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현주 Sep 16. 2020

아빠와 환갑 선물

내가 사랑하는 가족


 어떻게 60번째 음력 생일 당일이 한 해의 첫날일 수 있는지, 평범함을 거부하는 아빠에게 딱 어울리는 날이었다. 내가 믿는 신은 이마저도 계획하고 아빠를 이 땅에 보낸 것 아닌가, 기막힌 우연에 잠시 엉뚱한 생각이 스쳤다. 고작 둘뿐인 딸들 일찍이 출가시킨 터라 언젠가부터 당일에 생일 케이크를 자르는 일이 어려워졌었는데 마침 휴일이라 모두 기쁘게 모일 수 있었다.

 조촐하지만 함께 모인 자리에서 노래도 불렀고 촛불도 불었고 고기도 썰었고 웃으며 사진도 찍었다. 우리는 남들에 비해 규모가 작은 선물을 부끄러워하면서 전했고, 남들의 자랑과 과시를 숱하게 보고 들었겠지만 우리의 사정을 더 뻔히 아는 아빠는 기쁘게 받았다. 특유의 유쾌한 표정으로 고맙다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사실 더 부끄러운 선물은 그다음이었다. 함께 식사를 마친 막내 작은 아빠 가족이 돌아가고 우리 식구들끼리만 다시 둘러앉았다. 언니와 형부와 남편과 나는 주섬주섬 각자 써온 편지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이벤트 왕을 이기기 위해서는 가장 고전적인 것이 가장 참신한 법이었다. 그게 뭐라고 그렇게 떨리는지 마지막인 내 차례가 되기도 전에 멀미가 나는 듯했고 손에 땀도 나기 시작했다. 서로 가릴 것도 없는,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진심을 꺼내 보이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긴장해서인지 고마워서인지 애틋해서인지 몇 줄 가지 못해서 결국 눈물이 터졌다. 마치 사연 많은 사람처럼 울면서 꾸역꾸역 낭독을 이어갔다. 아빠가 참 든든하다, 아빠 손이 크고 따뜻하다, 아빠를 정말 사랑한다, 같은 진부한 말들이었는데 여자 셋은 울고, 남자 둘은 당황하고, 주인공 남자는 감동했다.

 우당탕탕 사랑의 편지 낭독회를 마친 후 우리는 모두 코를 팽 풀고 어색한 공기를 바꾸려고 웃었다. “너 왜 울어.” 서로에게 핀잔을 주기도 하면서.
 
 그때였다.

 “사랑하는 아버님께.”
 첫 타자로 시작했던 형부의 목소리가 어디선가 흘러나왔고, 아빠는 씨익 웃으며 책상다리 사이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짓궂은 아빠가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평생 놀림감 하나 추가됐지만 그것도 환갑 선물로 쳐야겠다고 생각했다.

 “야, 하루에도 몇 번씩 듣는다야.”
 며칠 후 엄마와 통화하면서 들었던 아빠의 근황에 다시 코가 시큰해졌다.

매거진의 이전글 겨울과 봄 사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