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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태현 Jan 07. 2023

그리스도인의 인격 05 사랑

#엄격한 사랑

마 5:44-45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엄격한 사랑     


온유하신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이나 우리의 원수들에게도 선하시고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시기에, 마땅히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우리 큰 아이를 낳고 동사무소에 가서 출생신고를 하니 동사무소 공무원이 기념으로 ‘출생기념 스티커’를 커다랗게 붙인 주민등록 등본을 한 장 주었다. 어디나 그렇게 해주는 것은 아닐 텐데, 그 동사무소에서는 그런 이벤트를 해주었다. 큰 기념이 되었다.     

우리가 집을 사면 등기부 등본이 생기고 차를 한 대 사면 자동차 등록증이 생긴다. 결혼하면 혼인증서를 받는다. 아이가 태어나면 주민등록 관련 증명서들이 만들어지고 가족관계증명서도 만들어진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증명서는 무엇인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명하는 것은 세례 증서나 권사패처럼 종이나 크리스털로 된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우리에게 발급되는 하나님의 자녀 증명서는 우리의 인격이 바뀌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말씀하셨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자녀 증명서는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자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인격이다. 사랑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녀증명서인 셈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사랑의 인격을 소유해야 한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인격인 사랑은 어떤 것일까?     


예수님은 사랑이 넘치는 분이었다. 사랑은 그리스도의 인격이다. 우리는 앞에서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돌려대고, 속옷을 달라고 하면 겉옷까지 내주며, 오리를 가자고 하는 자에게 십 리까지 동행해주라는 예수님의 계명을 함께 나누었다. 그리고 그 사랑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하나님께서 원수까지도 긍휼히 여기시고 구원하시기를 원하시기에, 우리도 그렇게 하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의 성품인 온유라고 했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 보면 사랑의 전혀 다른 측면이 등장한다. 사랑이 넘치는 예수님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는 말이다. 솔직히 말해서 사랑의 예수님이 하시는 행동이라고는 보기 어려운,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들을 보게 된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의 상을 들러 엎으셨다. 심지어 채찍을 들고서 그들을 몰아내셨다(요 2:13-17). 어떻게 그렇게 거침없고 냉정하실 수가 있을까? 게다가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을 들으면 우리는 더욱 예수님의 사랑을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예수님이 심한 욕설을 그들에게 퍼부으시기 때문이다.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우리 문화권에서는 개를 이용해서 사람들에게 욕설을 하지만, 아담과 하와를 미혹한 뱀이야말로 유대인들에게는 가장 저주받은 짐승이었다. 사람을 뱀에 빗대어 말하는 것은 매우 극단적인 욕설 중 하나였다.     

이외에도 바리새인들을 향해 주님이 하신 책망은 짧은 시간에 다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자들아!”, “회칠한 무덤이여!”, “평토장 한 무덤이여!”, “눈먼 인도자여!”, “피가 다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지리라!”     

만일 누군가 우리에게 이런 말을 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이 우리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랑은커녕 우리는 당장 관계를 끊을지도 모른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은 도저히 입에 담기조차 두려운 저주들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 말들에 해당하는 우리말 욕설들로 번역해 본다면, 읽기조차 민망할 것이다. 사실 한국말로 대체를 해봤는데, 얼마나 망측한지 썼다가 지워버렸다.     

그러면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왜 이렇게까지 미워하셨던 것일까? 이렇게 질문했지만, 이 질문은 사실이 아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미워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까지도 사랑하셨다. 십자가에서 당신을 못 박는 군중들을 향해 “아버지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라고 절규하시며 기도하시던 예수님을 생각해 보라. 예수님은 당신을 못 박는 사람들을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못 박은 군중들의 대표가 되는 사람들이었다. 바꿔 말하면 예수님이 용서하신 그 군중들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다. 그렇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용서하시고 끝까지 사랑하셨다.      



진짜 사랑


그러면 예수님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험한 말씀을 하셨다는 말인가? 그렇다. 이 말은 사실이다. 성경에 확실한 증거가 있다.     

막 8: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예수님은, 조금 전에 현실을 직시하는 비전으로 칭찬하시고 반석이라는 이름을 주셨던 베드로에게 이토록 험한 말씀을 하신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예수님은 베드로를 정말 사랑하시고 아끼셨다. 함께 다니던 제자들도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보며 그야말로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게 아끼는 제자에게 이 무슨 끔찍한 저주란 말인가?     

우리는 사랑에 대해 생각할 때,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으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참된 사랑은 그렇지만은 않다. 때로 사랑은 냉정하고 날카롭고 거칠어야 한다.     

“종아리 걷어! 실수와 거짓말은 다른 거야! 실수는 용서받을 수 있지만, 거짓말은 반드시 대가를 치르는 거야.”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라면 한 번쯤은 다 해본 말일 것이다. 진짜 사랑한다면서 한 번도 자녀를 훈계해 본 적이 없다면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라면 중요한 순간에 적합하게 자녀를 지도하는 법이다. 무언가 사실을 말해야 할 때,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실이 듣는 사람에게 충격적이라 해도, 반드시 사실대로, 있는 그대로 말해야 한다. 그래야 진짜 사랑이다. 만일 우물쭈물하고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넘어간다면 그것은 진짜 사랑이 아니다.     

진정한 사랑에는 엄격함이 필요하다. 엄격한 사랑이라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인격을 망치게 되었을 때, 교만해지려고 할 때, 나태해지려고 할 때, 그래서 관계들을 깨뜨리고 있을 때, 그 사실을 정확히 알려주고, 그가 잘못하고 있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말해주는 것이야말로, 진짜로 사랑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거칠고 냉정한 사람들일수록 이 엄격한 사랑을 잘 실천할 수 있다. 앞 장에서 말한 것, 거칠고 냉정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도 공동체에 꼭 필요한 이들이라고 말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따듯하고 부드러운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조차 부담스럽다.     

“이건 꼭 짚고 넘어가야 해. 그냥 놔뒀다가는 결국 큰 문제가 될 거야. 본인도 해결할 수 없고, 관계도 깨질 게 분명해. 좀 언쟁이 되더라도, 이쯤에서 잘못된 걸 되돌리도록 해야 해. 지금은 마음이 많이 아프고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거고, 이 문제가 해결되면 훨씬 좋아질 거니까, 분명히 나중에는 나한테 고맙게 생각할 거야.”     

비교적 거침없고 냉정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며 사랑하는 사람에게 해야 할 일을 할 것이다. 부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꼭 해야 할 일이니,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따듯하고 부드러운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이런 말 자체가 부담스럽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해? 난 갈등이 정말 싫어. 그저 따뜻하게 품어줘야지. 그렇게 품어주기만 하면 분명히 문제가 다 해결될 거야. 예수님의 마음은 사랑이잖아. 그 따듯한 사랑으로 다 녹아지지 않겠어?’     

따듯하게 안아주기만 해도 다 해결되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사랑은 엄격해야 할 때가 있다. 진정한 사랑을 하려면, 때로는 예수님처럼 엄격한 사랑을 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필요한 때에 엄격한 사랑을 할 수 있으려면 한 가지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보다 불편한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무너지는 인격과 깨지는 관계를 보면서도 그저 불편해지는 것이 싫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면, 그 관계는 결국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그러니 서로의 인격성숙을 돕고 더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서로에게 진실을 말해주어야 한다. 그것이 진짜 사랑이다.     


엄격함이 사랑이기 위해 필요한 것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사랑한다는 구실로 상대방을 신랄하게 비판만 하고 저주만 퍼붓는 것은 안 된다. 엄격한 사랑의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은 사랑하는 사람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내 속 시원하게 할 말을 다 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 엄격한 사랑을 위해서, 해야 할 말을 하다가, 감정이 격앙되어 사실이 아닌 말들을 쏟아놓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사랑이 아닌 폭력이 된다. 그렇기에 냉정함을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진심으로 상대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말하고 있는지, 지금 내가 해주고 있는 말이 사실을 벗어나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하며 말해야 한다.     

그러면 상대방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 그 진정성은 어떻게 해야 나 스스로에게나 상대방에게 증명될 수 있을까? 사랑의 진정성이 증명되려면, 그 사랑이 희생적인 사랑이어야 한다. 희생적인 사랑이란 끊임없이 주는 것을 말한다. 무언가 거래하기 위해서는 일단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맞춰놓아야 한다. 주던 것도 멈추어야 하고 받는 것도 멈춰야 한다. 그래야 얼마를 받으면 얼마를 줄지 계산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은 그렇지 않다. 사랑의 진정성이 증명되고 그 사랑이 열매를 맺으려면 계속 주어야 한다. 희생이 필요하다.     

예수님도 그렇게 하셨다. 바리새인들을 향해 신랄한 비판과 저주까지 퍼부으면서도 계속 바리새인들을 만나신다. 좀 거리를 두고 피하실 만도 한데, 계속 그들과 함께 계신다. 세례요한은 “누가 너희더러 임박한 환난을 피하라고 가르쳐주더냐?” 하며 바리새인들이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조차 못마땅하게 여기는 티를 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당신의 말씀을 들으러 오는 것에 아무런 불편함도 표현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오는 것을 금하지 않으셨다. 더 나아가, 당황스럽게도, 바리새인들의 집에 들어가셔서 그들에게 대접까지 받으시면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물론 그들이 예수님을 대접했다고 해서 바리새인들에게 따듯하고 부드럽게 말씀하시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 구체적으로 그들을 책망하시고 가르치셨다.     

예수님께서 엄하게 책망하셨지만, 그것이 사랑이었다는 증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예수님은 그들이 고치고 바뀌어 돌아올 것을 기대하시며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베풀어 주셨다. 그리고 그가 아무리 바리새인이라고 해도 예수님께 묻기만 하면, 하나님의 나라와 구원과 거듭남의 진리를 친절하게, 남김없이 모두 가르쳐 주셨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이다.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 끊임없이 베푸는 희생의 사랑을 주셨던 것이다.     






온유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고, 그 온유함의 절정이 원수를 선대 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 원수를 선대 하는 것이 하나님의 따듯하고 부드럽고 친절하신 사랑이라고 한다면, 그 사랑은 온전한 사랑의 반쪽이라고 할 수 있다. 나머지 반쪽은 무엇인가? 사랑하는 이들이 올바른 길을 걷도록 돕는 엄격한 사랑이다. 따듯하고 부드러운 사랑이 필요한 것만큼 우리에게는 거침없고 냉정한 사랑, 엄격한 사랑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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