔다. 시각장애인이 눈을 뜨는 것은 성경에 기록된 메시아의 상징임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환자를 고치셨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죄인으로 규정짓는다. 바리새인들의 이러한 잘못된 판단에 반대하여 시각장애인이었던 청년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주장하다가 결국 바리새인들에게 쫓겨나고 만다.


이 사건이 진영론과 매우 밀접하다는 사실은 몇 구절의 말씀에서 바로 드러난다.     


요 9:22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 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
요 9:28 그들이 욕하여 이르되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이렇게 바리새인들은 오랜 세월 자신들이 유지하고 있던 진영론과 균열 구조로 예수님과 예수님의 사역을 규정짓고 있었다. 예수님은 이 말씀들에 이어지는 요 9:39 말씀에서 이러한 것들을 심판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이런 균열 구조를 지지하지 않으셨다. 우리가 가진, 이념과 학연과 지연과 혈연으로 이루어진 진영론을 반대하셨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심판받을 진영론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 나라를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에 진영론에 빠져 있던 바리새파나 사두개파 같은 종파들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들은 조금이라도 자기들과 비슷한 생각과 말을 하면 자기 진영에 넣고 보호했고, 자기들의 생각과 말을 반대하면 반대편 진영에 넣어 비난하고 공격하기 일쑤였다. 그들의 진영론은 심각한 수준을 넘어 한편으로는 우습기까지 했다. 사도바울은 이런 진영론에 빠진 바리새인들을 이용해 아주 곤란한 상황을 모면한 적이 있었다.


행 23:6~10 바울이 그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지니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크게 떠들새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으면 어찌하겠느냐 하여 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은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인을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내로 들어가라 하니라


위 말씀은 사도바울이 산헤드린 공회에서 재판을 받을 때 일이다. 그는 현장에서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는 일촉즉발의 위기 앞에 있었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내세와 부활, 영적인 존재들에 대해서 믿고 있던 바리새인들을 이용하여 위기를 모면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상황이 얼마나 우스운지 모른다. 이들은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들이었다. 이들은 분명 신성을 모독했다는 죄로 십자가에 예수님을 매달아 죽이기로 결의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자기들이 십자가에 죽이기로 정죄했던 예수님을 구세주로 증언하고 있는 사도바울에 대해서는 악한 것이 없다고 말했다. 정말 우습지 않은가? 한 민족을 대표하는 지성을 가졌다는 사람들이 어쩌면 이렇게 일관성도 없고 무지할 수 있을까?


사도바울의 일화로 알 수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제사장들이 정말 예수님의 말씀이 자기들의 신념과 달라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을까? 그렇지 않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을까?


그들은 처음에는 예수님이 어느 진영에 속하셨는지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와 시험하는 질문을 던졌다. 예수님은 그들의 의도가 무엇인지 잘 알고 계셨지만,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주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편도 들어주지 않으셨고, 사두개인들의 편도 들어주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 사두개인들을 통쾌하게 물리치셨다는 말을 듣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찾아가 슬쩍 자기들 진영에 꿰어 맞추려 했다가 오히려 예수님께 호되게 혼난 일도 있었다.


예수님은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으셨다. 바로 그것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유였다. 그들 모두는 자기들 진영에 속하지 않으신 예수님을 배척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기 위해, 평소에는 원수였던 서로 다른 진영들이 모여 하나가 되기도 했다. 그들 스스로가 예수님을 대적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반대 진영을 만들어 낸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을까?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사회적인 균열 구조로 진영이 생성되면, 이 진영은 기득권을 가진 패권 구조가 된다. 이러한 구조 자체로 혜택을 보는 기득권층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 안에서 패권을 차지한 기득권층들은 이 진영을 통해 얻은 기득권을 포기할 수 없다. 진영이 무너지면 기득권을 모두 잃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치열하게 자신들의 진영논리를 대변하게 된다. 그것이 때로는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라도 말이다. 특히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의 진영 대립과 같이 두 개의 진영이 극단적으로 대립한 상태에서는 상호 적대적이기는 하지만 반대편이 존재하지 않으면 또 다른 편도 존재할 수 없기에 극과 극으로 적대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공생관계인 ‘적대적 공생 관계’를 맺게 된다.


이러한 ‘적대적 공생 관계’ 안에서는 일정한 자기들만의 규칙이 생겨난다. 서로 공격하고 방어하는 일이 매우 치열해 보이지만, 어느 정도의 선을 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러한 경쟁은 정해진 경로를 정확하게 따라가게 되어 있다. 이들이 한 번 이러한 경로를 정하면 시간이 흘러서 그런 경로보다 훨씬 더 효율적인 경로가 존재해도 여전히 답답한 예전의 경로를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이런 현상을 ‘경로 의존’이라고 한다. 성경에서 우리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이야기를 읽으면 가슴이 답답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마치 정치를 하는 정치인들을 보며 답답한 마음이 드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신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삶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경로를 따라 사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바리새파 진영과 사두개파 진영 모두에게 위험한 일이다. 하나님 나라가 월등히 의롭고 선한 길을 걸어가는 것이기는 하지만, 바리새파 진영과 사두개파 진영이 만들어 놓은 ‘경로 의존’이 완전히 깨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예수님께서는 심지어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의 적대적 공생 관계를 깨뜨리는 ‘화평’을 선포하셨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샬롬”은 하나님 나라로부터 임하는 평화를 말한다. 이는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인 사람들의 헌신을 통해 적대적인 관계가 사라지는 매우 긍정적인 개념이다. 하지만 ‘적대적 공생 관계’를 맺고 있는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에게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개념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샬롬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들이 쌓아두었던 기득권이 모두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제거하기로 합의했다. 그것도 매우 이례적으로, 원수였던 이들이 모두 하나가 되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았다.


자 이제 우리의 모습을 보자. 한국교회 안에, 각각의 교단들 안에, 우리 교회 안에 있는 나의 모습을 보자. 우리는 모두 한쪽 진영 안에 있지 않은가? 적대적 공생 관계 속에서 우리는 기득권을 누리고 있지 않은가? 해오던 것을 반복하고만 있는 답답한 경로 의존의 현상이 우리 안에 일어나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그 알량한 기득권과 경로를 지키기 위해 진리를 희생시키고 있지는 않은가? 진영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지는 않은가? 나의 진영을 지키기 위해 천국을 거부하고 있지 않은가?


어렸을 때, ‘진돌이’라는 놀이를 자주 했다. 동네 아이들을 모두 모아 두 편으로 나눈다. 한 백 미터쯤 되는 거리의 전봇대를 각자 집으로 삼는다. 상대편 집을 쳐들어가 차지하고 만세를 부르면 승리하는 그런 놀이였다.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놀다 보면 해가 지는 줄 몰랐다. 온 동네 아이들이 다 모여 놀다 보니, 저녁밥 먹을 때가 되면 여기저기서 엄마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면 그때가 놀이가 끝나는 시간이다.


전봇대 가로등 아래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땀을 뻘뻘 흘리며 자기 집을 지키고 있다가도 “이제 집으로 돌아와! 밥 먹어라!” 하는 목소리가 들리면, 그렇게 열정적으로 지키던 전봇대 집을 버리고 진짜 집으로 가야 했다.


하나님의 나라가 선포되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들려졌다. “집으로 돌아오라!” 부르시는 그 음성에도 아직 전봇대를 붙들고 ‘진돌이’를 하고 있지는 않은가? 썩어 없어질 세상의 진영과 사람의 기득권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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