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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Frame Dec 29. 2017

무모하기에 극적이다

#04. 프로포즈


프로포즈는 베트남의 어느 리조트에서 했다. 사귄 지 1년 반 정도가 지난 시점이었다.  '함께 살면 심심하진 않겠다'는 게 프로포즈를 결심한 이유였다. 지금도 이 이유에 대해 당신은 어이없어하지만, 적어도 내게는 꽤 중요한 문제였다. 여행을 준비하며 반지를 사고 블루투스 스피커를 챙겼다. 어느 영화에서 인상 깊게 본 것처럼, 이른 아침, 분위기 있는 음악과 함께 잠이 덜 깬 당신에게 반지를 건넬 생각이었다. 결혼에 대한 사전동의가 전혀 없는 상태였지만, '거절당하면 어쩌지'하는 두려움은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겁도 없었다.

오전 중에 근처의 관광지를 둘러보고, 리조트에 딸린 수영장에서 즐거운 오후를 보냈다. 숙소로 돌아와 보니 저물어가는 태양이 발코니로 쏟아지고 있었다. 온갖 풀벌레 소리와 시야를 가득 메운 초록은 향기로웠다. 세계의 은밀한 비밀을 발견한 듯, 멍하니 앉아 그 순간을 만끽했다. 어떤 단어도 더하거나 뺄 필요 없이 충분했던 그 순간, 가까스로 프로포즈를 떠올린 건 천만다행이었다.

나도 모르게 꿇어지는 무릎. 길고 깊은 눈 맞춤. 두근거림으로 떨리는, 하지만 또렷한. 양손 끝으로 집어 올린 반지. 그보다 반짝이는 눈물방울.

울컥거리는 감정을 추슬리며 눈물을 닦아줬다.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며 당신의 왼손 셋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줬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 짧은 시간 동안 쏟아져 들어왔다. 평생 누려보지 못할 것 같은 행복에 근접했다는 강한 예감. 예측 불가능한 위험에 내 인생을 송두리째 내던지는듯한 아득함. 최고의 성과를 이루어낸 듯한 만족감. 지금껏 이뤄낸 모든 것들이 잿더미가 되어버리는 듯한 불안함. 상반된 감정들이 마구잡이로 교차하던 그 순간이 어찌나 강렬하던지 지금도 잊을수가 없다. 부모와 자식처럼 하늘에서 맺어준 가족이 아닌, 내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한 가족.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완전한 ‘남’이면서도, 완전한 내 편. 평생 함께 손 붙잡고, 발맞추어 걸어갈 사람. 스스로에 대한 확신도 없는데, 우리는 어째서 서로를 허락했을까. 그 무모함 덕분에 고백의 순간은 더욱 극적이다.

그 후로 계절은 다시 돌아왔고 극적인 순간을 몇 개는 지나, 일상은 평화롭다 못해 평범하다. 가끔씩 생각이 나면 몰래 설치한 카메라에 담긴 프로포즈의 순간을 함께 돌려보곤 한다. 서로의 얼굴에 담긴 흐뭇한 미소로, 우리의 무모함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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