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서 20년간 쌀밥만 먹은 이야기
"안녕하세요, 쇼호스트 ㅇㅇㅇ 입니다.
오늘은 12곡 잡곡을 들고 나왔습니다.
요즘... 건강 챙기시느라 쌀밥만 드시는 가정은 없으시죠?
이 12곡 잡곡과 함께라면 더욱 건강한 생활이 가능하십니다!"
TV에서, 신문에서 잡곡밥에 대한 효능 광고가 엄청나다.
쌀눈과 가장 안쪽의 껍질까지 모조리 벗겨낸 하얀 쌀밥.
부드러운 식감으로 인기가 좋았지만, 최근 영양소 부족으로 잡곡에게 많이 밀려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집은 내가 태어나서 약 20년간은 오로지 쌀밥만 먹었다.
왜?
아빠가 그러고 싶으셨으니까.
아빠는 8남매 중 남자로는 두 번째, 총 남매 중에는 세 번째로 태어나셨다.
지금은 경주시에 소속된 안강읍이 아빠의 고향인데
모르긴 몰라도 정말 가난하게 사셨다고 한다.
아빠가 중학생이던 시절,
당시 정부에서는 '혼분식 장려 운동'이 있었다고 한다.
<혼분식 운동이란? >
1962년 흉년으로 쌀 650만석이 모자라게 되자, 박정희 정부는 대대적인 '미곡(米穀) 소비 절약' 운동에 들어갔다. 쌀소주와 쌀과자, 쌀떡 제조가 금지됐고, 설렁탕 등 국밥에는 3할 이상 국수를 섞어야 했다. 1969년부터는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을 분식의 날, 일명 '무미일(無米日)'로 정했다. 이날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는 쌀로 만든 음식을 팔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중학교에 싸가던 도시락에도 밥의 30% 이상은 무조건 잡곡이어야 했다고 한다.
많은 친구들이 쌀밥을 듬뿍 담고 가장 위에만 보리밥을 살짝 깔고 오곤 했단다.
하지만,
집이 가난하여 쌀밥을 싸갈 수 없었던 아빠는 어쩔 수 없이 항상 보리밥이 듬뿍 담긴 도시락을 싸가셨다.
그러던 어느 날 지금의 교육청 같은 곳에서 높으신 분이 감사를 나오셨고
선생님은 반을 한 바퀴 돌다가 아빠 앞에서 멈춰섰다.
그리고는..
"여러분, ㅇㅇ이 도시락을 보세요. 혼분식은 이렇게 싸오는 거에요.
보리밥 양이 얼마나 많나요? 다들 쌀밥을 아껴 드세요"
혼분식에 동참한다는 생각 보다는
정말, 단지, 돈이 없어서 쌀밥을 싸오지 못한 것이었는데
친구들 앞에서 도시락이 들여 올려지고 혼분식의 모범사례로 꼽히더 그 순간을
아빠는 잊을 수가 없다고 하셨다.
어린 마음에 부끄러웠고 많이 속상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결심하셨다.
돈을 벌게 되면 내 가족만큼은 반드시 쌀밥을 먹이리!
이후 시간이 흘러 아빠는 엄마를 만나 결혼하셨고
첫 째인 나를 포함하여 딸 셋의 아빠가 되셨다.
그리고 아빠의 소원대로 우리 가족은 쌀밥만 먹게 되었다.
(다만 2000년대 중반 이후에는 아빠도 건강을 위해 잡곡밥을 드시기 시작하셨다.)
이 이야기는 내가 중학교 시절 즈음 아빠에게 들은 이야기다.
당시 아빠는
언젠가 나중에 꼭 자서전을 한 번 써보고 싶고
자서전을 쓴다면 맨 앞머리에 쓰고 싶은 이야기라며 들려주신 이야기다.
그 언젠가 자서전을 쓸 아빠를 응원하며
내가 새롭게 시작하는 브런치의 <"그것"과 생각> 제 1편에 꼭 이 이야기를 넣고 싶었다.
※ 사진 출처 : http://medicalworldnews.co.kr/news/view.php?newsid=1383069304
※ 혼분식 운동 정보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7/09/201507090033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