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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주 Sep 15. 2020

겨울과 봄 사이

내가 사랑하는 계절


 아직 두꺼운 옷을 입고 있지만 단단히 여미지는 않아도 될 즈음 마른 가지에서 자그마한 생명의 기운이 움터 오를 때 길을 멈추게 된다. 마치 죽은 것 같아서 더 이상 눈길을 주지 않게 되었던 겨울 나무들에 싹이 돋아나면 어쩐지 코끝이 찡해진다. 살아있어 줘서 고맙다고, 아직 추운데 괜찮겠냐고 인사를 건네고 싶어진다.

 사무실 베란다 통창은 야트막한 야산으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삭막한 서울에서 나름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곳이라 아침마다 창을 활짝 열어 간밤에 묵었던 공기를 내보내며 마음속까지 환기하는 것이 사무실 막내인 나의 루틴이었다. 겨울이 되면 바람이 차갑기도 하고 창밖 풍경도 건조하고 뾰족한 탓에 창문만 잠깐 열고 휙 돌아설 때가 많았다. 찬 공기라도 조금 들이마시면 무거운 머릿속이 상쾌해졌을 텐데 마음의 빗장을 걸어 잠그기라도 한 양 단단히 낀 팔짱을 풀지 않고 창문만 여닫은 후 금세 자리를 뜨곤 했다.

 이제 너무 웅크리지 않아도 될 만큼 날씨도 마음도 풀어졌던 어느 날, 회갈색 바탕이었던 산허리가 연둣빛 초록빛으로 군데군데 물들어 있었음을 깨닫고 한참을 서 있었다. 어김없이 오는구나 봄은, 하고 생각했다. 그날 이후로 다시 창문 앞에 가만히 서 있는 시간이 늘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산이 온통 푸른색으로 채워졌는데, 주변 친구들은 모두 깨끗한 새 옷을 입었는데도 하얀 가지들만 앙상하게 남아 있던 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몸통이 갈색이 아니라 흰색인 것도 신기했지만 그래서 마른 몸이 더 눈에 띄었고 더 걱정스러웠다. 내 걱정하는 마음을 알아차린 것은 아니겠지만 지각생 흰 나무는 일주일 후에 가지마다 움을 틔웠고 이내 친구들보다 더 반짝이는 봄옷을 입었다. 나도 갑옷 같은 두꺼운 무채색 겨울옷을 벗을 수 있는 계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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