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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주 Aug 21. 2020

충청인의 사랑법

 얼마 전 tvN 예능 프로그램 <서울촌놈>을 보았다. 서울만 아는, 이른바 서울 촌놈 차태현과 이승기가 지방 출신 연예인들의 고향을 방문하여 함께 추억을 공유하며 여행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여행 예능에 대한 기대와 관심이 사라진 지 오래지만 일부러 찾아봤던 이유는 여행지가 현재 부모님이 살고 계시는 청주이기도 하지만 SNS에서 본 짧은 동영상이 꽤 강력한 진짜 웃음을 자아냈기 때문이다. 기면 기고(‘기다 ‘맞다정도의 뜻인 충청도 사투리인  알았는데 ‘그것이다 줄어든 옛말이라니) 아니면 아니라고 딱 부러지게 말하는 법이 없는 화법, 승낙할 의사가 있어도 곧바로 받아들이지 않고 일단 가볍게 거절하는 표현, 뭐든 한 번에 결정하지 않고 “봐서.”라고 결정을 유보하는 경향, 뭐지? 내 얘기하나? 나는 내 성격인 줄 알았는데 그런 것들이 충청인들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고향이 어디냐는 질문에 한 도시를 꼽을 수 없어서 나는 항상 ‘충청도’라고 답한다. 20대 중반까지는 충청남도 서천, 서산, 대천 등에서, 그 이후로는 충청북도 청주에서 살았다. 정확히는 20대부터 주로 수도권에 거주했지만 주소지는 충청도였고 어쨌든 고향이란 태어나서 성장한 곳을 말하니 내 고향 충청도요라고 말하는 데 무리는 없겠다. 게다가 충청도 출신에 약 60년 인생 대부분을 충청도에서 보낸 엄마 덕분에 내 몸에 충청인의 피가 기운이 흐르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런데 아아, 분명하고 확실하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것이 미덕인 이 시대의 아웃 오브 충청에서는 은근하고 신중한 나의 말과 태도가 배려와 품격이 아니라 그저 미적지근하고 답답한 충청도 지역성이었단 말인가.


 가만 생각해보면 나는 어렸을 때부터 분명하고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법이 거의 없었다. OX 퀴즈를 할 때도 항상 카운트다운이 시작되기 전까지 자리를 정하지 않았고 문방구에서 마음껏 고르라는 자유가 주어져도 이것저것 들춰보며 뭘 살지 고민하다가 언니가 사는 것을 슬쩍 따라 샀었다. 대학에서도 제 버릇 못 버리고 졸업여행 안 간다 안 간다 하다가 가기 전날에 “갈까..?”하고 지금 신청해도 되냐는 문의를 했었다. 졸업식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성향은 누군가와 싸울 때마저 직접적으로 상대의 문제점을 말하면 그가 마음 상할까 봐 빙빙 돌려서 말하는 나름의 배려로 나타나기도 했다.


 내가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던 만큼 다른 사람의 적극적인 말과 행동도 받아들이려면 에너지가 필요한 듯하다. 예를 들면 내가 받고 싶은 고백은 “나! 너! 사랑해!”가 아니라 어떻게 알았는지 내가 좋아하는 초콜릿을 건네며 “이거 먹을래?”라고 하는 것이다. 그럼 나는 또 충청스럽게 “방금 밥 먹었는데.” 하면서 먹는 거다. 남편과 연애할 때도 이벤트 같은 것은 절대 하지 말라고 강조했었고 노래를 꽤 잘하는 그에게 사랑의 세레나데 불렀다간 도망갈 줄 알라며 단단히 일러뒀었다. 이런 내가 기억하는 가장 감동적이었던 고백은 그가 혼자 뼈해장국을 먹다가 내 생각이 나서 내가 먹는 방식으로 먹었다는 말이었고 가장 고마웠던 이벤트는 새우튀김이 먹고 싶다는 말 한마디에 그가 마감 시간이 거의 다 된 시간에 마트에 달려가 새우튀김을 사서 우편함에 꽂아놓고 갔던 일이다. 그때 나는 또 충청스럽게 “내가 원하는 튀김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하며 맛있게 먹었었다.




 참외를 좋아하는 남편을 위해 지난 초여름, 참외가 나오기 시작한 후로 과일을 살 때면 나는 참외만 골랐다. 여기서도 굳이 고르라면 적극적으로 단맛이 나는 씨 부분보다 은은하고 청량한 과육 부분이 내 입맛에 낫긴 한데 혼자 살았으면 참외를 돈 주고 사 먹을 정도로 좋아하진 않지만 남편이 좋아하니까 냉장고에 채워두는 것이 나만의 사랑 표현인 것이다. 그런데 이제 참외의 시절이 가고 바야흐로 포도의 시대가 왔다. 맛이 강렬한 미국산 청포도나 한때 유행했던 샤인머스캣, 그 이후의 블랙사파이어 등등 그런 거 말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은근한 단내가 나는 그냥 포도(캠벨포도)가 마트에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눈을 쉽게 떼지 못하면서도 선뜻 내가 먹고 싶다고, 내가, 적극적으로, 주체적으로 사기가 쉽지 않았다.


 “포도 나왔더라.”

 연애할 땐 이 정도 시그널에도 금방 반응이 왔었는데 결혼 4년 차라 수신감이 떨어졌나.

 “포도 세일하더라.”를 지나

 “장 볼 때 포도 있었는데 안 샀어. 못 사겠어서….”라고 말하자 가자 가자 하며 나선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뒷수습이 험난할 것을 아는 동물적인 감각이었을까. 나에게 최고로 아름다운 장면은 수줍은 미소와 “네가 생각나서 샀어”와 포도 한 꾸러미겠고 그에게 최고로 속 편한 그림은 내가 알아서 사서 맛있게 먹는 것이겠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포도도 먹고 싶고 사랑도 느끼고 싶은 충청인인걸. 갑자기 측은한 우리 부산 사나이.




* 충청인이라 했지만 사실 저라는 사람이 그렇습니다. 모든 주체적이고 자주적이고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충청도민 여러분 존경합니다. (하트)


**매사에 나만 알아봐 주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상대의 마음과 필요를 말하지 않아도 알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지만 내가 그러니 당신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와 다른 성향의 남편을 만나고 내 생각과 감정을 직면하고 분명하게 표현하는 법을 많이 배웁니다. 남편도 저를 존중하고 제 장점을 배우고 닮으려 노력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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