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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태현 Apr 12. 2019

바리새인과 나 12
체면치레하다가

바리새인과 나 #12




마 21:23-3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 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여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뇨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양반은 얼어 죽어도 겻불은 아니 쬔다.”라는 속담이 있다. 쌀이나 보리, 조, 밀 등을 찧으면 껍질이 벗겨지는데 이 껍질을 보통 ‘겨’라고 부른다. ‘겻불’은 이런 곡식의 껍데기로 피운 불을 가리킨다. 쌀겨나 보릿겨에 불을 피우면 그 불은 매우 위험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연기만 나는 것 같고 불씨가 작게 보이지만, 장난을 치다가 실수로라도 불을 피워놓은 겨 무더기에 발이 빠지면 크게 화상을 입는다. 겨 무더기 속은 용광로처럼 뜨겁게 타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논에 쌓아둔 겨 무더기에 불을 피우고 놀다가 사고를 당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 이후로 나는 겻불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용광로처럼 뜨거운 불이 끓고 있다 해도 겉으로 보기에는, 이게 불이 타고 있는 건지 꺼져가고 있는 건지 알 길이 없다. 불타는 모양새가 초라하기 그지없다. “양반을 얼어 죽어도 겻불은 아니 쬔다.”라는 말에는 양반의 체면이란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엄동설한에 아무리 얼어 죽을 위기에 처해도 겻불과 같은 볼 품 없는 불을 쬐지는 않는다는 뜻이 들어 있다.


양반이 겻불을 쬐지 않는 이유는 그 불이 볼품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예전에는 쌀이나 보리를 찧어 나온 겨들은 외양간이나 뒷간에 쌓아두었다. 가축의 우리에서 나온 오물들과 겨를 섞어 두기도 하고, 뒷간에서는 볼 일을 본 뒤에 겨로 배설물을 덮어두었다. 그러면 오물과 겨가 섞여서 발효가 되면서 두엄이 만들어진다.


한겨울에 두엄을 쌓아두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두엄이 발효되면서 열이 발생하기 때문에, 아주 추운 날에도 두엄 옆에 있으면 온기가 느껴진다. 두엄이 발효되면서 메탄가스가 발생하기 때문에 잘 발효된 두엄에는 불이 곧잘 붙는다. 겨울에 두엄을 논이나 밭에 뿌리는 일을 할 때는 두엄을 한 수레 퍼다 놓고 거기에 불을 붙인다. 그러면 일하는 중간중간 몸을 녹일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열일을 다하고 남은 재는 두엄과 함께 논밭에 뿌려져 거름이 된다.


이렇게 말하면 참 지혜로운 일이고 유용한 것이지만, 두엄에 불을 붙인 겻불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직접 거름을 주는 일을 하지 않고 겻불만 잠깐 쬐고 지나가도 몸에서 두엄냄새가 나게 되는 것이다. 체면을 중요시하는 양반의 몸에서 오물 냄새가 난다는 것은 매우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낡은 의관을 갖추고 있다고 해도 깨끗하게 세탁해서 정갈하게 입는 것이 양반의 체통인데, 의관에서 두엄냄새가 난다면 그것은 양반의 체면 상 부끄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겻불이 타는 모양이 하찮아 보였기 때문이든, 겻불에서 나는 거름냄새 때문이었든, 어쨌든 양반은 얼어 죽을지언정 겻불은 쬐지 않았다. 조선시대 양반들에게 체면은 목숨보다 중요했다는 이야기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가 어떻게 목숨보다 중요할까? 엄동설한에 얼어 죽을 정도가 되면 겻불을 쬐는 정도가 아니라 거름 속에라도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도대체 그놈의 체면이 뭐라고 목숨과 바꿀까? 참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더 안타까운 것은, 사실 나조차도 그런 체면문화에 젖어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체면문화는 조선시대의 사회계층과 지배구조를 결정했던 유교문화에서 왔다. 유교의 가장 중요한 가치인 ‘인(仁)’은 인간다움에 관한 사상인데,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본질을 말한다. 인(仁)을 중요시하는 유교문화에서는 ‘~다움’, 예를 들어 ‘남자다움’, ‘여자다움’, 양반 다움‘, ’ 부모 다움‘, ’ 자녀 다움‘ 같은 것들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원래 인(仁)의 본질은 그런 것이 아니었겠지만, 인(仁)의 본질이 왜곡되면서 남들에게 ’ 보이는 무엇‘을 중요시하게 된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아무리 궁색해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관혼상제에는 아낌없이 재물을 써야 했다. 사회에 널리 퍼진 체면문화는 백성들에게까지도 영향을 주었지만, 무엇보다 사회의 지배층일수록 더욱 부정적인 경향이 심했다. 왜냐하면 체면을 크게 세우는 것이 일종의 권력이었기 때문이다. 피지배층에게 얕보여서는 안 되었기에, 무언가 자신들이 남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어야만 했다.


시대가 변하고 실속을 중요시하는 세상이 찾아왔지만, 우리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체면문화의 흔적은 지금도 우리의 생활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미국의 직장인들은 양복을 잘 차려입고도 우스꽝스럽게 운동화를 신고 출근을 한다. 그렇게 회사에 도착하면 그제야 사무실에 있던 구두를 꺼내 양복에 맞춰 신는다. 하지만 한국의 직장인들은 정반대다. 양복에 구두, 양장에 하이힐을 신고 복잡한 도심을 횡단해서 회사에 출근한다. 그렇게 회사에 도착하면 그제야 구두나 하이힐을 벗고 슬리퍼로 갈아 신는다. 이것도 체면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이 정도는 애교에 가깝다.


학교에서 아이들은 자기들이 살고 있는 집, 입는 옷이나 신발, 가방의 브랜드나 가격으로 서로서로 등급을 매긴다. 가난하거나 유행에 뒤처지면 왕따를 당하기도 한다. 청년들은 타고 다니는 차가 외제차인지 국산차인지, 대형 승용차인지 경차인지에 따라 서로서로 마음의 등급을 매긴다. 전에 만났던 한 남자 전도사가 “남자는 시계와 차로 자신의 가치를 나타냅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주여~!” 내 입에서 저절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세상에! 정말 전도사가 맞는가?’ 싶었다.


관혼상제의 허례허식은 말할 것도 없다. 자기 자신은 기억조차 못 할 아기들의 백일이나 돌잔치를 보면, 사진 몇 장 화려하게 남기기 위해, 혹은 지인들에게 과시하기 위해 행사장을 예약하고 이벤트를 벌인다. 결혼은 어떤가? 정말이지 돈을 쏟아붓는다. 얼마나 남들에게 보이는 게 중요한지, 요즘 결혼식장에는 이른바 ‘하객 아르바이트’까지 판을 치고 있다. 그 많은 꽃들과 장식들, 몇 번을 갈아입는 화려한 드레스, 비행기를 타고 해외 유수의 관광지를 다녀와야 결혼식이 끝난다. 가정을 꾸리면서 제일 많은 돈을 쓴다. 장례식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조화들, 수의와 관, 상조회가 만들어낸 고가의 장례용품들을 땅에 묻기 위해, 혹은 불태우기 위해 사용한다. 우리는 이렇듯 우리 내면에 잠재하고 있는 권력에 대한 욕구를 체면이라는 이름으로 표출하고 있는 중이다.


체면이라는 이름으로 권위를 세우려고 하는 우리 사회의 그늘은 이른바 ‘고소 공화국’이라는 오명도 만들어 냈다. 자신의 체면에 상처를 주었다고 생각하면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기 일쑤다. 그렇게 해서라도 상대방에게 권위를 세우려고 한다.


한 기사를 보니 우리나라의 형사사건 중 고소가 차지하는 비율은 가까운 이웃나라인 일본의 60배 수준이라고 한다. 최근 5년 간 고소사건의 기소율이 18%인데 반해 불기소율은 전체 사건보다 23%나 높았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전혀 죄가 되지 않는 사소한 일로도 수많은 사람들이 고소를 하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 사회는 이토록 체면을 중시 여기는 사회다. 권력과 권위에 대한 갈망이 이 땅에 가득 차 있다.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를 보시면 뭐라고 하실까?


유대인들은 우리만큼이나 체면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이다. 이 체면, 권력, 권위의 측면에서만큼은 한국인들과 유대인들이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비슷하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유대인들이 얼마나 체면을 중요시 여겼는지 알 수 있다. 심지어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도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다가 유대인 형제들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그 자리를 피해서 숨었던 일이 있었다. 사도바울은 이 일로 베드로를 크게 책망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된 이후에도 유대인의 체면문화의 습관을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 선교사들이 처음 야구를 들여왔을 때 양반들에게 함께 야구를 하자고 하니까 “저렇게 치고 뛰는 일은 머슴들한테 시키면 되지 왜 힘들게 그걸 하느냐?”라고 말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유대인들도 비슷한데, 탕자의 비유에서 그 아버지가 아들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통해 예수님은 다함없는 희생적 사랑을 표현하셨다. 왜냐하면 유대인은 결코 뛰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급해도 걸어가야지, 뛰는 것은 점잖은 유대인이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탕자의 아버지는 허랑방탕한 아들일지언정, 그 아들을 깊이 사랑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체면을 버린 것이다.


유대인들이 얼마나 체면을 중시했는가는 밤중에 떡을 얻으러 온 친구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눅 11:5-7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달라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의아해 할 수 있다. 예수님은 분명히 밤중에 문을 다 닫고 모든 가족이 잠자리에 누웠는데, 그것은 빵을 줄 수 없는 이유가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왜? 도대체 왜 그럴 수 없다는 말인가? 우리는 분명히 “너는 염치가 있는 사람이냐? 모두 잠자리에 든 이 한밤중에 빵을 빌리러 온 네가 제정신이냐?”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너희들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하고 물으셨다. 유대인들은 그렇게 할 사람들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체면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밤중에 손님이 집에 찾아오면 잘 대접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도무지 체면이 서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 그 집에 빵이 없으면 옆집에 가서 꾸어서라도 가지고 와야 한다. 만일 옆집에서, 빵이 없는 이유가 아니라, 잠자리에 들었기 때문에 귀찮아서 빵을 꾸어주지 않는다면, 오히려 빵을 빌려주지 않은 그 사람이, 친구의 체면을 깎아먹은 염치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밤중에 다 누워 자는 집에 빵을 얻으러 온 친구는 전혀 염치없는 것이 아니고, 빵이 있음에도 여타의 이유로 빵을 주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 친구가 정말 염치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체면문화는 우리와 비교해 보아도 대단하다. 유대인들은 우리만큼이나 체면을 중요시 여긴다. 이 말은 유대인들도 남들에게 보이는 것, 다른 사람들에게 행사하는 것, 즉 권력이나 권위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는 예수님께 ‘권위’에 대한 질문을 했던 것이다.


마 21:23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 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


그들은 예수님께 “성전에서 가르칠 권력을 가진 우리가 당신에게 이런 권위를 허락해 준 적이 없는데?”라며 소위 실력행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마땅히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어야 했는데, 어처구니없게도 예수님과 힘겨루기를 하려고 했다.


예수님께서는 간단한 질문 하나로 그들을 제압하시고, 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 그런 체면 세우기가 아님을 가르쳐 주신다.


마 21:28-32 ...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여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뇨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큰아들은 체면치레하느라 아버지 앞에서는 넙죽 대답을 잘했지만 결국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 작은아들은 못 가겠다고 했지만 뉘우치고 아버지의 뜻을 따랐다. 큰아들이 누구고 작은아들이 누구인가? 우리가 체면치레하느라 아버지의 뜻을 올바로 분간하지 못하면, 우리는 우리가 무시하는 세리와 창녀들도 들어가는 하나님 나라에서 쫓겨나게 될 것이다. 권위를 가지려 하다가, 권력을 추구하다가, 체면치레하다가 천국의 문턱을 넘지 못해서야 되겠는가?


지금 얼어 죽게 생겼는데 체면이 중요한가? 그렇게 체면을 세우고, 권위를 세우고, 힘겨루기를 해서 자기를 드러내 봐야 천국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 나라에는 높고 낮음이 없다. 비교대상이 되는 권위나 권력이 없다. 하나님 나라에 없는 게 교회에 있어서 되겠는가? 마땅히 우리의 모임 가운데도 그런 건 없어야 한다.


체면을 세우려다가 하나님 나라에서 버려지는 어리석은 사람은 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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