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무주, 덕유산
일부러 흑백으로 촬영하지 않아도 눈 내린 겨울 풍경은 자연스레 담백한 흑백사진이 된다. 덕유산을 찾던 날, 중부고속도로 인삼랜드 휴게소 부근에는 전날 소담하게 내린 눈으로 인해 보이는 풍경 모두가 한 장의 수묵화다. 낡은 건물과 작은 시골길, 그리고 을씨년스레 서 있는 전봇대 등 평상시 그저 그랬을 사물(事物)들이 하나의 사유로 인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비칠 수 있다는 것, 겨울이 주는 묘미다.
구천동 길
겨울 덕유산을 오른다. 1975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덕유산은 사시사철 찾는 발걸음으로 항상 인산인해를 이루지만 설경을 보러 오는 겨울 산객이 특히 많은 곳이다. 덕유산을 오르기 위해서는 등산로를 따라 걸어 오르는 길과 무주리조트에서 곤돌라를 타고 설천봉까지 오르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함께 길 나선 일행들과 백련사를 거쳐 향적봉까지 걸어서 오르기로 하였다. 십오 리 구천동 오르는 길에 펼쳐질 설경과 적설(積雪)에 묻혀있을 백련사 풍경을 보기 위해서다. 여름이면 피서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을 구천동 계곡은 하얀 눈에 덮여있고 우렁차게 흘러내리던 계곡물은 단단하게 얼어있다.
백련사
한달음에 오른 가쁜 숨을 백련사에서 잠시 내려놓는다. 능선 부근에 활짝 핀 상고대가 백련사에서는 손에 잡힐 듯 지척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고즈넉한 산사의 풍경은 늘 봐도 아늑하지만, 눈이 내리면 설경과 함께 아름다움이 더해진다. 처마의 곡선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도 하고 기왓골의 흑백이 또렷하게 선명해지기도 한다. 이렇듯 겨울 풍경이 아름다운 백련사는 동안거(冬安居)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설경을 보러 온 인파들로 인해 북적대고 시끌벅적하기만 하다.
향적봉 오르는 길
속세를 벗어나듯 서둘러 백련사를 뒤로하고 본격적으로 향적봉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향적봉 오르는 길은 자칫 지루하고 힘든 된비알이 끊임없이 이어지기 때문에 어지간한 인내력을 갖지 않고서는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애써 힘들이지 않아도 향적봉까지 쉽게 오를 수 있는 곤돌라를 타고 오르는 사람이 많은 까닭이다. 하지만 걸어서 오르다 보면 산이 주는 다양한 풍경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산 ‘맛’에 들린 사람들은 힘이 들더라도 대부분 걸어서 산을 오른다. 특히 덕유산이 그러하다. 어느 때는 인내력 테스트를 하듯 자기와의 싸움을 부추기고 어느 때는 멋진 풍경들을 내어주며 산 품에 빠져들게 한다. 겨울 덕유산이 주는 매력이기도 하다.
정상 향적봉
가쁜 숨을 여러 차례 토해내고 등줄기에 땀이 흠뻑 젖어 들고서야 향적봉에 올라섰다. 향적봉 사방으로 펼쳐진 풍경은 무어라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장관을 연출한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켜켜이 이어지는 능선의 너울은 그저 감탄사를 부르고 능선과 능선 사이에 걸쳐있는 운무는 몽환적이기만 하다. 향적봉을 넘나드는 칼바람과 영하 수십도 추위도 잊은 채 정상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향적봉을 뒤로하고 백련사길로 다시 하산한다. 겨울 산의 밤은 늘 빠르게 내려앉는다. 특히 절집의 저녁은 어둠이 오기도 전 적막이 먼저 내려앉아 고요에 든다. 어둠 내린 백련사는 한낮의 난장(亂場) 같던 모습과는 사뭇 다르게 제대로 된 절집의 모습으로 돌아와 평온하다. 일주문을 돌아 나오며 인적 끊긴 외진 산중의 토굴보다 어쩌면 번잡스러움이 늘 가득한 이런 관광지의 사찰이 수행함에 있어서는 더 적절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수행하면서 주처住處)가 따로 없겠지만 말이다.
우리나라 산들은 장엄하거나 요란하지 않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밀조밀한 아름다움이 있다. 특히 뚜렷한 사계절은 철마다 변화무쌍한 모습을 시시각각 달리 보여줌으로써 지루함이 없다. 덕유산 또한 사시사철 그러한 아름다움을 모두 지니고 있는 산 가운데 한 곳이다. 특히 덕유산은 소소한 계곡의 아름다움과 광활하고도 장엄한 능선까지 지닌 산이다. 겨울 덕유산을 추천한다. 걸어서 향적봉까지 오르는 것도 좋고, 산행에 자신 없다면 곤돌라를 타고 설천봉까지 올라도 된다. 아니면 백련사까지 가는 구천동 눈길 도보여행도 좋다. 어떠한 방식으로 찾든 덕유산은 찾는 이들에게 겨울 산의 참모습을 충분히 내어주고도 남을 거다.
<1975년 10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덕유산은 소백산맥 전북 무주군을 중심으로 인근 경남 거창과 항양, 그리고 전북 장수군에 걸쳐 있는 산이다. 주봉인 향적봉은 그 높이가 1,614m에 이르며 남덕유산을 비롯하여 1,000m 이상의 고봉들이 남북으로 길게 펼쳐져 있다. 구천동 계곡은 덕유산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명소이며 백련사를 비롯하여 적상산 등에 다양한 문화재가 분포되어 있다.>
*황하와 떠나는 달팽이 여행 에세이는 [월간 조세금융], [월간 안 전 세계]에 연재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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