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사, 담양 창평 마을, 소쇄원
儻無勝事酬佳節(당무승사수가절)
아름다운 시절에 어울리는 그 멋진 일을 하지 아니하면,
何日浮生得展眉(하일부생득전미)
뜬구름 같은 이 인생에 그 언제쯤이나 이맛살을 펼 수 있을까.
이용휴(李用休·1708~1782)의 시 尋春 중에서
尋春, 봄을 찾다
아비규환 같은 현실을 잠시 벗어나 봄마중 길을 나섰다. 이른 새벽 도착한 구례 화엄사에서 불그스레 피기 시작한 홍매화 한 그루와 한참을 사진 찍기 놀음하였고, 읍내 목화 식당에서 맑은 소 내장탕 한 그릇으로 추위를 녹여내기도 하였다. 이어 들른 담양 창평 마을, 그리고 소쇄원에서 느릿하게 걸으며 온 종일 봄 놀이를 즐기고 왔다.
화엄사 각황전 홍매화
남도의 봄은 어김없이 때가 되면 가장 빨리 온다. 화엄사의 홍매가 덜 피었다. 꽃 보러 온 상춘객들은 이내 실망한다. 자연은 순리를 따르는데 꽃을 보고자 하는 인간의 욕심은 여전히 성급하다. 꽃이 만개하지 않았다고 이곳저곳에서 실망 섞인 탄식이 쏟아져 나온다. 그러든 말든 화엄사 홍매는 피고 지기를 순리에 따라 만개할 때를 기다리고 있다.
화엄사 홍매는 날씨의 변덕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해마다 3월 20일경부터 피기 시작하여 3월 말까지 절정을 이룬다고 한다. 각황전 앞 홍매뿐만 아니라 화엄사 말사인 길상암 절마당에 있는 화엄 매는 수령 사백여 년이 넘은 자연산으로 천연기념물제485호로 지정되어 있다.
슬로 시티 창평 마을
시골 마을의 봄은 어떠할까? 궁금증을 안고서 찾은 창평 마을, 아시아에서 최초로 슬로시티 지정을 받았다는 이 마을에도 봄은 오고 있었다. 돌멩이를 켜켜이 쌓아 올린 담벼락 너머로 매화, 목련, 산수유 등이 고개를 내밀며 무채색의 공간을 환하게 밝혀준다. 담은 구불구불하고 또랑 물도 담벼락을 따라 유유자적 흘러내린다. 구비 진 모퉁이를 돌아서면 누가 사는 집이 나올까 하는 궁금증에 미로 속을 헤매는 것처럼 동네 안 골목을 한참이나 기웃거려 보았다.
또랑 물은 한적한 동리에 어울리게 돌담길을 따라 느릿하게 때로는 빠르게 흐르며 마을을 유랑한다. 흙담과 담 너머 집들은 고즈넉한데 집들은 대부분 비어있다. 어쩌면 주말이 아니어서 그러는지 모르겠다. 한편 자연스럽게 산다는 게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곳을 찾아 느릿하게 걷는 이들에게는 저절로 슬로시티다. 담벼락 너머를 흘깃거려 보기도 하고 오래된 퇴청 마루에 걸터앉아 한시름을 놓아보기도 한다. 물소리는 마을을 기웃거리는 내내 끊이지 않는다. 끊긴듯하다가 다른 골목으로 들어서면 어김없이 나타난다. 사람 사는 마을 한복판에서 이렇듯 물소리 들으며 걸을 수 있는 곳이 몇 군데나 될까? 예전에는 마을마다 흔했던 풍경인데 말이다.
이러한 풍경이 남아있는 창평 마을에서는 성격 급한 사람도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질 듯하다. 말 그대로 슬로시티(Slowcity)인 거다.
소쇄원
소쇄원은 은둔한 양반의 호사스러운 놀이터이다. 작은 계곡물이 흐르고 계곡 좌우로 정자와 사랑채 등 여러 건물을 산세 흐름에 따라 자연스레 조성하였다. 소쇄원을 들어서는 입구에는 울창한 대숲이 빼곡히 들어서 있는데 세상과의 경계를 그어 놓은 상징적인 배치이다. 안으로 들어서면 바깥세상에서 전쟁이 일어나도 모를 것 같다. 이런 곳에서 한평생을 은둔하며 보냈다 하니 양산보란 사람, 한량 유생(閑良儒生)이었는지, 안빈낙도(安貧樂道) 한 삶을 살다 간 청빈 유생(淸貧儒生)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가진 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금수저를 갖고 태어난 그들은 이미 조선시대에도 있었고, 관직에 나가지 않고 소위 은둔 생활을 하면서도 풍류를 즐기며 평생을 유유자적한 삶을 살기도 했다. 또한 경치 좋은 곳에 정자를 세우거나 집을 지어놓고 그곳에서 한 평생을 안빈낙도의 삶을 살았다. 대표적인 곳이 소쇄원이다. 혹자들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정원이며 유학자들의 정신이 깃든 곳이라 칭송하지만 일반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그 말에 동의하기는 어렵다. 입구에 울창한 대숲을 조성하여 세상과 스스로 차단하고 흐르는 계곡물소리 들으며 나라의 존망을 걱정했었을까? 아니면 풍류나 즐겼을까? 모를 일이다. 뜰 앞 늙은 매화나무는 알 것 같은데 모른 채 꽃 망울 터뜨리기에만 열중하고 있다.
자연과 조화롭게 꾸미고 가꾼 정원의 측면에서는 빼어나게 아름다운 곳이다. 흐르는 물을 거스르지 않고 흘러내리게 하면서도 그 위에 주위와 어울리게 쌓은 담벼락이나 떨어지는 산자락에 세워진 누각들은 자연과의 어긋나지 않는 완벽한 조화를 보여준다. 그리고 대나무, 소나무, 매화나무 배롱나무 등을 적절한 곳에 배치시켜 사계절 내내 심심하지 않게 조성한 조경도 일품이다. 자연과 인공을 훌륭하게 결합시킨 조선의 대표적 정원이자 풍류를 즐기던 양반들의 놀이터, 소쇄원은 바로 그런 곳이다.
어쩌면 봄은 이미 내 안에 와 있는지 모른다. 다만 사사로운 생각에 늘 사로잡혀 살다 보니 스스로가 인지하지 못할 뿐일 수도 있다. 그러니 자꾸 밖에서 봄을 찾으려 할 수밖에. 그래도 나서보니 봄은 이미 성큼 우리들 곁에 와 있었다. 화엄사 각황전 옆 홍매가 그러했고 창평 마을 담벼락 너머 산수유가 그러했다. 소쇄원의 늙은 매화나무도 마찬가지고.
아비규환 같은 세상에서 하루하루 살아내느라 힘에 겨운 일상을 잠시라도 벗어나 보시길 권한다. 그리하여 봄볕에, 봄바람에, 봄의 대지로부터 힘찬 기운을 받아보시기를, 그리고 자연의 이치에 대해 잠시 잠깐이라도 눈 맞춤도 하다 보면 지금껏 살아온 세상과 확연히 다른 새로운 세상이 보일 수도 있지 않을까.
*황하와 떠나는 달팽이 여행 에세이는 [월간 조세금융], [월간 안전 세계]에 연재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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